본문 바로가기

LifeStyle issue

한국 여대생, 이탈리아 대사가 되다

글 오홍석 기자

입력 2022.03.23 10:35:01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여성의 날’을 맞아 여대생을 일일 대사로 임명하는 특별 행사를 열었다.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 임원부터 이탈리아 양성평등부 장관까지 참석한 이 행사는 왜 열렸을까.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일일 대사 체험’에 일일 대사로 선발된 김채원 학생.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일일 대사 체험’에 일일 대사로 선발된 김채원 학생.

“‘이탈리안잡’은 단순한 일자리 중개 플랫폼인가요? 아니면 참여 학생에게 정책적 지원도 제공하나요?”

부산외국어대 김채원(26) 학생이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 임원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임원은 잠깐 멈칫하더니 “아쉽지만 아직 상공회의소 차원의 지원은 없다”고 답했다. 3월 6일,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열린 한 회의 풍경이다.

세계 여성의 날을 이틀 앞둔 이날,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은 한국 여대생이 이탈리아 대사의 하루를 체험해보는 행사를 열었다. 여성의 외교 분야 진출을 독려할 목적으로 기획한 이벤트다. 이탈리아어 논술 공모전을 통해 ‘일일 대사’로 선발된 김 씨는 대학에서 이탈리아어를 전공하는 학생. 그는 이날 페데리코 파일라 주한 이탈리아 대사와 함께 여러 행사에 참석하며 유창한 이탈리아어와 영어 솜씨를 뽐냈다.

김 씨가 언급한 이탈리안잡은 지난해 12월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과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가 공동으로 마련한 것. 한국 학생에게 이탈리아 기업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기회를 제공하고 취업도 알선하는 프로그램이다.

아세안 면담 참석하고 이탈리아 양성평등부 장관과 회의

페데리코 파일라 주한 이탈리아 대사와 김채원 학생이 엘레나 보네티 이탈리아 가족 및 양성평등부 장관(초록색 마스크 착용)과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페데리코 파일라 주한 이탈리아 대사와 김채원 학생이 엘레나 보네티 이탈리아 가족 및 양성평등부 장관(초록색 마스크 착용)과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이날 김 씨의 일정은 오전 10시, 파일라 대사가 주재하는 주간 일정 보고 회의로 시작했다. 전날 부산에서 올라온 김 씨는 “너무 떨려 아침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막상 회의가 시작되자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파일라 대사와 한국 주재 이탈리아 외교관들이 이탈리아어로 주고받는 대화를 경청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되묻기도 했다.



오전 11시 파일라 대사와 김 씨는 장소를 옮겨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하이 스트리트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무역공사(ITA)가 운영하는 홍보관인 이곳에서는 한국과 이탈리아 사이 교역 현황에 대한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 임원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프란체스코 푸시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장, JTBC 토크쇼 ‘비정상회담’ 등으로 이름을 알린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 부회장) 등도 이 회의에 참석했다.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관계자에 따르면 상공회의소 임원 보고는 보통 분기마다 한 번씩 이뤄진다. 그는 “이번 회의는 일일 대사 체험 행사를 위해 특별히 소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회의 모습.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회의 모습.

파일라 대사는 이 자리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이탈리아의 음식, 가구, 패션만 부각되는 면이 있다”며 “이 분야의 홍보를 지속하되, 이탈리아가 강점을 가진 제약이나 우주항공 분야에 대한 인식도 제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씨의 다음 일정은 정의혜 외교부 아세안(ASEAN) 국장과의 면담. 정 국장은 2월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다녀온 ‘파리 인도·태평양 협력에 관한 장관회의’ 결과를 파일라 대사에게 전달하고자 이날 대사관을 찾았다. 외교관을 꿈꾸는 김 씨는 면담이 끝난 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의혜 국장이 기품 있고 당당한 자세로 한국 외교부의 입장을 전달하며 대화를 매끄럽게 주도해나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면서 “미래에 정 국장 같은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날 체험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김 씨와 엘레나 보네티 이탈리아 가족 및 양성평등부 장관과의 화상회의였다. 김 씨가 보네티 장관에게 “장관으로서 시행한 가장 자랑스러운 정책”에 대해 묻자 그는 “가족법(Family Act) 제정과 2021~2026 성평등 국가전략 수립”을 꼽았다. 이탈리아는 2020년 저출산 문제 해결 등을 목적으로 가족법을 제정했다. 신혼부부 주택 임차료 세제 혜택 제공, 육아휴직 보장, 21세 이하 자녀 1인당 매달 최대 250유로(약 34만원) 지급, 6세 이하 자녀 교육비 지원 등이 골자다. 보네티 장관은 ‘2021~2026 성평등 국가전략’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정부가 마련한 ‘국가 재건 프로젝트(Piano Nazionale di Ripresa e Resilienza)’의 일환으로 취업·급여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네티 장관과의 화상회의를 마지막으로 일일 대사 체험을 마친 김 씨는 “처음엔 너무 떨려 손에서 땀이 줄줄 났는데, 지금은 하루가 끝난 게 아쉽다”며 “글로만 보던 외교 현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 매우 뜻깊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또 “일일 대사의 경험을 살려 훗날 주이탈리아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싶은 소망이 더 간절해졌다”고 덧붙였다. 파일라 대사는 “평소 대사의 하루 일정이 이렇게까지 빼곡하지는 않다. 김채원 학생이 여러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스케줄을 마련한 것”이라며 “오늘 행사가 김채원 학생에게 소중한 경험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여성 인권신장에 대한 이탈리아의 의지 보여준 행사”
페데리코 파일라 주한 이탈리아 대사 인터뷰
페데리코 파일라 주한 이탈리아 대사.

페데리코 파일라 주한 이탈리아 대사.

3월 6일 ‘일일 대사 체험’ 동행 취재를 마치고 3월 11일, 서울 한남동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페데리코 파일라 대사와 마주 앉았다. 백발의 파일라 대사는 ‘아시아통’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 외교관 생활 대부분을 홍콩,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서 보냈다. 2006년 고국에 돌아가 아태지역국 동아시아부장을 맡기도 했다. 주한 이탈리아 대사로 부임한 건 2019년 3월. 한국 생활 3년째를 맞이한 그에게 우리나라에 대한 인상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부임하신 지 3년이 넘어갑니다. 대사님께서 느끼시기에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요.

한국은 전통과 미래가 혼재하는 흥미로운 나라입니다. 기술이 굉장히 발전했지만 동시에 가족과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탈리아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또 한국 식당은 이탈리아 요리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여대생을 대상으로 ‘일일 대사 체험’ 행사를 기획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두 가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최근 ‘국가 재건 프로젝트’의 핵심 의제 중 하나로 ‘성평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기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이번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두 번째는 대사관이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었습니다. 외교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대사관이 평소 어떤 업무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저는 공공기관은 투명해야 한다고 믿고, 이런 행사를 통해 베일에 싸인 대사관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이탈리아가 성평등 실현을 국가 차원의 핵심 의제로 정했다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치고 있나요.

이탈리아는 지난해 유럽연합(EU)의 ‘2020~2025 성평등 전략’에 발맞춰 ‘2021~2026 성평등 국가전략’을 수립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성평등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를 구체적인 수치로 정해뒀습니다. 앞으로 이것을 지키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쏟을 것입니다. 이탈리아가 성평등을 국가적인 과제로 제시한 건 이번이 사상 처음입니다. 개인적으로 성평등은 하나의 사회적 의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점 많은 한국·이탈리아, 협력하면 시너지 가능”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 회의에서 한국과 이탈리아의 협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 수준입니까. 양국의 협력이 용이할 거라고 보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제 세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1966년과 2002년 두 번의 월드컵에서 북한과 한국에 각각 패배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이탈리아가 한국에 패했는지 잘 모르죠(웃음). 요즘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국 하면 휴대전화와 자동차 등을 떠올립니다. 최근에는 ‘한류’ 같은 소프트 파워의 영향력도 커졌고요(이날 인터뷰 내내 영어로 답변을 이어가던 파일라 대사는 ‘한류’를 한국어로 또렷하게 발음했다). K팝과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의 연이은 흥행으로 이제 한국 문화를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한국과 이탈리아는 둘 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입니다. 양국 모두 냉전을 원치 않는 것도 공통점이고요. 경제적으로나 문화·군사적으로나 협력을 확대할 여지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어떤 산업 영역에서 한국과 이탈리아가 협력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까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탈리아는 소비에트연방,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국가입니다. 또 이탈리아의 제약 산업은 EU 최고 수준입니다. 한국은 반도체에 강점이 있죠. 이처럼 각각 강점이 있는 분야의 노하우를 교환한다면 ‘윈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두 나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교역 파트너입니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로 따지면 1위 국가이고요.

한국 학생이 이탈리아 기업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이탈리안잡’ 프로그램은 양국 간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제가 아시아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아시아권에는 이탈리아 문화에 대해 아는 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종종 있었죠. 국가 간 협력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단순히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넘어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양 국가의 언어와 문화에 능통한 중개자를 양성하고자 ‘이탈리안잡’이라는 프로그램을 개설한 겁니다.

하지만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 학생이 선뜻 이탈리아로 떠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제 걸음마를 떼는 단계라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장학재단과 장학기금 조성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학생에게도 기회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현재 이탈리아에 있는 한국 유학생은 대부분 미술이나 음악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탈리아는 기술·공학에도 강점이 있는 국가입니다. 지난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학생에게는 6~12개월간 취업 비자를 제공하기도 하니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국가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한이탈리아대사관 #일일대사체험 #페데리코파일라 #여성동아

사진 오홍석 기자
사진제공 주한이탈리아대사관



여성동아 2022년 4월 700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