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가족의 미국 이민사를 그린 영화 ‘미나리(3월 3일 개봉)’가 해외 영화제에서 잇달아 낭보를 전해오고 있다. 지난해 2월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 수상을 시작으로 지난 2월 28일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까지 세계 유수의 영화제 수상 소식을 연이어 전해오고 있는 것. 할머니 순자 역할을 맡은 윤여정이 수상한 미국 내 영화상만 해도 26개다. 게다가 오는 4월 25일 열릴 예정인 제93회 아카데미시상식(오스카)의 주요 후보로 거론되며, 벌써부터 ‘제2의 기생충’ 탄생이 점쳐지고 있다. ‘기생충’은 지난해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 각본상 등 4관왕을 휩쓸었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 아칸소 주의 농장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족의 특별한 여정을 담아냈다. 한국계 미국 배우 스티븐 연(제이콥)을 주축으로 한예리(모니카)와 윤여정(순자), 또 다른 한국계 미국 배우인 앨런 김(데이빗)과 노엘 조(앤)가 출연했다.
한예리(37)는 이 작품으로 세계 영화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대세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 전문 매체 ‘골드 더비’는 “‘미나리’의 성공 열쇠는 한예리”라고 극찬했고, 미국 매체 ‘할리우드 리포터’는 그녀를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했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엔터테인먼트 연합(CAFE)이 주최한 ‘2021 골드리스트(Gold List)’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예리가 직접 노래를 부른 OST ‘Rain Song’은 오스카 음악상, 주제가상 부문에 1차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그는 연기자와 스태프 대부분이 미국인인 ‘미나리’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지닌 모니카 역할을 맡았다. 낯선 땅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며, 위기에 처한 가족을 굳건히 지키는 여성이다. 정이삭 감독은 모니카를 한국에서 나고 자란 배우로 캐스팅하고자 했고, 꼭 맞는 배우로 한예리가 발탁됐다.
영화 속 한예리는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아름답게 그려진다. 차분하고 단아한 매력이 돋보이는데 이는 그가 한국무용을 전공한 것과 무관치 않다. 한예리는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 이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국무용과를 거친 엘리트 무용수 출신이다. 한예종 재학 시절 영상원 무용 지도를 도와주다 연기와 인연을 맺어 2005년 단편영화 ‘사과’로 데뷔했다. 2012년 영화 ‘코리아’(2012)에서 북한 탁구선수 유순복으로 출연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렸으며 이후 영화 ‘최악의 하루’(2016)와 ‘더테이블’(2016), ‘챔피언’(2018), 드라마 ‘청춘시대’(2016)와 ‘녹두꽃’(2019),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2020) 등 쉼 없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특히 쌍꺼풀 없는 동양적이면서 우아한 얼굴은 한예리만의 매력 포인트로 꼽힌다.
-‘미나리’가 각종 해외 영화제를 휩쓴 것은 물론 다음 달 열리는 오스카상 주요 부문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어요.
매일 좋은 소식이 들려서 기쁘고 설레지만 코로나19로 시상식이 열리지 못하는 탓에 현장에서 직접 체감하지 못해서 그런지 덤덤하게 넘기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점이 다음 작업을 하는 데는 오히려 좋은 것 같아요. ‘미나리’는 요즘처럼 답답하고 힘든 시기에,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한 이해나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많은 생각과 따뜻함을 얻어갈 수 있는 작품이에요. 국내에도 개봉하게 돼 기쁩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소감이 어떤가요.
윤여정 선생님은 ‘미나리’에 대해 “할리우드 작품이라고 하는데 할리우드의 ‘H’도 못 봤다”라고 하시곤 했어요. 사실 저 또한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거창한 생각은 안하고 있고요. 제 할리우드 활동의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요.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웃음).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감독님을 만나기 전에 대본을 먼저 받았어요. 첫 대본이다 보니 번역이 완벽하지 않았고,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다 알 수 없어서 감독님을 빨리 만나고 싶었어요. 막상 감독님을 뵈었을 땐 정말 따뜻하고 좋은 분이란 인상을 받았고요. 자신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저와 많이 다르지 않더라고요. 함께 조율해서 풍부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해서든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어 출연을 결정했어요. 제가 당시 드라마 ‘녹두꽃’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종영 스케줄이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 “혹시라도 제가 안 되면 다른 배우를 소개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던 기억도 나요. 감독님께서“모니카는 한국적인 캐릭터라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배우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스토리라 모니카라는 인물을 그릴 때 감독님의 이야기가 중요했을 것 같아요.
(모니카는 감독님의 어머니가 투영된 인물이지만)자신의 어머니처럼 연기해달라고 주문하지는 않으셨어요. 또 모니카가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고요. 대신 “어릴 적 부모님이 싸웠을 때, 다퉜을 때 기억이 있냐. 내 부모님은 이랬던 것 같다”는 식으로, 과거에 느꼈던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감독님 어머니와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머님을 직접 뵀는데 정말 곱고 예쁘시더라고요. 아이들을 잘 길러 내시고, 이민 생활을 이겨내신 분이라 멋있고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속에서 한국적인 감탄사인 ‘아이고’ 같은 표현이 눈에 띄었어요.
‘아이고’는 제가 평소 잘 쓰는 표현이에요.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시고요. 기쁠 때나 슬플 때, 또는 모든 감정을 표현하며 ‘이게 무슨 일이야’ 할 때 ‘어휴’처럼 ‘아이고’라고 말해요. 모니카는 친정엄마가 미국까지 너무 멀고 험한 길을 온 거라, 엄마가 온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을 것 같아요. 대사 이외에 순자와 모니카를 이어주는 더 한국적인 말들이 필요했을 듯했고, ‘어휴’ ‘아이고’라는 말을 붙여 대사를 했어요.
-영화 속에는 여러 어려움과 갈등이 나오지만, 감정을 내지르지 않고 담백하게 표현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극중 병원에서 대기하는 동안 모니카는 제이콥을 붙잡아요. 하지만 제이콥은 뜻을 굽히지 않고 가족이 아닌 일(꿈)을 택하죠. 다행히 이들 가족의 일들이 하나씩 해결되고,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도 되는 상황이 됐지만, 모니카는 제이콥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또 내게 이런 일(가족이 해체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헤어지자”고 말해요. 그때 배우 한예리는 울고 있었지만, 모니카는 울면 안 됐어요.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신을 찍으며 정말 많이 울었고, 눈물이 나오는 걸 참기 힘들었어요. 그러면서 힘든 것도 단호하게 표현해 내는 사람이라서, 모니카가 더 강하고 대단하다고 느껴졌어요.
-윤여정 씨 외에 모두 미국 배우였고, 감독도 한국계 미국인이라 힘든 점은 없었나요.
일단 감독님이 미국에서 나고 자란 분이긴 하지만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한국인과 다르지 않았고, 정서도 비슷하다고 생각됐거든요. 배우들과도 그렇고요. 마음이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고 영화를 사랑한다고 느꼈어요. 할리우드 시스템 같지 않다고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였죠.
-미국에서 ‘제2의 기생충’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얻고 있어요. 어떤 점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나요.
어린 시절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많지만, ‘미나리’에는 특히 이민자들이 느끼는 감정이 풍성하게 담겨 있는 듯해요. 미국은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섞이고 부딪히면서 만들어낸 다양한 문화가 있잖아요. 가령 한국인 이민자들은 밖에 나가면 미국인과 섞여 살아가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집에 오면 한국인이 되어야 해요. 그러다보니 부모와 자녀 세대 간에 소통의 어려움이 생기고요. 온전히 미국인도, 그렇다고 한국인도 되지 못하는 중간에 걸쳐 있는 어중간한 상태가 되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깨닫는 점이 있는 듯해요. “아, 부모님이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길렀구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길러냈구나”라고요. 부모님은 삶의 투쟁이 있었고, 그 결과로 자리 잡고 살아가게 되는 감사함 같은 거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듬어 줄 수 있고, 그때 받은 상처를 치유하게 되지 않을까요.
-미국 이민자들의 이야기이다 보니, 오히려 우리나라에서의 반응이 좀 다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국내 관객들은 “왜 이 영화가 ‘제2의 기생충’이라고 불리고, 오스카상 후보에 올라갔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실망하실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이 작품은 ‘기생충’과는 다른 ‘미나리’만의 온전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모니카에게서 어떤 점을 느꼈고, 캐릭터를 통해 어떤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제이콥과의 관계였어요. ‘이 여자는 제이콥을 왜 사랑하나, 왜 이 남자 곁에 있나? 모니카가 가장 원하는 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깨닫게 된 건 모니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에너지는 사랑이라는 점이에요. 사랑이 뿌리를 내려 모니카를 굉장히 단단하게 지탱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모니카는 누구보다 가정의 해체를 원하지 않고, 아이들을 보다 나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 하며, 제이콥을 너무 사랑해서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에요. 그런 것들을 연기하면서 더 많이 느낀 것 같아요.
-‘미나리’는 가족 간의 갈등과 봉합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어요. 연기에 몰입하기 위해 특별히 떠올렸던 경험들이 있나요.
아이 앞에서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는 어릴 때 아빠와 싸우는 엄마의 표정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꾹 참던 입매, 눈빛들이 제 기억에 있더군요. 엄마도 어린 나이에 아이를 키우는 거잖아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니카의 엄마 ‘순자’를 보면서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이 있나요.
실제로 영화에서처럼 저도 할머니에게 화투를 배웠어요. 할머니는 제게 음식을 잘 해주셨는데, 식혜든 삼계탕이든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은 모두 차려주셨어요. 음식을 차려주시고는 얼굴이 반쪽이 됐다고 슬퍼하시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를 자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 엔딩에서 순자에게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희 할머니는 극중 순자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셨지만 할머니를 추억하게 돼서 좋았고, 더 보고 싶어졌어요.
-예산이 빠듯해서 배우들이 숙소를 함께 쓰고 촬영도 6주 정도에 마쳤다고 들었어요.
에어비앤비로 집을 구해서 다 같이 지냈는데, 배우와 스태프 외에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와서 도와줬어요. 각자 호텔에서 지냈더라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드는 동안 숙소는 매일 다 같이 모여 편하게 이야기 하고, 식사를 함께 하는 아지트 같은 공간이 됐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두 함께 밥 먹는 시간이에요. 그때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과 모여서 다시 한 번 다 같이 식사하고 싶어요.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고 그립네요.
-윤여정 씨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너무 좋았어요. 윤여정 선생님은 익히 알려져 있듯 유머감각이 뛰어나시고 재치도 있고 매력이 넘치는 분이에요. 선생님의 유머가 현장에서 좋은 에너지이고, 필요하다는 걸 배웠어요. 그러면서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알게 됐죠. 또 하나 선생님을 통해 용기를 배웠어요. 나이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모르는 사람과의 작업도 전혀 걱정 없이 해내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원래 걱정이 많은 편이거든요. 작품을 촬영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륙했을 때부터 걱정을 했을 정도에요. 저와 반대로 선생님은 항상 당당하셨어요. 또 하나 솔직함도 배웠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좋으면 좋다고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직접 부른 OST ‘레인송’(Rain song)이 오스카 주제가상 1차 후보에 올랐어요.
감독님께서 노래를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을 때, 영화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음악을 담당한 에밀 모세리 감독님이 현장에서 OST의 멜로디를 들려주셨는데, 아름답더라고요.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불러주면 좋겠다고 요청하셔서 부담 갖지 않고 불렀어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오스카 1차 후보로 오르는 걸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영화 ‘뮬란’의 주제가를 부른)크리스티나 아길레나와의 경합’이라는 기사 제목까지 나와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제가 부른 OST는 잘 부른 노래가 아니라 영화 분위기에 맞는 곡이에요. 신기하면서 너무 쑥스럽네요.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작품을 선택할 때 기준은요.
그때그때 달라요. 캐릭터가 좋아서, 감독님과 통해서 등 이유가 다양하죠. ‘꼭 이래야만 돼’라고 고집하는 건 없지만 항상 중요시하는 건 감독님과의 소통이에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영화가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해요.
-영화 속 모니카는 낯선 땅에 이민 와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겪어요. 한예리 씨도 살면서 편견이나 벽에 부딪혀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나요.
요즘은 편견이나 차별 같은 것들이 많이 부서지고 깨지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무용을 하면서, 또 연기를 하면서 많은 편견에 부딪혀왔어요.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이 있지만 아마 살아가면서 계속 부딪히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다만 그게 벽이라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만약 벽이라고 느껴진다면 부수면서 잘 헤쳐 나갔으면 좋겠고요.
-앞으로 어떤 배우로 남고 싶은가요.
멋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윤여정 선생님처럼 오랫동안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고, 향기를 잃지 않는 배우였으면 해요. 욕심이지만 한 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사진제공 판씨네마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 아칸소 주의 농장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족의 특별한 여정을 담아냈다. 한국계 미국 배우 스티븐 연(제이콥)을 주축으로 한예리(모니카)와 윤여정(순자), 또 다른 한국계 미국 배우인 앨런 김(데이빗)과 노엘 조(앤)가 출연했다.
한예리(37)는 이 작품으로 세계 영화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대세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 전문 매체 ‘골드 더비’는 “‘미나리’의 성공 열쇠는 한예리”라고 극찬했고, 미국 매체 ‘할리우드 리포터’는 그녀를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했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엔터테인먼트 연합(CAFE)이 주최한 ‘2021 골드리스트(Gold List)’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예리가 직접 노래를 부른 OST ‘Rain Song’은 오스카 음악상, 주제가상 부문에 1차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그는 연기자와 스태프 대부분이 미국인인 ‘미나리’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지닌 모니카 역할을 맡았다. 낯선 땅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며, 위기에 처한 가족을 굳건히 지키는 여성이다. 정이삭 감독은 모니카를 한국에서 나고 자란 배우로 캐스팅하고자 했고, 꼭 맞는 배우로 한예리가 발탁됐다.
영화 속 한예리는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아름답게 그려진다. 차분하고 단아한 매력이 돋보이는데 이는 그가 한국무용을 전공한 것과 무관치 않다. 한예리는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 이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국무용과를 거친 엘리트 무용수 출신이다. 한예종 재학 시절 영상원 무용 지도를 도와주다 연기와 인연을 맺어 2005년 단편영화 ‘사과’로 데뷔했다. 2012년 영화 ‘코리아’(2012)에서 북한 탁구선수 유순복으로 출연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렸으며 이후 영화 ‘최악의 하루’(2016)와 ‘더테이블’(2016), ‘챔피언’(2018), 드라마 ‘청춘시대’(2016)와 ‘녹두꽃’(2019),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2020) 등 쉼 없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특히 쌍꺼풀 없는 동양적이면서 우아한 얼굴은 한예리만의 매력 포인트로 꼽힌다.
-‘미나리’가 각종 해외 영화제를 휩쓴 것은 물론 다음 달 열리는 오스카상 주요 부문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어요.
매일 좋은 소식이 들려서 기쁘고 설레지만 코로나19로 시상식이 열리지 못하는 탓에 현장에서 직접 체감하지 못해서 그런지 덤덤하게 넘기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점이 다음 작업을 하는 데는 오히려 좋은 것 같아요. ‘미나리’는 요즘처럼 답답하고 힘든 시기에, 어릴 적 부모님에 대한 이해나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많은 생각과 따뜻함을 얻어갈 수 있는 작품이에요. 국내에도 개봉하게 돼 기쁩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소감이 어떤가요.
윤여정 선생님은 ‘미나리’에 대해 “할리우드 작품이라고 하는데 할리우드의 ‘H’도 못 봤다”라고 하시곤 했어요. 사실 저 또한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거창한 생각은 안하고 있고요. 제 할리우드 활동의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요.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웃음).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감독님을 만나기 전에 대본을 먼저 받았어요. 첫 대본이다 보니 번역이 완벽하지 않았고,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다 알 수 없어서 감독님을 빨리 만나고 싶었어요. 막상 감독님을 뵈었을 땐 정말 따뜻하고 좋은 분이란 인상을 받았고요. 자신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저와 많이 다르지 않더라고요. 함께 조율해서 풍부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해서든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어 출연을 결정했어요. 제가 당시 드라마 ‘녹두꽃’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종영 스케줄이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 “혹시라도 제가 안 되면 다른 배우를 소개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던 기억도 나요. 감독님께서“모니카는 한국적인 캐릭터라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배우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스토리라 모니카라는 인물을 그릴 때 감독님의 이야기가 중요했을 것 같아요.
(모니카는 감독님의 어머니가 투영된 인물이지만)자신의 어머니처럼 연기해달라고 주문하지는 않으셨어요. 또 모니카가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고요. 대신 “어릴 적 부모님이 싸웠을 때, 다퉜을 때 기억이 있냐. 내 부모님은 이랬던 것 같다”는 식으로, 과거에 느꼈던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감독님 어머니와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머님을 직접 뵀는데 정말 곱고 예쁘시더라고요. 아이들을 잘 길러 내시고, 이민 생활을 이겨내신 분이라 멋있고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속에서 한국적인 감탄사인 ‘아이고’ 같은 표현이 눈에 띄었어요.
‘아이고’는 제가 평소 잘 쓰는 표현이에요.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시고요. 기쁠 때나 슬플 때, 또는 모든 감정을 표현하며 ‘이게 무슨 일이야’ 할 때 ‘어휴’처럼 ‘아이고’라고 말해요. 모니카는 친정엄마가 미국까지 너무 멀고 험한 길을 온 거라, 엄마가 온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을 것 같아요. 대사 이외에 순자와 모니카를 이어주는 더 한국적인 말들이 필요했을 듯했고, ‘어휴’ ‘아이고’라는 말을 붙여 대사를 했어요.
-영화 속에는 여러 어려움과 갈등이 나오지만, 감정을 내지르지 않고 담백하게 표현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극중 병원에서 대기하는 동안 모니카는 제이콥을 붙잡아요. 하지만 제이콥은 뜻을 굽히지 않고 가족이 아닌 일(꿈)을 택하죠. 다행히 이들 가족의 일들이 하나씩 해결되고,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도 되는 상황이 됐지만, 모니카는 제이콥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또 내게 이런 일(가족이 해체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헤어지자”고 말해요. 그때 배우 한예리는 울고 있었지만, 모니카는 울면 안 됐어요.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신을 찍으며 정말 많이 울었고, 눈물이 나오는 걸 참기 힘들었어요. 그러면서 힘든 것도 단호하게 표현해 내는 사람이라서, 모니카가 더 강하고 대단하다고 느껴졌어요.
-윤여정 씨 외에 모두 미국 배우였고, 감독도 한국계 미국인이라 힘든 점은 없었나요.
일단 감독님이 미국에서 나고 자란 분이긴 하지만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한국인과 다르지 않았고, 정서도 비슷하다고 생각됐거든요. 배우들과도 그렇고요. 마음이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고 영화를 사랑한다고 느꼈어요. 할리우드 시스템 같지 않다고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였죠.
-미국에서 ‘제2의 기생충’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얻고 있어요. 어떤 점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나요.
어린 시절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많지만, ‘미나리’에는 특히 이민자들이 느끼는 감정이 풍성하게 담겨 있는 듯해요. 미국은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섞이고 부딪히면서 만들어낸 다양한 문화가 있잖아요. 가령 한국인 이민자들은 밖에 나가면 미국인과 섞여 살아가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집에 오면 한국인이 되어야 해요. 그러다보니 부모와 자녀 세대 간에 소통의 어려움이 생기고요. 온전히 미국인도, 그렇다고 한국인도 되지 못하는 중간에 걸쳐 있는 어중간한 상태가 되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깨닫는 점이 있는 듯해요. “아, 부모님이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길렀구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길러냈구나”라고요. 부모님은 삶의 투쟁이 있었고, 그 결과로 자리 잡고 살아가게 되는 감사함 같은 거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듬어 줄 수 있고, 그때 받은 상처를 치유하게 되지 않을까요.
-미국 이민자들의 이야기이다 보니, 오히려 우리나라에서의 반응이 좀 다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국내 관객들은 “왜 이 영화가 ‘제2의 기생충’이라고 불리고, 오스카상 후보에 올라갔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실망하실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이 작품은 ‘기생충’과는 다른 ‘미나리’만의 온전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모니카에게서 어떤 점을 느꼈고, 캐릭터를 통해 어떤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제이콥과의 관계였어요. ‘이 여자는 제이콥을 왜 사랑하나, 왜 이 남자 곁에 있나? 모니카가 가장 원하는 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깨닫게 된 건 모니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에너지는 사랑이라는 점이에요. 사랑이 뿌리를 내려 모니카를 굉장히 단단하게 지탱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모니카는 누구보다 가정의 해체를 원하지 않고, 아이들을 보다 나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 하며, 제이콥을 너무 사랑해서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에요. 그런 것들을 연기하면서 더 많이 느낀 것 같아요.
-‘미나리’는 가족 간의 갈등과 봉합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어요. 연기에 몰입하기 위해 특별히 떠올렸던 경험들이 있나요.
아이 앞에서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는 어릴 때 아빠와 싸우는 엄마의 표정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꾹 참던 입매, 눈빛들이 제 기억에 있더군요. 엄마도 어린 나이에 아이를 키우는 거잖아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니카의 엄마 ‘순자’를 보면서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이 있나요.
실제로 영화에서처럼 저도 할머니에게 화투를 배웠어요. 할머니는 제게 음식을 잘 해주셨는데, 식혜든 삼계탕이든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은 모두 차려주셨어요. 음식을 차려주시고는 얼굴이 반쪽이 됐다고 슬퍼하시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를 자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 엔딩에서 순자에게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희 할머니는 극중 순자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셨지만 할머니를 추억하게 돼서 좋았고, 더 보고 싶어졌어요.
-예산이 빠듯해서 배우들이 숙소를 함께 쓰고 촬영도 6주 정도에 마쳤다고 들었어요.
에어비앤비로 집을 구해서 다 같이 지냈는데, 배우와 스태프 외에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와서 도와줬어요. 각자 호텔에서 지냈더라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드는 동안 숙소는 매일 다 같이 모여 편하게 이야기 하고, 식사를 함께 하는 아지트 같은 공간이 됐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두 함께 밥 먹는 시간이에요. 그때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과 모여서 다시 한 번 다 같이 식사하고 싶어요.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고 그립네요.
-윤여정 씨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너무 좋았어요. 윤여정 선생님은 익히 알려져 있듯 유머감각이 뛰어나시고 재치도 있고 매력이 넘치는 분이에요. 선생님의 유머가 현장에서 좋은 에너지이고, 필요하다는 걸 배웠어요. 그러면서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알게 됐죠. 또 하나 선생님을 통해 용기를 배웠어요. 나이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모르는 사람과의 작업도 전혀 걱정 없이 해내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원래 걱정이 많은 편이거든요. 작품을 촬영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륙했을 때부터 걱정을 했을 정도에요. 저와 반대로 선생님은 항상 당당하셨어요. 또 하나 솔직함도 배웠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좋으면 좋다고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직접 부른 OST ‘레인송’(Rain song)이 오스카 주제가상 1차 후보에 올랐어요.
감독님께서 노래를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을 때, 영화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음악을 담당한 에밀 모세리 감독님이 현장에서 OST의 멜로디를 들려주셨는데, 아름답더라고요.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불러주면 좋겠다고 요청하셔서 부담 갖지 않고 불렀어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오스카 1차 후보로 오르는 걸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영화 ‘뮬란’의 주제가를 부른)크리스티나 아길레나와의 경합’이라는 기사 제목까지 나와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제가 부른 OST는 잘 부른 노래가 아니라 영화 분위기에 맞는 곡이에요. 신기하면서 너무 쑥스럽네요.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작품을 선택할 때 기준은요.
그때그때 달라요. 캐릭터가 좋아서, 감독님과 통해서 등 이유가 다양하죠. ‘꼭 이래야만 돼’라고 고집하는 건 없지만 항상 중요시하는 건 감독님과의 소통이에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영화가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해요.
-영화 속 모니카는 낯선 땅에 이민 와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겪어요. 한예리 씨도 살면서 편견이나 벽에 부딪혀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나요.
요즘은 편견이나 차별 같은 것들이 많이 부서지고 깨지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무용을 하면서, 또 연기를 하면서 많은 편견에 부딪혀왔어요.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이 있지만 아마 살아가면서 계속 부딪히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다만 그게 벽이라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만약 벽이라고 느껴진다면 부수면서 잘 헤쳐 나갔으면 좋겠고요.
-앞으로 어떤 배우로 남고 싶은가요.
멋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윤여정 선생님처럼 오랫동안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고, 향기를 잃지 않는 배우였으면 해요. 욕심이지만 한 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사진제공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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