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 후 영국 명문 패션 스쿨 유학한 신예 디자이너
마일리 사이러스, 카디 비 등 세계적인 스타와 작업
꽃에서 영감을 얻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
우아하고 섹시한 블랙핑크와 작업하고 싶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으로 모든 상황이 급변한 2020년, 코로나19가 만들어낸 먹구름은 패션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글로벌 패션 하우스조차 생산 라인에서 옷 대신 마스크를 만들며 비상 상황에 힘을 보탰고, 늘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패션 위크는 줄줄이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대체됐다. 현실의 지난함 앞에서 패션 디자이너들이 한 땀 한 땀 이어 붙인 꿈과 환상의 세계는 잠시 그 힘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꽃은 피는 것처럼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움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반짝이는 상상력을 발휘한 신인 디자이너가 소셜 네트워크의 힘을 빌려 눈 깜짝할 사이에 패션계의 정중앙으로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졸업 작품전을 위해 만든 의상으로 인스타그램에서 내로라하는 패션 피플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즉시 유수의 패션 매거진 커버를 장식한 후, 세계적인 팝 스타 마일리 사이러스의 신곡 무대에 오르는 기염을 통했다면? 드라마 속 설정이라고 해도 ‘너무 과하다’고 할 법한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
그 주인공이 고등학교를 한국에서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센트럴 세인트 마틴(CSM, 존 갈리아노·알렉산더 맥퀸·스텔라 매카트니 같은 유수의 디자이너들이 거쳐간 런던의 명문 패션 스쿨)을 갓 졸업한 20대의 한국인이라는 점은 더더욱 놀랍다. 채 브랜드의 이름을 지을 새도 없이 유명해진 까닭에 인스타그램의 ID가 곧 브랜드가 되어버린, 본인이 지은 의상처럼 판타지에 가까운 스토리를 만들어낸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박소희(25) 씨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데뷔 과정이 마치 드라마 같아요. 상세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작품이 예상외로 화제가 되었어요. 수천 번 공유가 이루어지면서 패션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얻었죠. 그 게시물을 본 매거진 ‘Love’의 패션 디렉터에게 화보 촬영을 위한 의상 협찬 연락을 받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2주 후 출간된 매거진의 커버에, 모델 세 명이 모두 제가 만든 의상으로만 스타일링한 컷이 실려 있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해서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Love’ 매거진은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마치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거든요. 저 역시 CSM에서 보내는 첫날, 교수님이 강의를 일찍 끝내주시면서 “집에 가는 길에 ‘Love’ 매거진을 사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고요. 늘상 보고 동경하던 매거진의 표지에 제가 만든 의상이 심지어 커버로 실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랍니다.
이런 행운이 코로나19에서 비롯된 것이라고요.
제가 다닌 CSM의 졸업 발표회는 매년 패션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이 주목하는 이벤트예요. 패션계는 가능성 있는 신인 디자이너의 탄생을 기대하고, 학생들 역시 자신이 갈고닦은 역량을 선보이고 싶어하죠.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졸업 작품 발표회만 바라보면서 대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마지막 학기를 보낸 2020년 초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것이 일상과 달라진 시기였죠. 록다운(Lockdown)으로 인해 졸업 발표회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정말 막막한 기분이 들었어요. 긴 시간을 들여 어렵게 완성한 작품을 선보이지 못한다는 사실도 너무 아쉬웠고요. 그래서 준비한 드레스 다섯 벌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로 결정한 거죠. 이런 결과를 불러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요. 어찌 보면 졸업 발표회가 취소되면서 또 다른 기회가 생겼다고도 볼 수 있겠죠. 이후에 정말 다양한 매체와 셀레브리티로부터 협찬 요청을 받았거든요. ‘Love’ 매거진의 편집장인 케이티 그랜드 외 전체 편집부와 돈독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깊고요.
‘The girl in full bloom’이라는 컬렉션 타이틀처럼 의상이 활짝 핀 꽃송이를 연상시켜요.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나요.
보시다시피 저는 꽃에서 영감을 많이 얻어요.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패션에서 아주 흔하게 쓰이는 모티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이전에 누구도 하지 않은 저만의 방식으로 꽃을 재해석하고 싶었어요.
또 한 가지 제게 영감을 주는 요소는 바로 우리에게서 조금 멀어진 과거의 이미지들이에요. 저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콘셉트를 잡기 위해 다양한 리서치 작업을 하는데요. 1920년대부터 1950~60년대까지의 의상들을 보면 강한 매력을 느껴요. 클래식하면서 글래머러스한 과거의 이미지로부터 얻은 영감을 최대한 모던하게 풀어내고 싶어요. 그러면 시간을 초월한 타임리스 작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거든요.
누가 봐도 볼륨이 상당한 작품인데요. 작업 과정이 힘들지는 않나요.
‘The girl in full bloom’ 컬렉션 속 모든 드레스는 패브릭부터 자수, 마무리까지 제 손으로 완성했어요. 천을 염색하거나 일러스트를 프린트하는 작업이 가장 우선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제가 원하는 천을 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어요. 록다운으로 인해 숍이 문을 닫아서 직접 보고 구입할 수가 없었거든요. 궁여지책으로 영상통화를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과정이 몇 배는 어려웠고요. 그렇게 구한 천에 염색이나 일러스트 프린트로 제가 원하는 컬러를 입히는 과정이 진행되죠. 예를 들어 마일리 사이러스가 입어 화제가 된 피오니 드레스는 실버 컬러의 실크에 염색을 통해 금록색이 핑크로 번져나가는 그러데이션을 만들어냈어요. 의상에 포인트로 들어간 주얼리와 자수 역시 모두 제가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엮어냈고요.
사이즈가 큰 작품이다 보니 만드는 과정에서 공간 확보에도 애를 먹었죠. 학교 작업실을 이용할 수 없어서 커다란 드레스 다섯 벌을 제 아파트로 가져오고, 비좁은 공간에서 큰 천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작업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고요. 코로나19가 한창 확산되는 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귀국한 상황에서 혼자 남아 작업을 이어가는 것도 어려움이었어요. 하지만 학교에서 공부한 5년간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죠.
마일리 사이러스가 ‘MISS SOHEE’의 의상을 선택하면서 소희 씨도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됐는데, 그 과정도 궁금해요.
마일리 사이러스가 7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하기에 앞서 첫 번째 싱글로 내세운 ‘Midnight Sky’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 작품을 본 마일리 팀이 연락을 해왔어요. 컬렉션 전부를 협찬해달라고요. 저에게 처음으로 협찬을 의뢰한 셀레브리티가 마일리 사이러스라뇨! 꿈만 같았죠. 어릴 때 디즈니채널에서 방영된 마일리 사일러스 주연의 뮤지컬 시트콤 ‘한나 몬타나’를 좋아했던 터라, 그녀는 제게 롤 모델 같은 존재였거든요. 구상 작업이 시작되고 촬영까지 약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어요. 드레스가 볼륨 있고 아이코닉한 만큼, 임팩트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마일리 팀에서는 가장 적절한 상황과 타이밍을 원했죠. 결국 영국 BBC의 ‘그레이엄 노턴 쇼’(마돈나, 톰 행크스, 콜드플레이, 톰 크루즈, BTS 등 세계적 스타들이 출연한 인기 토크쇼)를 통해 ‘Midnight Sky’와 제 옷을 함께 선보였죠. 무대가 끝난 후 “당신과 함께 작업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눈물이 났어요.
곧바로 세계에서 가장 핫한 래퍼 카디 비가 2020년 올해의 여성 뮤지션으로 선정되면서 MISS SOHEE를 택했죠.
빌보드가 선정한 2020년의 여성 뮤지션으로 카디 비가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팬데믹으로 인해 레드카펫이 취소되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빌보드가 발행하는 매거진에서 독특하고 멋진 화보를 찍을 계획인데 제 컬렉션을 원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카디 비는 현재 엄청나게 관심을 받는 스타잖아요. 패션계에서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녀가 입으면 큰 이슈가 되니까 모두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죠. 심지어 화보에 함께 소개될 브랜드는 스키아파렐리, 발렌시아가, 아이리스 반 헤르펜 등 제가 대학 시절 책으로 보며 공부하던 브랜드였고요. 신인인 제 작품을 높게 평가해준 카디 비의 스타일리스트 콜린에게 정말 감사해요.
그녀가 입은 파란색 꽃 볼레로 드레스와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도 있어요. 사실 제니퍼 로페즈 팀에서도 그 드레스를 협찬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거든요.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응할 수 없었지만요. 올해에는 꼭 제니퍼 로페즈와도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라요.
디자이너 크리스찬 코완과 2021 S/S 뉴욕 패션 위크 컬렉션을 함께했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졸업 작품을 선보인 지 얼마 되지 않아 크리스찬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뉴욕 패션 위크를 위해 준비 중이던 컬렉션 콘셉트와 컬러 팔레트를 알려준 후 제가 원하는 대로 작업해보라고 말했죠. 이 컬래버레이션 과정에서 완성한 드레스 세 벌도 최근 화제가 됐어요. 벨라 하디드와 그웬 스테파니가 입었거든요.
이번 패션 위크가 처음은 아니라고 하던데요.
졸업 학년이 되기 전에 뉴욕의 마크 제이콥스에서 인턴십을 했어요. 런웨이 팀에서 2020 S/S 컬렉션을 위한 쇼피스 샘플로 작은 꽃들을 만들었어요. 마크가 제 작업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해서 쇼에 이용할 꽃 아이템을 모두 저에게 맡겼거든요. 그 덕에 인턴인 제가 마크 제이콥스의 아틀리에에 가서 나이 지긋한 테크니션들에게 꽃 만드는 저만의 방식을 가르치기도 했고요.
선망하던 디자이너의 아틀리에에서 함께 작업을 한 건 지금 생각해도 무척 환상적인 경험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 앉아 문제집을 덮어놓고 유튜브를 보면서 마크 제이콥스가 수석 디자이너로 지휘했던 루이비통 컬렉션을 정주행하고, 인터뷰 영상을 샅샅이 살피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르거든요.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마쳤다고 들었어요. 학창 시절도 궁금합니다.
맞아요. 평범하게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수학책에 그림을 그리곤 했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동화책 그림작가인 어머니(나애경 작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어머니의 작업실에는 몇 천 권의 동화책이 있었어요. 늘 그곳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죠. 하지만 자라면서 평면 위의 일러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들의 일러스트를 현실로 만들고 싶었죠. 그래서 용기를 내서 런던으로 날아간 거고요.
디자이너를 꿈꾸는 청소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아요.
Dreams come true. 정말 간절히 소망한다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실 처음 CSM에 왔을 때 엄청 놀랐거든요. 이미 파리의 명품 패션 하우스에서 수년간의 경험을 쌓은 친구, 세계에서 가장 어린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로 기네스북에 오른 친구, 할리우드에 인맥이 넓은 친구까지 정말 놀라운 스펙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저는 기죽지 않고 항상 제 자신을 믿었어요. 패션을 향한 열망과 용기를 잃지 않으면서요. 런던 유학, 뉴욕에서의 인턴십, 록다운 속에서 졸업 작품을 만드는 과정 모두 쉽지 않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기에 지금의 결과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디자이너로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상상 속 세계를 패션을 통해 현실화하고 싶어요. 매우 글래머러스하고 아름다운, 환상적인 세계를 말이에요. 제 작품으로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어요.
기쁘게도 벌써 제게 반응을 나타내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이메일과 메시지를 통해서 ‘록다운으로 너무 힘든 상황에서 당신의 작업을 보고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거나, ‘마치 사막의 달콤한 오아시스 같았다’는 글을 보면 정말 힘이 납니다.
전 세계적으로 K팝, K뷰티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K디자인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질문에 대답을 드리기에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지만, 한국의 미를 개성있게 표현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세계의 대중에게 어필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중들이 제 작품에 주목한 이유도 한국에서 자란 제가 한국적인 시각으로 오트 쿠튀르를 재해석한 점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고요. 색채나 선, 모양은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환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요.
K팝 스타와 배우들이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타고 글로벌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데요. 혹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스타가 있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블랙핑크의 빅 팬이에요! 너무 귀엽고 우아하면서 섹시한 블랙핑크가 MISS SOHEE랑 협업하는 날이 언젠가 오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오트 쿠튀르와 레디 투 웨어의 경계에 있는 데미 쿠튀르(Demi Couture, 고급 맞춤복과 고급 기성복의 중간) 브랜드로서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작품으로서의 오트 쿠튀르를 선보이는 동시에 일상생활에서도 웨어러블하게 즐길 수 있는 컬렉션도 론칭할 계획이거든요. 물론 데미 쿠튀르에서도 MISS SOHEE가 가진 글래머러스한 컬러는 유지한 채로요. 아 그리고, 지난 연말에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셀레브리티를 위해 커스텀 드레스를 만들었어요. MISSSOHEE와 천상의 조합이 될 것 같은 컬래버레이션이니 기대해주세요.
사진제공 박소희
마일리 사이러스, 카디 비 등 세계적인 스타와 작업
꽃에서 영감을 얻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
우아하고 섹시한 블랙핑크와 작업하고 싶어
박소희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졸업작품 컬렉션 ‘The girl in full bloom’의 한 작품. 팝 가수 마일리 사이러스가 이 드레스를 입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꽃은 피는 것처럼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움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반짝이는 상상력을 발휘한 신인 디자이너가 소셜 네트워크의 힘을 빌려 눈 깜짝할 사이에 패션계의 정중앙으로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졸업 작품전을 위해 만든 의상으로 인스타그램에서 내로라하는 패션 피플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즉시 유수의 패션 매거진 커버를 장식한 후, 세계적인 팝 스타 마일리 사이러스의 신곡 무대에 오르는 기염을 통했다면? 드라마 속 설정이라고 해도 ‘너무 과하다’고 할 법한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
그 주인공이 고등학교를 한국에서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센트럴 세인트 마틴(CSM, 존 갈리아노·알렉산더 맥퀸·스텔라 매카트니 같은 유수의 디자이너들이 거쳐간 런던의 명문 패션 스쿨)을 갓 졸업한 20대의 한국인이라는 점은 더더욱 놀랍다. 채 브랜드의 이름을 지을 새도 없이 유명해진 까닭에 인스타그램의 ID가 곧 브랜드가 되어버린, 본인이 지은 의상처럼 판타지에 가까운 스토리를 만들어낸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박소희(25) 씨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국의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 후 영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디자이너로 성장한 박소희 씨.
인스타그램에 올린 작품이 예상외로 화제가 되었어요. 수천 번 공유가 이루어지면서 패션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얻었죠. 그 게시물을 본 매거진 ‘Love’의 패션 디렉터에게 화보 촬영을 위한 의상 협찬 연락을 받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2주 후 출간된 매거진의 커버에, 모델 세 명이 모두 제가 만든 의상으로만 스타일링한 컷이 실려 있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해서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Love’ 매거진은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마치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거든요. 저 역시 CSM에서 보내는 첫날, 교수님이 강의를 일찍 끝내주시면서 “집에 가는 길에 ‘Love’ 매거진을 사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고요. 늘상 보고 동경하던 매거진의 표지에 제가 만든 의상이 심지어 커버로 실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랍니다.
이런 행운이 코로나19에서 비롯된 것이라고요.
제가 다닌 CSM의 졸업 발표회는 매년 패션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이 주목하는 이벤트예요. 패션계는 가능성 있는 신인 디자이너의 탄생을 기대하고, 학생들 역시 자신이 갈고닦은 역량을 선보이고 싶어하죠.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졸업 작품 발표회만 바라보면서 대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마지막 학기를 보낸 2020년 초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것이 일상과 달라진 시기였죠. 록다운(Lockdown)으로 인해 졸업 발표회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정말 막막한 기분이 들었어요. 긴 시간을 들여 어렵게 완성한 작품을 선보이지 못한다는 사실도 너무 아쉬웠고요. 그래서 준비한 드레스 다섯 벌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로 결정한 거죠. 이런 결과를 불러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요. 어찌 보면 졸업 발표회가 취소되면서 또 다른 기회가 생겼다고도 볼 수 있겠죠. 이후에 정말 다양한 매체와 셀레브리티로부터 협찬 요청을 받았거든요. ‘Love’ 매거진의 편집장인 케이티 그랜드 외 전체 편집부와 돈독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깊고요.
박소희 씨는 주로 꽃에서 영감을 얻는다.
보시다시피 저는 꽃에서 영감을 많이 얻어요.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패션에서 아주 흔하게 쓰이는 모티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이전에 누구도 하지 않은 저만의 방식으로 꽃을 재해석하고 싶었어요.
또 한 가지 제게 영감을 주는 요소는 바로 우리에게서 조금 멀어진 과거의 이미지들이에요. 저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콘셉트를 잡기 위해 다양한 리서치 작업을 하는데요. 1920년대부터 1950~60년대까지의 의상들을 보면 강한 매력을 느껴요. 클래식하면서 글래머러스한 과거의 이미지로부터 얻은 영감을 최대한 모던하게 풀어내고 싶어요. 그러면 시간을 초월한 타임리스 작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거든요.
누가 봐도 볼륨이 상당한 작품인데요. 작업 과정이 힘들지는 않나요.
‘The girl in full bloom’ 컬렉션 속 모든 드레스는 패브릭부터 자수, 마무리까지 제 손으로 완성했어요. 천을 염색하거나 일러스트를 프린트하는 작업이 가장 우선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제가 원하는 천을 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어요. 록다운으로 인해 숍이 문을 닫아서 직접 보고 구입할 수가 없었거든요. 궁여지책으로 영상통화를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과정이 몇 배는 어려웠고요. 그렇게 구한 천에 염색이나 일러스트 프린트로 제가 원하는 컬러를 입히는 과정이 진행되죠. 예를 들어 마일리 사이러스가 입어 화제가 된 피오니 드레스는 실버 컬러의 실크에 염색을 통해 금록색이 핑크로 번져나가는 그러데이션을 만들어냈어요. 의상에 포인트로 들어간 주얼리와 자수 역시 모두 제가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엮어냈고요.
사이즈가 큰 작품이다 보니 만드는 과정에서 공간 확보에도 애를 먹었죠. 학교 작업실을 이용할 수 없어서 커다란 드레스 다섯 벌을 제 아파트로 가져오고, 비좁은 공간에서 큰 천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작업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고요. 코로나19가 한창 확산되는 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귀국한 상황에서 혼자 남아 작업을 이어가는 것도 어려움이었어요. 하지만 학교에서 공부한 5년간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죠.
마일리 사이러스가 ‘MISS SOHEE’의 의상을 선택하면서 소희 씨도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됐는데, 그 과정도 궁금해요.
마일리 사이러스가 7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하기에 앞서 첫 번째 싱글로 내세운 ‘Midnight Sky’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 작품을 본 마일리 팀이 연락을 해왔어요. 컬렉션 전부를 협찬해달라고요. 저에게 처음으로 협찬을 의뢰한 셀레브리티가 마일리 사이러스라뇨! 꿈만 같았죠. 어릴 때 디즈니채널에서 방영된 마일리 사일러스 주연의 뮤지컬 시트콤 ‘한나 몬타나’를 좋아했던 터라, 그녀는 제게 롤 모델 같은 존재였거든요. 구상 작업이 시작되고 촬영까지 약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어요. 드레스가 볼륨 있고 아이코닉한 만큼, 임팩트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마일리 팀에서는 가장 적절한 상황과 타이밍을 원했죠. 결국 영국 BBC의 ‘그레이엄 노턴 쇼’(마돈나, 톰 행크스, 콜드플레이, 톰 크루즈, BTS 등 세계적 스타들이 출연한 인기 토크쇼)를 통해 ‘Midnight Sky’와 제 옷을 함께 선보였죠. 무대가 끝난 후 “당신과 함께 작업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눈물이 났어요.
빌보드 매거진의 표지 모델 카디 비의 헤어피스와 드레스도 담당했다.
빌보드가 선정한 2020년의 여성 뮤지션으로 카디 비가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팬데믹으로 인해 레드카펫이 취소되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빌보드가 발행하는 매거진에서 독특하고 멋진 화보를 찍을 계획인데 제 컬렉션을 원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카디 비는 현재 엄청나게 관심을 받는 스타잖아요. 패션계에서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녀가 입으면 큰 이슈가 되니까 모두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죠. 심지어 화보에 함께 소개될 브랜드는 스키아파렐리, 발렌시아가, 아이리스 반 헤르펜 등 제가 대학 시절 책으로 보며 공부하던 브랜드였고요. 신인인 제 작품을 높게 평가해준 카디 비의 스타일리스트 콜린에게 정말 감사해요.
그녀가 입은 파란색 꽃 볼레로 드레스와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도 있어요. 사실 제니퍼 로페즈 팀에서도 그 드레스를 협찬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거든요.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응할 수 없었지만요. 올해에는 꼭 제니퍼 로페즈와도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라요.
디자이너 크리스찬 코완과 2021 S/S 뉴욕 패션 위크 컬렉션을 함께했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졸업 작품을 선보인 지 얼마 되지 않아 크리스찬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뉴욕 패션 위크를 위해 준비 중이던 컬렉션 콘셉트와 컬러 팔레트를 알려준 후 제가 원하는 대로 작업해보라고 말했죠. 이 컬래버레이션 과정에서 완성한 드레스 세 벌도 최근 화제가 됐어요. 벨라 하디드와 그웬 스테파니가 입었거든요.
이번 패션 위크가 처음은 아니라고 하던데요.
졸업 학년이 되기 전에 뉴욕의 마크 제이콥스에서 인턴십을 했어요. 런웨이 팀에서 2020 S/S 컬렉션을 위한 쇼피스 샘플로 작은 꽃들을 만들었어요. 마크가 제 작업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해서 쇼에 이용할 꽃 아이템을 모두 저에게 맡겼거든요. 그 덕에 인턴인 제가 마크 제이콥스의 아틀리에에 가서 나이 지긋한 테크니션들에게 꽃 만드는 저만의 방식을 가르치기도 했고요.
선망하던 디자이너의 아틀리에에서 함께 작업을 한 건 지금 생각해도 무척 환상적인 경험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 앉아 문제집을 덮어놓고 유튜브를 보면서 마크 제이콥스가 수석 디자이너로 지휘했던 루이비통 컬렉션을 정주행하고, 인터뷰 영상을 샅샅이 살피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르거든요.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마쳤다고 들었어요. 학창 시절도 궁금합니다.
맞아요. 평범하게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수학책에 그림을 그리곤 했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동화책 그림작가인 어머니(나애경 작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어머니의 작업실에는 몇 천 권의 동화책이 있었어요. 늘 그곳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상상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죠. 하지만 자라면서 평면 위의 일러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들의 일러스트를 현실로 만들고 싶었죠. 그래서 용기를 내서 런던으로 날아간 거고요.
디자이너를 꿈꾸는 청소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아요.
Dreams come true. 정말 간절히 소망한다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실 처음 CSM에 왔을 때 엄청 놀랐거든요. 이미 파리의 명품 패션 하우스에서 수년간의 경험을 쌓은 친구, 세계에서 가장 어린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로 기네스북에 오른 친구, 할리우드에 인맥이 넓은 친구까지 정말 놀라운 스펙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저는 기죽지 않고 항상 제 자신을 믿었어요. 패션을 향한 열망과 용기를 잃지 않으면서요. 런던 유학, 뉴욕에서의 인턴십, 록다운 속에서 졸업 작품을 만드는 과정 모두 쉽지 않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기에 지금의 결과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디자이너로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상상 속 세계를 패션을 통해 현실화하고 싶어요. 매우 글래머러스하고 아름다운, 환상적인 세계를 말이에요. 제 작품으로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어요.
기쁘게도 벌써 제게 반응을 나타내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이메일과 메시지를 통해서 ‘록다운으로 너무 힘든 상황에서 당신의 작업을 보고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거나, ‘마치 사막의 달콤한 오아시스 같았다’는 글을 보면 정말 힘이 납니다.
전 세계적으로 K팝, K뷰티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K디자인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질문에 대답을 드리기에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지만, 한국의 미를 개성있게 표현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세계의 대중에게 어필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중들이 제 작품에 주목한 이유도 한국에서 자란 제가 한국적인 시각으로 오트 쿠튀르를 재해석한 점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고요. 색채나 선, 모양은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환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요.
K팝 스타와 배우들이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타고 글로벌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데요. 혹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스타가 있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블랙핑크의 빅 팬이에요! 너무 귀엽고 우아하면서 섹시한 블랙핑크가 MISS SOHEE랑 협업하는 날이 언젠가 오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오트 쿠튀르와 레디 투 웨어의 경계에 있는 데미 쿠튀르(Demi Couture, 고급 맞춤복과 고급 기성복의 중간) 브랜드로서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작품으로서의 오트 쿠튀르를 선보이는 동시에 일상생활에서도 웨어러블하게 즐길 수 있는 컬렉션도 론칭할 계획이거든요. 물론 데미 쿠튀르에서도 MISS SOHEE가 가진 글래머러스한 컬러는 유지한 채로요. 아 그리고, 지난 연말에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셀레브리티를 위해 커스텀 드레스를 만들었어요. MISSSOHEE와 천상의 조합이 될 것 같은 컬래버레이션이니 기대해주세요.
사진제공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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