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배경으로 하는 1989년 작 애니메이션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등장한다. 그 후 30여 년, 자동차는 여전히 땅 위를 달린다. 대신 AI가 수학을 가르치고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업무를 본다. 코로나19 같은 질병이 전 세계를 휩쓸 줄도 몰랐다.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은 쉽지 않아 더 매력적이다.
셀린박(35) 디자이너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미래적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Speculative Design)’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늘 내일을 궁금해한다. 그런 그조차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적잖이 당황했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작업한 사물 시리즈를 국내 처음 선보이는 이번 전시 시작일이 하필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인 때였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셀린박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오히려 “관람객 한명 한명에게 작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어 좋았다”며 웃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사물기호증에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 개념을 접목한 이번 전시는 여느 전시와는 좀 다른 면이 있다.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은 현재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주목받는 디자인 영역이에요.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은 미래를 확실한 미래(Probable Futures), 그럴듯한 미래(Plausible Futures), 가능한 미래(Possible Futures), 선호하는 미래(Preferable Futures) 총 4가지로 나눠 현재의 문제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가상하고 유토피아적이거나 디스토피아적으로 미래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각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단단한 리서치 기반을 쌓고 그걸 토대로 디자인을 하는 거예요. 이번 전시는 앞으로 일어나면 좋을 미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미래를 통해 사람들이 현재를 돌아보길 원하는, 교육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같은 대규모 뮤지엄에선 10여 년 전부터 다양한 전시를 통해 굉장히 주목받아온 개념인데 국내에선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어 아쉬웠어요.”
실제로 갤러리를 찾는 관람객 70% 정도가 젊은 예술학도일 정도로 국내에서는 실험적인 장르고,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사물기호증을 주제로 한 점도 색다르다. 사물기호증이란 움직이지 않는 특정한 물체에 초점을 둔 성도착증의 일종이다. 전시는 사물기호증을 주제로 셀린박 디자이너가 디렉팅한 단편 영화들과 각각의 오브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완성도도 높은 편.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현지에서 캐스팅해 제작하는 등 모든 과정이 그의 손을 거쳤다.
“프로젝트의 끝에는 항상 영화나 사진으로 결과물이 한눈에 보이도록 하는 게 목표예요. 전 영화 작업이 재미있더라고요. 2016년 영국 왕립예술대학 졸업 작품으로 ‘플라시보 장례식’이란 영화를 찍었는데 이 작품이 2018년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 초청받았어요. 그 이후 영화 작업에 더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지금도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아직 한참 부족하다며 부끄러워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는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촉망받는 디자이너다. 그는 이미 이번 전시와 같은 주제로 2018년 런던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과 2019년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에 초청되어 런던과 파리에서 전시를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오브제 매처(The Object Matcher)’가 특히 호평받고 있다. 관람객은 ‘사물기호증자들은 사물과의 결혼을 위해 사물과 사람의 성향이 상합한다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영화를 시청한 후 바로 옆에 전시된 오브제 매처 기계를 작동시킨다. 그러면 기계가 관람객 눈동자의 움직임, 손가락 지문 인식, 취향 데이터를 분석해 궁합이 가장 좋은 사물의 이름과 위치한 장소, 궁합의 퍼센트가 적힌 영수증을 프린트해주는 미래의 가상 시나리오로 작업했다.
“미신을 신봉하는 사회 구조를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담았어요. 마지막에 이 오브제를 경험하면 관람객들은 ‘아하!’ 하는 반응을 보여요. 영수증 결과가 자신과 맞다며 끼워 맞추는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때 제가 이것 또한 미신이고,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설명해드리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며 놀라워하세요(웃음).”
셀린박은 다작을 하는 작가는 아니다. 한 주제를 선택하면 리서치부터 전문가 협업까지 3년에 걸쳐 작업한다. ‘곰팡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은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곰팡이 흡입 백신 프로젝트’ 같은 경우, 카이스트 이강훈 박사와 협업해 흡입기를 사용해서 쓰는 곰팡이 백신까지 개발했다. 이런 게 예술의 영역인가 갸우뚱할 만큼 주제의 스펙트럼이 넓고 표현 방식도 다양하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셀린박 디자이너를 키운 7할은 홀로 견뎌낸 오랜 외국 생활이고 3할은 아버지 박영순 아이러브안과 대표원장이다. 셀린박은 14세 이후 프랑스, 캐나다, 미국, 영국에서 공부했다. 2010년 뉴욕 프랫미술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뉴욕에서 브랜드 로고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16년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디자인 인터랙션 석사 과정을 마쳤다. 셀린박갤러리가 있는 아이러브아트센터 관장을 맡아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시작한 게 2018년이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외국에서 홀로 지낸 셈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세계 지도를 벽에 걸어주시고, 어디든 가서 꿈을 펼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저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죠. 그렇게 유학생활을 시작했고, 뉴욕에서 만난 교수님과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디자인에 관해 토론을 하며 보낸 시간들이 제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때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당연한 디자이너의 의무다. 그런데 나만 할 수 있는 디자인과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세지는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고민 끝에 제가 가고 싶은 방향과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저는 삶의 모토가 ‘불가능은 없다’예요. 무모하지만 그렇기에 일궈내는 게 있어요.”
다음 프로젝트를 고민 중인 셀린박은 박테리아와 미래적 의학 시스템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해볼 계획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수술 영상을 많이 접해 의학 분야에 관심이 많다.
“한 분야의 전공을 공부했다고 그 분야에서만 일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것을 섭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가능성에 대한 가능성’ 전시는 7월 28일까지 셀린박갤러리에서 열린다. 이후에는 영국 부부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이너(오웬 웰스 & 박수미)의 전시가 마련될 예정.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갤러리지만 정작 셀린박의 다음 전시는 언제 열릴지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다방면에 호기심 많은 그의 이름이 또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기획 김명희 기자 사진 홍태식 디자인 최정미
셀린박(35) 디자이너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미래적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Speculative Design)’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늘 내일을 궁금해한다. 그런 그조차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적잖이 당황했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작업한 사물 시리즈를 국내 처음 선보이는 이번 전시 시작일이 하필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인 때였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셀린박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오히려 “관람객 한명 한명에게 작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어 좋았다”며 웃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사물기호증에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 개념을 접목한 이번 전시는 여느 전시와는 좀 다른 면이 있다.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은 현재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주목받는 디자인 영역이에요.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은 미래를 확실한 미래(Probable Futures), 그럴듯한 미래(Plausible Futures), 가능한 미래(Possible Futures), 선호하는 미래(Preferable Futures) 총 4가지로 나눠 현재의 문제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가상하고 유토피아적이거나 디스토피아적으로 미래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각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단단한 리서치 기반을 쌓고 그걸 토대로 디자인을 하는 거예요. 이번 전시는 앞으로 일어나면 좋을 미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미래를 통해 사람들이 현재를 돌아보길 원하는, 교육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같은 대규모 뮤지엄에선 10여 년 전부터 다양한 전시를 통해 굉장히 주목받아온 개념인데 국내에선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어 아쉬웠어요.”
실제로 갤러리를 찾는 관람객 70% 정도가 젊은 예술학도일 정도로 국내에서는 실험적인 장르고,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사물기호증을 주제로 한 점도 색다르다. 사물기호증이란 움직이지 않는 특정한 물체에 초점을 둔 성도착증의 일종이다. 전시는 사물기호증을 주제로 셀린박 디자이너가 디렉팅한 단편 영화들과 각각의 오브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완성도도 높은 편.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현지에서 캐스팅해 제작하는 등 모든 과정이 그의 손을 거쳤다.
“프로젝트의 끝에는 항상 영화나 사진으로 결과물이 한눈에 보이도록 하는 게 목표예요. 전 영화 작업이 재미있더라고요. 2016년 영국 왕립예술대학 졸업 작품으로 ‘플라시보 장례식’이란 영화를 찍었는데 이 작품이 2018년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 초청받았어요. 그 이후 영화 작업에 더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지금도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아직 한참 부족하다며 부끄러워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는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촉망받는 디자이너다. 그는 이미 이번 전시와 같은 주제로 2018년 런던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과 2019년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에 초청되어 런던과 파리에서 전시를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오브제 매처(The Object Matcher)’가 특히 호평받고 있다. 관람객은 ‘사물기호증자들은 사물과의 결혼을 위해 사물과 사람의 성향이 상합한다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영화를 시청한 후 바로 옆에 전시된 오브제 매처 기계를 작동시킨다. 그러면 기계가 관람객 눈동자의 움직임, 손가락 지문 인식, 취향 데이터를 분석해 궁합이 가장 좋은 사물의 이름과 위치한 장소, 궁합의 퍼센트가 적힌 영수증을 프린트해주는 미래의 가상 시나리오로 작업했다.
“미신을 신봉하는 사회 구조를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담았어요. 마지막에 이 오브제를 경험하면 관람객들은 ‘아하!’ 하는 반응을 보여요. 영수증 결과가 자신과 맞다며 끼워 맞추는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때 제가 이것 또한 미신이고,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설명해드리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며 놀라워하세요(웃음).”
1 ‘오브제 결혼식’, 3년 사귄 풍선과 결혼하려는 여자가 사물기호증 결혼 호환성 테스트를 받는다는 내용의 영상. 2 ‘오브제 시그널’, 미래 사람들이 무언가와 소통하기 위해 어떤 기구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그려낸 단편 영화.
이렇게 다재다능한 셀린박 디자이너를 키운 7할은 홀로 견뎌낸 오랜 외국 생활이고 3할은 아버지 박영순 아이러브안과 대표원장이다. 셀린박은 14세 이후 프랑스, 캐나다, 미국, 영국에서 공부했다. 2010년 뉴욕 프랫미술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뉴욕에서 브랜드 로고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16년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디자인 인터랙션 석사 과정을 마쳤다. 셀린박갤러리가 있는 아이러브아트센터 관장을 맡아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시작한 게 2018년이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외국에서 홀로 지낸 셈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세계 지도를 벽에 걸어주시고, 어디든 가서 꿈을 펼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저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죠. 그렇게 유학생활을 시작했고, 뉴욕에서 만난 교수님과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디자인에 관해 토론을 하며 보낸 시간들이 제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때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당연한 디자이너의 의무다. 그런데 나만 할 수 있는 디자인과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세지는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고민 끝에 제가 가고 싶은 방향과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저는 삶의 모토가 ‘불가능은 없다’예요. 무모하지만 그렇기에 일궈내는 게 있어요.”
다음 프로젝트를 고민 중인 셀린박은 박테리아와 미래적 의학 시스템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해볼 계획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수술 영상을 많이 접해 의학 분야에 관심이 많다.
“한 분야의 전공을 공부했다고 그 분야에서만 일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것을 섭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가능성에 대한 가능성’ 전시는 7월 28일까지 셀린박갤러리에서 열린다. 이후에는 영국 부부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이너(오웬 웰스 & 박수미)의 전시가 마련될 예정.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갤러리지만 정작 셀린박의 다음 전시는 언제 열릴지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다방면에 호기심 많은 그의 이름이 또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기획 김명희 기자 사진 홍태식 디자인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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