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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star

제2의 전성기, 늦깎이 예능돌 허재

EDITOR 김지영 기자

2019. 09. 30

요즘 가장 핫한 운동선수 출신 예능돌로 허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첫손에 꼽힌다. 농구 코트 위에서의 불도저 같은 성격 뒤에 감춰진 허당기와 재치 있는 말솜씨로 반전 매력을 선사하고 있는 그를 ‘여성동아’가 단독으로 만났다.

‘농구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기량과 화려한 플레이로 한국 프로농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허재(54) 전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방송가의 ‘예능돌’로 떠올랐다. 6월 중순 방송을 시작한 jtbc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에서 왕년의 저돌적인 모습과는 다른 반전 매력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이만기·양준혁·이봉주·여홍철 등 스포츠 각 분야의 레전드들과 축구팀을 꾸린 그는 불타는 승부욕이 무색하게도 축구장 안에만 들어서면 맥을 못 추는 모습으로 신선한 웃음과 재미를 유발한다. 경기장 안에서 3분도 버티지 못하는 그의 저질 체력에 정형돈은 ‘3분 카레’라는 애칭을 선사하기도 했다. 

8월 25일 방송된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이하 ‘미우새’)도 많은 화제를 뿌렸다. 이 프로그램의 스페셜 MC로 출연한 그가 서장훈, 현주엽 등 농구 코트를 함께 누빈 후배들과 과거를 추억하며 입을 열 때마다 폭소를 자아내서다. 재치 있는 입담과 카리스마로 인기를 모으는 예능계의 ‘라이징 스타’이자 훈남 농구선수 허웅(26·원주 DB 프로미)과 허훈(24·부산 KT 소닉붐)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에게 그동안 쌓인 궁금증을 던졌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2009년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이후 10년 만이에요. ‘뭉쳐야 찬다’에 출연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선수 시절에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방송국에서도 그걸 알고 섭외를 아예 안 했고요.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나간 건 당시 제가 KBL(한국프로농구연맹) 소속이었고,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스타급 인사들 중 농구선수는 없었다기에 농구의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되고자 출연한 거예요. 그리고 ‘뭉쳐야 찬다’ 출연 제의도 처음에는 고사했어요. 농구 부흥을 위한 거면 두말없이 출연했을 텐데 축구를 한다니 내키지 않았어요. 많은 생각 끝에 방송 제작진과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종목별 레전드가 오랜만에 모여 팀플레이를 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에서 국가대표 선수들과 합숙하던 옛 생각도 나고 그래서 출연을 결정했죠. 

불같은 성격인 줄만 알았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반전 매력을 발견했다는 반응이 많아요. 

농구 코트에서는 승패가 갈리니 기분도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해요. 이기면 좋지만 지면 속상하고 우리 편에 불리하게 판정한 것은 아닌가 싶어 화가 나기도 했고요. 물론 심판은 공정하게 판정했겠죠. 불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원래 잘 웃는 편이에요. ‘뭉쳐야 찬다’에서는 제게 생소한 분야인 축구를 하다 보니 모르는 게 많아 허당 짓을 하게 돼요.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이 ‘귀엽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각 분야의 레전드들과 함께 축구를 배우는 과정도 재미있어요. ‘뭉쳐야 찬다’ 식구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최근 얻은 ‘3분 카레’라는 애칭은 마음에 드세요. 

반박을 못 하겠어요. 사실이거든요. 실은 3분도 많이 쳐준 거예요. 어떤 날은 1분 뛰고 나온 적도 있거든요. 하하하. 



국내외를 통틀어 최고로 치는 농구선수는 누군가요. 

예전에는 마이클 조던이었고 지금은 스테판 커리요. 신장이 작지만 슛이나 재간이 좋은 선수예요. NBA에서도 나오기 힘든 슈터죠. 

한창 현역 선수로 뛸 때 라이벌로 생각한 선수는요. 

어느 팀의 특정 선수를 라이벌로 여기진 않았어요. 매 경기마다 저를 마크하는 수비수를 라이벌로 생각했어요. 

‘농구 천재’로 불릴 만큼 뛰어난 기량은 천부적인 재능인가요, 아니면 노력의 결실인가요. 

보통 팬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저의 화려한 플레이만 봐요. 제가 술을 좋아하는데도 화려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건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플레이를 선보이기 위해 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릴 때부터 쉼 없는 연습을 통해 기량을 쌓았어요. 타고난 부분은 40% 정도고, 나머지 60%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봐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농구 하나만 했어요. 농구 감독으로 지낸 시간까지 합치면 40년 넘게 농구와 함께한 거예요.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때는 3백65일을 운동만 했어요. 쉬는 날 거의 없이 연습을 반복했어요. 슛 하나를 천 개까지 쏠 수 있게끔 연습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기에 남들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했죠. 

반복되는 연습이 지겹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눈만 뜨면 농구를 하는데 왜 지겨울 때가 없었겠어요. 공부도 마찬가지죠. 공부 하나만 파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잖아요. 그 과정을 견뎌낸 데는 부모님의 도움이 커요. 사춘기에 비뚤어질 수도 있는데 부모님이 저를 많이 다잡아주신 덕분에 초심을 잃지 않고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죠. 

보약으로 뱀을 드셨다고 들었어요. 

어릴 땐 운동선수치고 약골이었어요. 너무 호리호리해서 부모님이 뱀을 먹이셨어요. 그 덕분에 체격이 좋아졌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어요. 하지만 이 방법이 누구에게나 효과적이라고 생각진 않아요. 아무리 좋은 보약도 자기 체질에 맞아야 효과가 나요. 

두 아들을 모두 훌륭한 농구선수로 키워낸 비결이 뭔가요.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 삶은 합숙과 시합의 연속이었어요. 국가대표로 발탁돼 태릉선수촌에서 지내다 외국에 나가 경기를 치르고 돌아오면 누워 있던 아이들이 몸을 뒤집고, 그다음에 오면 기어 다니고, 또 갔다 오면 걸어 다니고 그랬어요. 아이들의 성장기에 제가 아버지로서 한 역할은 경제적인 지원 정도지, 두 아들을 모두 농구선수로 키워낸 건 아내예요. 이건 오늘 인터뷰에서 처음 밝히는 건데 사실 저는 아이들이 다른 길로 갔으면 했어요. 운동선수로 한 길을 가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공부를 하면 반에서 20등을 하더라도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있는데 농구선수는 일인자를 목표로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제 딴엔 공부를 해서 본인의 적성에 맞는 전공을 선택했으면 했는데 첫째에 이어 둘째도 농구선수가 되고 싶어해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뒷바라지를 했어요. 

아이들에게 농구 스킬이나 노하우를 전수했을 법한데요.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쉬는 날을 이용해 슛할 때의 폼을 교정해준다든지 기본적인 스텝이나 볼 핸들링을 아주 간단하게 가르쳐줬어요. 제가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아이를 지도하는 감독이나 코치에게 배운 것과 헷갈릴 수 있거든요.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았을 때는 어떤 도움을 주셨는지요. 

저희 아이들은 사춘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운동을 했으니 운동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게 사춘기의 징후일 수 있는데 두 아이 모두 그런 말 없이 꾸준히 더 열심히 했어요. 특히 큰아이는 또래 친구들보다 2년 정도 늦게 농구를 시작해서 그만큼 더 많은 노력을 했어요. 지금도 허웅에 대한 평가는 노력하는 선수고요. 

두 아들과 소통을 잘하는 편인가요. 

제가 숙소에서 생활할 땐 아이들이 집에 있고, 제가 은퇴한 후에는 아이들이 프로팀에 소속돼 숙소에서 지내다 보니 네 식구가 다 모이기가 힘들어요. 아이들이 집에 오는 주말에 한 번 모이는 정도죠. 그때도 아이들은 자기 사생활이 있으니까 친구 만나러 나가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래도 집에 오면 큰아이나 작은아이나 같이 식사하러 가자고 해요. 가족끼리 외식할 때 잠깐 보는 거죠. 

평소 사랑 표현을 잘하는 남편인가요. 

잘 못해요. 웅이 엄마도 남자 같은 성격이라 그런 저에게 불평을 하지 않고요. 부부가 키스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부부 관계가 좋아지고, 직장에서 일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통계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나이 정도 되면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민망해요. 하하하. 젊을 때도 사랑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해외에 다녀올 적마다 기념이 될 만한 선물을 꼬박꼬박 사다 줬죠. 근데 그것도 신혼 초에만 그러고 사다 주는 횟수가 자연스럽게 줄더라고요. 똑같은 걸 또 사다 주기가 미안해서요. 

1992년 갑자기 결혼 소식을 전해 많은 소녀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어요. 당시 인기가 대단했잖아요. 아내 이미수 씨와의 러브 스토리 좀 들려주세요. 

부산에서 지인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 아는 형이 아내를 불러 인사를 시켰는데 다음 날 파라다이스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또 만났어요. 아내를 데리고 기장 쪽으로 가서 회에 소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처음부터 호감이 없었으면 그러지 못했겠죠. 원래는 그날 저녁 비행기로 서울에 와야 했거든요. 다음 날 첫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왔는데 아내가 보고 싶더라고요. 당시는 ‘삐삐’도 없을 때여서 아내의 집으로 전화해 “부산에 갈 테니 마중 나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왔더군요. 그때부터 아내를 만나러 부산에 갔다가 다음 날 오는 생활을 반복하며 본격적인 연애를 했죠. 부산에 가면 주로 한국 콘도에서 묵었어요. 방이 여러 개여서 지인들을 부르기가 편했거든요. 그럼 웅이 엄마가 저를 먹이려고 집에서 음식을 챙겨 오곤 했어요. 그런 모습을 계속 보다 보니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속해 있던 구단의 감독에게 솔직하게 털어놨죠.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는데 부산에 산다. 내려가서 제 마음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요. 바로 부산으로 날아가 청혼하고 일사천리로 결혼식을 올렸죠. 

운동선수로서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든 지금까지 순탄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남모르는 좌절이나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선수 시절에는 이걸 또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쳤을 때가 슬럼프였던 것 같아요. 감독으로서는 3연패, 4연패를 할 때 슬럼프에 빠졌던 것 같고요. 그래도 슬럼프가 길게 가지는 않았어요. 시합에서 이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어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은 뭔가요. 

농구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가슴에 품고 있던 생각은 ‘어떻게든 이겨서 1위를 하자’였어요. 승부욕이 강한 거죠. 그러기 위해 선수로 뛸 때든, 감독으로 활동할 때든 늘 최선을 다했어요. 제가 솔선수범해야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 수 있고, 경기에 임할 때도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최근 FIBA(국제농구연맹)가 발표한 역대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시더라고요. 

지금까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유일하게 1승을 거둔 경기가 1994년 캐나다에서 치른 이집트전이에요. 당시 제가 혼자 62점을 올렸거든요. 그 기록은 절대 안 깨질 거예요. 스테판 커리처럼 기량이 뛰어난 미국 프로농구 선수가 40분을 풀로 뛴다면 그 기록을 충분히 깰 수 있죠. 근데 그 선수들은 풀타임을 안 뛰어요. 미국이나 상위 리그는 점수 차가 벌어지면 선수를 교체하거든요. 하위 리그에는 한 경기에 62점을 넣을 선수가 없고요. 

요즘은 농구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아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총체적인 난국이지만 무엇보다 스타플레이어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농구가 인기가 많을 때는 스타플레이어의 계보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는데 문경은 선수 이후 그 맥이 끊긴 느낌이에요. 농구를 부활시키려면 관중이 와서 구경하고 싶은 플레이를 펼치는 스타플레이어가 나와야 하고, 경기를 ‘익사이팅(exciting)’하게 이겨야 해요.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선수 시절에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할 거라고 했는데, 작년 9월 초 국가대표 감독을 그만두고 한발 물러나 있다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제가 잘하는 것을 하고 싶어요. 농구든, 공부든, 예능이든 상관없어요. 무엇이든 제게 맞는 일을 잘 선택해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되고 싶어요.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고 축복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 인생에 힘든 고비도 많았지만 제가 잘할 수 있는 농구를 선택한 덕분에 40년 동안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자부해요. 스포츠 스타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리면서요(웃음). 

‘제2의 허재’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지난 3월부터 제 이름을 건 농구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데, 초등부·중등부 아이들에게는 마음 편하게 즐겁게 하라고 해요. 이 시기에는 기본기를 익히는 것보다 농구에 대한 흥미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요. 요즘 아이들에게 부족한 인내심을 키우는 훈련도 놀이처럼 진행하고요. 농구를 제대로 하겠다는 각오가 선 아이들에게는 테크닉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요. 재능이 뛰어난 유망주를 전문적으로 키우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도 가동할 생각이고요. 제가 지도한 프로 선수들에게는 “프로답게 독하게 하라”고 강조해요. 대우를 받는 만큼 부단한 노력을 통해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은 프로 선수로서의 당연한 책무죠. 농구아카데미를 경기 고양시에 가장 먼저 오픈했는데 앞으로 전국 대도시로 확대해나갈 계획이에요. 제가 새롭게 시작한 이 일이 농구 저변 확대에 보탬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진 홍중식 기자 디자인 김영화
장소협찬 라까사호텔 서울 로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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