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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그러나 미치도록 슬펐던 화가 천경자

글 · 김종근 미술평론가 | 사진 · 김형우 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뉴시스 | 디자인 · 이지은

입력 2015.12.21 10:19:28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 화가 천경자 화백이 세상을 떠났다. 생전 그와 교류한 미술평론가 김종근 씨가 천재였으나 슬프고 미스터리한 삶을 살았던 천 화백의 인생과 작품 세계를 회고하는 글을 보내왔다.
찬란한, 그러나 미치도록 슬펐던 화가 천경자


1986년 중반 천경자(1924~2015) 화백은 점심을 하러 혹은 커피를 마시러 종종 내가 일하는 서울 압구정 현대백화점에 들렀다. 그곳 백화점 미술관 관장으로 있던 나는 선생님과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그림 이야기를 나누거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소박한 식사를 마친 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당시 천 화백은 60세를 넘긴 나이였지만 언제나 쑥스럽고 겸연쩍어했다. 이제 그런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럽기까지 하다.
천경자는 누구인가? 그와 아주 가까웠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자신의 시 ‘천경자를 노래함’에서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명동 시절이나/ 이십 년 넘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 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그의 언어를 시적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바람을 더욱 배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그렇다. 그는 원색처럼 화려하게 그러나 쓸쓸하게 인생과 예술을 짊어진 숙명적인 예술가의 모습으로 일생을 살았다. 또 그림에 관한 한 아주 단호하고 분명했다. 그러나 ‘좀 고약한 예술가’라는 시구는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가장 예술가다운 예술가’라고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김흥수, 권옥연, 김기창, 변종하 화백 등과 가까웠지만 천경자 화백만큼 자신의 작품을 끔찍이 사랑한 화가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장르가 달라 그러기도 하겠지만, 천 화백은 단 한 번도 그림을 돈으로 바꾸려 하지도 않았고 부자가 되길 꿈조차 꾸지 않았다.

찬란한, 그러나 미치도록 슬펐던 화가 천경자

1 원색처럼 화려하게, 그러나 쓸쓸하게 예술가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간 천경자 화백. 2 ‘황금의 비’, 종이에 채색, 34×46cm, 1982, 서울시립미술관.


내게 있어 천경자 화백과 그의 예술 세계를 돌아보는 것은 비장한 쓰림과 함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1991년 4월 어느 날 저녁 천경자 화백이 다짜고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자택 겸 화실인 압구정동 아파트로 급히 올 수 있냐고 했다. 나는 보았다. 거기서, 어쩌면 영원히 잊지 못할 안타까운 순간을. 천 화백은 “가짜 그림이 이렇게 내가 그린 진짜 그림으로 둔갑하여 다닌다”며 속칭 ‘미인도’라 불리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그림의 포스터를 앞에 두고 격노했다. 그때 본 그의 눈빛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고통을 안길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당시 그는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나? 나는 결코 이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또 (자신이 직접 그린) 다른 잡지 표지의 그림들을 모두 내보이면서 “나는 절대 머릿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는다.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다르다. 작품 사인과 표시 연도도 내 것이 아니다”라며 견딜 수 없어했다.  
당시 67세였던 천 화백은 더 이상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했고 기억력도 또렷했다. 그런 그가 세상과 화단을 향해 애타게 그 그림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흐느꼈고 울부짖었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자식을 남들이 당신 자식이라고 윽박지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며 그는 꽤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마시면서 괴로워했다. 하지만 미술계는 그런 그를 냉정하게 외면했고, 그림의 소장자와 출처가 권력가라서 작품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분위기로 몰아갔다. 당시 천경자 화백은  무수한 화랑에서 작품 달라는 주문을 받았지만 1년에 100호 하나, 10호 서너 점밖에 내놓지 않아 많은 화상들에게 섭섭함을 주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그림을 못 그리겠다”는 그의 하소연을 한 신문이 절필 선언으로 증폭시켰다. 이에 천 화백은 “붓을 들기 두렵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큰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그리고 얼마 전에서야 나는 천경자 화백이 그해, 1991년 6월 뉴욕에서 가까웠던 기자들에게 5장의 장문 편지와 그림엽서를 통하여 심경을 전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불행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남은 생명을 불태워 차원 높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각오가 담긴 글이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가 있던 나의 안부도 물으면서.
그러고는 지난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마지막 회고전을 가지며, 1998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 ‘생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환상여행’ ‘황혼의 통곡’ 등 대표작 57점과 드로잉 36점, 모두 93점을 자신을 섭섭하게 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닌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저작권 및 그림 도구들과 함께.
찬란한, 그러나 미치도록 슬펐던 화가 천경자

‘황혼의 통곡’, 종이에 채색, 96×129cm, 1995, 서울시립미술관.


머리에 꽃과 뱀을 얹은 건 한이 많아서

찬란한, 그러나 미치도록 슬펐던 화가 천경자

‘생태’, 종이에 채색, 51.5×87cm, 1951,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千鏡子). 본명이 천옥자인 그는 전남 고흥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엔 외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으며 그림에 특별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읽어주는 소설에 슬픈 대목이 나오면 무릎을 베고 있다가도 엉엉 소리 내어 울 정도로 감수성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일곱 살 때 그는 집이 가난해 소록도 나병원 간호부가 돼 동생들 공부를 뒷바라지하던 ‘순결한 눈망울, 뾰로통한 처녀 특유의 표정이 매혹적’인 ‘길례 언니’를 만난다. 이후 길례 언니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처럼 불리지만, 사실 이는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의 축제날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으로 그의 회상 속에서 아름답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영원한 처녀일 뿐이다.
광주로 유학해 광주공립여고(현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하라는 부친의 권유를 뿌리치고 꽃다운 나이 16세 때인 1940년 일본의 동경여자미술대학 유학길에 올랐다.
이미 거기에는 나중에 운보 김기창의 부인이 된 우향 박래현이 먼저 유학 와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거울 경’을 넣은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썼다. 당시 일본은 인상주의 이후 입체파와 야수파가 화단을 풍미하던 시기로, 그는 섬세하고 고운 채색의 여성적인 일본화 화풍에 매료됐다.
20세 되던 해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첫 남편을 만났다. 귀국선 표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도와주던 친절한 그 남자, 이철식 씨와 결혼했다. 첫딸과 첫아들을 얻었지만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50년에는 동생 옥희 씨가 폐병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의지할 곳을 찾다 두 번째 남편 김남중 씨를 만나 둘째 딸과 둘째 아들을 낳았지만 그는 가정이 있는, 여러 여자를 거느린 유부남이었다. 20대의 힘겨움, 언제나 손해 보는 사랑, 그리고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과 아끼던 동생의 죽음. 그러한 삶의 시련은 그를 더욱 그림 속으로 몰아갔다. 대표적인 작품이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다. 천경자의 자화상으로, 54세의 작가가 22세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린 작품이다. ‘내 슬픈 전설’이라는 말이 왠지 좋았다는 작가는 “꽃이니 뱀이니 머리에 얹은 것도 한이 많아서”라고 했다. 또한 여인의 머리를 둘러싼 뱀은 고통스럽던 시절 자신을 지켜주던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했다. 또 다른 작품은 뱀을 떼로 그린 ‘생태’다. 부산 피란시절 다방에서 전시할 때 선보였다고 하나 그림이 너무 세서 그 후론 전시하지 않았는데 소설가 공초 오상순 선생이 소문을 내서 더욱 유명해진 것이라는 소문이다.
‘생태’는 자신의 존재를 화단에 각인시킨 출세작인 동시에 뱀 작가라는 트레이드마크를 가져다준 작품이었다. 1951년에 그린 ‘생태’는 35마리의 독사가 한데 엉켜 우글거리는 그림으로 무려 스물다섯 번이나 광주의 뱀집으로 달려가 그린 것이다. 35라는 숫자는 사랑하는 뱀띠 남자(두 번째 남편)의 나이이기도 했다.
그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인생과 예술의 한 껍데기를 깨뜨렸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뱀을 참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 동생의 죽음, 불안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징그러워 몸서리치며 뱀집 앞에서 스케치를 했고, 그러면서 겨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뱀띠 남자가 바란다면 말도 타고 춤도 추고 공중그네라도 타고, 그가 하라는 대로 말을 잘 들어주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천 화백은 두 번째 남편을 사랑했다. “그 환상이 다리가 되어 먼 무지개 너머 세계로 사라지게 된다면 나도 같이 나비가 되고 싶었다”고도 했다.  
천경자 화백의 모든 그림은 그마다 독특한 사연이 있다. 또 수십 번 색을 올려야 완성될 정도로 발색이 힘들기도 했지만, 바닥에 펼쳐놓고 하는 작업이라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래서 무엇보다 그는 그림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생각했고, 피붙이 아들딸처럼 생각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림을 팔 때마다 꼭 자식을 팔아먹는 부모의 심정이라며 쉽게 넘겨주지 않으려 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어떤 경우는 그림을 팔았다가 “그 그림 때문에 밤새 한잠도 못 잤다”며 돈을 내놓고 다시 돌려주기를 부탁할 정도였고, 아파트 문 앞에 돈다발을 놓고 가는 사람이 있어도 그림을 주지 않았다. 한 점에 수천만원 하는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그가 돈 모으길 원했다면 그 누구보다도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마땅한 작업복이나 홈드레스 없이 후들후들한 셔츠 차림으로 그는 십수 년을 그렇게 작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윗목에 놓은 걸레가 얼어붙는 좁고 추운 셋방에서조차 화필을 놓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와 가끔 교류가 있었던 화상 L씨는 “우리나라 원로 화가 중에 자가용 없이 택시 타고 볼 일 보러 다니는 사람은 천 선생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성환, 화가 권옥연, 소설가 박경리 · 한말숙 등을 가까이했지만 그 외에 그는 자식들과 그림이라는, 고독과 고통으로 지은 집을 짊어지고 산 화가였다. 꿈과 사랑, 모정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환쟁이였다고 할까.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목숨도 없었을 겁니다. 화가가 되었기에 구원을 받은 거지요.”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화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고 진짜 동경했던 것은 연극배우였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콩나물처럼” 키가 컸던 탓에 학예회의 ‘리어왕’에 주연은커녕 극 중 문지기로 뽑혀 대사도 없이 몽둥이만 들고 연습했던 것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 그의 수필 속에 영화나 배우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오고, 영화 배경이 된 곳을 찾아가 그림을 그린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게 그는 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렸고, 그토록 목숨처럼 아꼈던 주옥같은 그림들을 “이 그림들은 내 것이 아니다”라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막상 기증하고 나니 내 인생을 모두 떼어준 것 같아 가슴이 텅 비고 서운하고 눈물이 많이 났다”고 술회했다.

“화가가 되었기에 구원받았다”

나는 지금도 (‘미인도’ 위작 논란이 일었던) 1991년 그때를 후회한다. 그렇게 일이 태풍처럼 커지기 전에 관계자들을 찾아서 정말 조용히 처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니 처리할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을. 그러나 그보다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천경자 화백이 그 어떤 진실도 가리지 못한 채 타향에서 운명을 달리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종일 혼자 있어도 내 그림에 나오는 모델들과 대화도 하고 사랑도 나누니까 하루가 지루하지 않다”고. 평소 그는 “그림 속 여자는 결국 그린 사람의 분신”이라고 말했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 속에는 모두 그가 숨겨져 있다.
‘자메이카의 여인 곡예사’에서는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곡예사의 모습과 여행지에서 만난 여인을 통해 자신의 꿈과 환상을 드러냈으며, ‘환상여행’ 속 턱을 괴고 길게 누운 인물과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여인 그리고 공중에서 힘없이 몸을 늘어뜨린 여인의 절망적인 모습에서는 고독과 쓸쓸함 등이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사인이 되어 있지 않은 미완성 대작 두 점이 있다. ‘환상여행’과 ‘황혼의 통곡’이 그것이다. 이국에서 보내던 말년의 슬픔과 비애, 그리고 고독이 화면 전체에서 물씬 묻어나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승과 저승이 나누어진, 전면의 길게 누운 여인과 엎드리거나 웅크린 채 한없이 고독한 여인들의 모습. 천경자 화백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황혼의 통곡’ 속에 녹여냈다. 미완의 두 작품은 결코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이것을 완성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배우 록 허드슨을 너무나 좋아했던 천경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유골이 되어 자신이 낳은 93점의 자식들을 둘러보고 정말 쓸쓸히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슬픔만 남긴 채…. 그의 유해가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려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온 것은 그나마 다행일까.


여성동아 2015년 12월 6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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