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작가 최은숙(49)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작가가 아닌 광명시청 시민 블로그 운영 · 홍보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씩씩함. 그는 작은 체구 빼곡히 열정으로 들어차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사람이었다. 지금쯤 그가 해외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그의 책 ‘하루의 발견’(조선앤북)이 반전처럼 여겨졌다. 온 우주를 유쾌하게 휩쓸고 다닐 것만 같았던 여자가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행복
쉰이 다 되어서야 찾은 행복.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저절로, 느닷없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저는 뿌리가 약한 사람이었어요. 기자로 일하던 5년, 인터넷 쇼핑몰을 하던 5년을 제외하면 한 직장에 1년 이상 붙어 있은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죠. 지금 돌이켜보면 여행을 많이 다닌 것도 불안해서였던 거 같아요. 어딘가 깊이 뿌리박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고 할까요.”
그의 삶에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7년 전, 기자 일을 그만두고 시작한 쇼핑몰이 생각보다 잘되지 않아 낙담하고 있을 무렵 남편이 회사에서 영국으로 해외 연수를 떠나게 되면서다. 엎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잠시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남편을 따라나섰다.
“그때 영국에서 사귄 친구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그러더라고요. ‘우리, 공부하자’고요. 그때 그 친구 나이가 마흔, 저는 마흔둘이었어요.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생각했죠.”
형편없는 영어 실력과 굳어버린 머리는 둘째 치고, 공부를 시작하면 남편은 그를 두고 홀로 귀국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그냥 웃고 넘겼어도 좋았을 그 얘기가 자꾸만 그를 간지럽혔다.
그런 그의 속내를 읽고 선뜻 지원사격을 해준 이는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한국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언니도 ‘넌 재능이 있는 사람이니 분명 잘해낼 것’이라며 응원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하고 모자라 보이는 순간,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을 때 곁에서 보내온 응원의 메시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는 입학에 필요한 영어 점수를 따기 위해 이웃에 사는 영국인 친구로부터 영어 과외까지 받아가며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부족한 점수를 메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필요한 점수가 딱 0.5점이 모자라더라고요. 그래서 각서를 쓰고 입학을 했어요. 각서는, 일단 입학 허가는 내주지만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할 경우 중도 탈락시키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어렵게 얻은 입학의 기회였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가족들, 무엇보다 마흔이 넘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스스로에게 실망을 안겨줄 순 없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에게는 부족함의 간극을 충분히 메꾸고도 남을 만큼의 절박함이 있었다.
그는 런던대학에서 전자커뮤니케이션과 출판을 공부하며 일간 신문 ‘가디언’의 디지털아카이브팀에서 실무 연수 과정을 거쳤다. 그의 저서 ‘세계 1등 인터넷 신문에게 배우는 블로그와 커뮤니티 경영 전략’은 ‘가디언’의 온라인 블로그 운영에 관한 자신의 석사 논문을 번역한 것으로, 현재 각 대학의 저널리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하고 있던 광명시청에서의 시민블로그 운영 사업은 ‘가디언’에서 배운 온라인 미디어 사업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실험 모델이었다. 지난해에는 청주대 광고홍보학과에서 겸임교수로 소셜 미디어 강의를 하며 학생들과 ‘휴먼스 오브 청주’라는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도 했다. ‘휴먼스 오브 청주’는 뉴욕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페이스북에 기록한 ‘휴먼스 오브 뉴욕’을 모티프로 한 일종의 소셜 네트워크 캠페인으로, 짧은 인터뷰를 통해 청주 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그들의 시선으로 청주의 곳곳을 바라보는 프로젝트다.
학생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일 외에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여정을 선물했다. 갓 스무 살 제자들의 반짝이는 눈빛, 싱그러운 웃음, 귀가 따갑도록 재잘거리는 수다는 3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했다.
“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서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를 떠올려보게 되었어요. 손등이 빨갛게 터지도록 구슬치기를 하던 어느 겨울날의 행복한 순간이 생각났어요. 내 내면의 어린아이는 루이비통을 원하지 않아요. 그저 내가 놀아주길 원할 뿐이죠.”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불러내는 작업은 그가 좋아하는 동화책 ‘고릴라’의 작가 앤소니 브라운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앤소니는 그림을 그릴 때 여섯 살 무렵의 자신을 불러낸다고 했다. ‘어린아이였던 나를 보살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최은숙이 작가로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하루의 발견’을 펴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
◇ ‘여성동아’ 독자에게 추천하는 ‘하루’ 리스트
최은숙의 책 ‘하루의 발견’에는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알알이 박혀 있다. 책을 완성해나가는 동안 그는 그간 소홀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일상의 행복들을 찾아내어 하나하나 텍스트로 주워 담았다. 책을 쓰는 동안 파란색 마우스 한 귀퉁이는 하얗게 색이 바랬고, 그의 단짝 노트북은 하루도 쉼 없이 열을 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책에 소개된 이야기는 그가 주워 담은, 사람들의 일상에 흩어져 있던 행복들이다.
■ 일러스트 · HAAKOO 제공
■ 디자인 · 최진이 기자
■ 장소협조 · 라카페갤러리(02-379-1975)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행복
쉰이 다 되어서야 찾은 행복.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저절로, 느닷없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저는 뿌리가 약한 사람이었어요. 기자로 일하던 5년, 인터넷 쇼핑몰을 하던 5년을 제외하면 한 직장에 1년 이상 붙어 있은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죠. 지금 돌이켜보면 여행을 많이 다닌 것도 불안해서였던 거 같아요. 어딘가 깊이 뿌리박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고 할까요.”
그의 삶에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7년 전, 기자 일을 그만두고 시작한 쇼핑몰이 생각보다 잘되지 않아 낙담하고 있을 무렵 남편이 회사에서 영국으로 해외 연수를 떠나게 되면서다. 엎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잠시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남편을 따라나섰다.
“그때 영국에서 사귄 친구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그러더라고요. ‘우리, 공부하자’고요. 그때 그 친구 나이가 마흔, 저는 마흔둘이었어요.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이라 생각했죠.”
형편없는 영어 실력과 굳어버린 머리는 둘째 치고, 공부를 시작하면 남편은 그를 두고 홀로 귀국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그냥 웃고 넘겼어도 좋았을 그 얘기가 자꾸만 그를 간지럽혔다.
그런 그의 속내를 읽고 선뜻 지원사격을 해준 이는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한국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언니도 ‘넌 재능이 있는 사람이니 분명 잘해낼 것’이라며 응원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하고 모자라 보이는 순간,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을 때 곁에서 보내온 응원의 메시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는 입학에 필요한 영어 점수를 따기 위해 이웃에 사는 영국인 친구로부터 영어 과외까지 받아가며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부족한 점수를 메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필요한 점수가 딱 0.5점이 모자라더라고요. 그래서 각서를 쓰고 입학을 했어요. 각서는, 일단 입학 허가는 내주지만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할 경우 중도 탈락시키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어렵게 얻은 입학의 기회였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가족들, 무엇보다 마흔이 넘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스스로에게 실망을 안겨줄 순 없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에게는 부족함의 간극을 충분히 메꾸고도 남을 만큼의 절박함이 있었다.
그는 런던대학에서 전자커뮤니케이션과 출판을 공부하며 일간 신문 ‘가디언’의 디지털아카이브팀에서 실무 연수 과정을 거쳤다. 그의 저서 ‘세계 1등 인터넷 신문에게 배우는 블로그와 커뮤니티 경영 전략’은 ‘가디언’의 온라인 블로그 운영에 관한 자신의 석사 논문을 번역한 것으로, 현재 각 대학의 저널리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하고 있던 광명시청에서의 시민블로그 운영 사업은 ‘가디언’에서 배운 온라인 미디어 사업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실험 모델이었다. 지난해에는 청주대 광고홍보학과에서 겸임교수로 소셜 미디어 강의를 하며 학생들과 ‘휴먼스 오브 청주’라는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도 했다. ‘휴먼스 오브 청주’는 뉴욕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페이스북에 기록한 ‘휴먼스 오브 뉴욕’을 모티프로 한 일종의 소셜 네트워크 캠페인으로, 짧은 인터뷰를 통해 청주 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그들의 시선으로 청주의 곳곳을 바라보는 프로젝트다.
학생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일 외에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여정을 선물했다. 갓 스무 살 제자들의 반짝이는 눈빛, 싱그러운 웃음, 귀가 따갑도록 재잘거리는 수다는 3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했다.
“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서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를 떠올려보게 되었어요. 손등이 빨갛게 터지도록 구슬치기를 하던 어느 겨울날의 행복한 순간이 생각났어요. 내 내면의 어린아이는 루이비통을 원하지 않아요. 그저 내가 놀아주길 원할 뿐이죠.”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불러내는 작업은 그가 좋아하는 동화책 ‘고릴라’의 작가 앤소니 브라운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앤소니는 그림을 그릴 때 여섯 살 무렵의 자신을 불러낸다고 했다. ‘어린아이였던 나를 보살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최은숙이 작가로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하루의 발견’을 펴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
◇ ‘여성동아’ 독자에게 추천하는 ‘하루’ 리스트
최은숙의 책 ‘하루의 발견’에는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알알이 박혀 있다. 책을 완성해나가는 동안 그는 그간 소홀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일상의 행복들을 찾아내어 하나하나 텍스트로 주워 담았다. 책을 쓰는 동안 파란색 마우스 한 귀퉁이는 하얗게 색이 바랬고, 그의 단짝 노트북은 하루도 쉼 없이 열을 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책에 소개된 이야기는 그가 주워 담은, 사람들의 일상에 흩어져 있던 행복들이다.
■ 일러스트 · HAAKOO 제공
■ 디자인 · 최진이 기자
■ 장소협조 · 라카페갤러리(02-379-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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