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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봄날의 캠퍼스에서

글 · 김명희 기자|사진 · 조영철 기자, 신세계 그룹 제공

입력 2015.05.19 09:59:00

1조원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자산가, 퇴직한 임직원에게 10년간 자녀 학자금을 지원하는 CEO, 경영자가 아니었더라면 피아니스트가 됐을 거라고 말하는 남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이번에는 청년들의 인문학 멘토로 나섰다.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학생들과 소통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심과 열정이 읽혔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봄날의 캠퍼스에서
“몇 시간 전에 도착해서 교정을 잠시 둘러봤습니다. 사무실에서 일만 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은데 대학 캠퍼스에 오니 신입생, 아니 신입생이라고 하기엔 좀 그러니 복학생으로 할게요. 어쨌든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간 기분입니다.”

정용진(47) 신세계 그룹 부회장은 객석을 가득 메운 1천여 명의 청중과 가벼운 농담으로 소통을 시작했다. 큰 키, 벌어진 어깨에서 풍기는 인상과 달리 마이크를 통해 전해지는 그의 음성은 낭랑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이날 신세계 그룹의 대학생 대상 인문학 콘서트인 ‘지식향연’의 강연자로 강단에 섰다.

정 부회장은 평소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그는 미드와 패션 잡지를 즐겨 보고 와인과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으며 피아노 연주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다. 미국 브라운대(경재학과)로 유학을 가기에 앞서 서울대 인문대에서 서양사학을 공부했고,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으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고 김태길 교수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꼽을 정도다. 지난해 연세대에서 열린 제1회 지식향연에서는 이 책을 인용해 행복의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여러분 덕분에 먹고살고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목련과 벚꽃이 만개한 4월의 늦은 오후, 서울 안암동 고려대 캠퍼스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식향연이 이름을 빌려왔을 플라톤의 ‘향연’에는 ‘인생이란 아름다움을 음미할 때 비로소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글이 등장한다. 정 부회장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연에 나선 건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 학점 관리, 아르바이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학생들이 일상을 잠시 멈추고, 이 좋은 계절을 즐겨도 보고,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 말이다. 그의 생각은 인재 채용에도 반영됐다. 신세계 그룹은 지난해 11월부터 스펙 중심의 평가 방식에서 벗어나 오디션 방식으로 인문학적 소양과 폭넓은 시각, 깊이 있는 통찰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하는 ‘드림 스테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채용 제도 개편의 결과 올해 대졸 신입사원의 경우 인문계열 전공자가 43%로, 상경계열 전공자 35%를 앞서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날 강연에서 정 부회장이 들고 나온 화두는 ‘스마트폰 시대의 위기’였다.



“스마트폰 시대에 가장 두려운 게 뭘까요? 바로 배터리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은 두렵지 않으세요? 전 패닉이 되는데…(웃음).”

장난스러운 말투에 객석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초반 미세하게 떨리던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여러분은 전화번호를 몇 개나 외우십니까? 저는 스마트폰 나오기 전 70~80개 정도는 외웠습니다. 암기력이 괜찮았거든요. 암기력으로 대학에 간 세대라…(웃음). 그런데 요즘에는 집 전화번호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예전에 살던 집 전화번호, 처음 썼던 휴대전화번호 그런 건 기억하는 걸 보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억력이 쇠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이라 부르는 사고력은 기억이라는 정보의 집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억의 퇴화는 생각하는 힘도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소위 디지털 치매라는 것은 스마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떨어지고 있는 기억력이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빨간 경고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가 스마트폰 시대의 또 하나의 문제로 지적한 것은 결정장애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선택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데, 이제는 누굴 만나고 무엇을 먹느냐 같은 사소한 것부터 인생을 바꿀 중요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스마트 기기가 제공하는 무차별적인 정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어떤 배달 앱에는 뭘 시켜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아무거나’ 라는 메뉴가 있대요. 그걸 주문하면 그날 가장 많이 팔린 메뉴가 배달되는데, 인기가 아주 많다고 하더군요. 전문가들은 결정장애의 원인을 정보의 과잉이라고 합니다. 저는 넘쳐나는 정보도 문제지만 그걸 선별, 판단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우리의 사고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걱정됩니다. 스마트폰이 전해주는 단편적인 사실들을 받아들일 뿐, 정보를 종합하고 문제의 원인과 전후 맥락, 본질을 파악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는 휴대전화부터 카메라, 전기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첨단 제품 품평을 내놓은 재계의 유명한 얼리어답터이자, 한때 누구보다 열심히 트위터를 한 인물이다. 이런 정 부회장의 위기 진단은 자기반성이자 문명에 대한 성찰이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봄날의 캠퍼스에서
“저도 SNS를 통해 많은 분들과 소통을 하고, 고객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려고 합니다. 아, 여기 계신 분들도 저희 고객이시죠? 감사합니다. 덕분에 먹고살고 있습니다. 아이들 유학도 보내고 쌍둥이도 잘 키우고 있습니다(웃음). SNS가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조금 더 신중을 기하려 합니다. 짤막한 주장만으로 전체적인 맥락을 살피는 게 쉽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여과 없이 전달되는 일이 생길까 봐 조심스럽거든요.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 이야기는 기술 자체에 대한 비난이나 시대를 과거로 돌리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돕는 스마트 시대의 축복을 이제 한번 제대로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저 역시 깊이 있게 성찰하고 사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봄날의 캠퍼스에서

정용진 부회장은 45분 남짓한 시간 동안 5백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흥미진진한 강연을 펼쳤다.

“읽고 쓰고 토론하라”

그는 스마트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방법 3가지를 제시했다. “둘은 너무 간단해서 성의가 없어 보이고, 셋이 넘어가면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요점 정리를 할 땐 셋이 가장 좋더라”는 농담도 곁들였다.

첫 번째는 ‘인문학적 지혜가 담긴 글을 읽는 것’이다.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가 시각장애를 딛고 변호사와 성악가의 꿈을 이룬 사례를 소개하며 여기에는 눈으로 하는 독서가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 하는 독서가 있었음을 피력했다. 인문학적 글을 읽기에 앞서 역사책부터 읽을 것을 조언하며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의 ‘병자호란’과 조선시대 북학파 지식인 이희경의 저서 ‘설수외사’ 등을 추천하기도 했다.

또한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인문학적 사고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하버드대의 혹독한 신입생 글쓰기 훈련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관점에 대해 성찰하고 타인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정 부회장은 주변 사람들과 토론하는 연습을 많이 할 것을 권했다. 토론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는 최고의 사고력 훈련으로,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서로의 견해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 사고가 정교해지고 논리가 더욱 풍성해진다고 설명했다.

정 부회장은 45분 남짓한 강연 동안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 독일 시인 릴케, 조선시대 정치인 최명길, 독일 저널리스트 올리버 예게스 등 다양한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인용, 강연을 더욱 풍부하고 재미있게 만들었다. 또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를 들려주며 청중을 잠시 사색에 빠지도록 안내했다. 기대했던 대목에서 박수가 나오지 않자 “여러분 이럴 땐 박수 한번 쳐주셔야 하는 겁니다”라며 호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정 부회장은 이날 강연을 준비하며 제스처, 화법 등에 관해 주변의 도움을 약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 해도 일목요연한 콘텐츠며 유쾌하고 매끄럽게 강연을 이끌어가는 애티튜드 등은 기대 이상이었다는 평이다.

정 부회장의 강연으로 서막을 연 ‘지식향연’은 제주대·건국대·경북대·강원대 등 전국 10개 대학에서 인문학 콘서트로 진행되며, 한명기 교수 · 고도원 작가 · 로봇 공학자 데니스 홍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연사로 참여한다. 인문학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캠프를 열고, 참가자 가운데 우수한 학생에게는 프랑스와 영국 일대를 돌아보는 그랜드 투어의 기회도 제공한다. 또한 국내에서 발간되지 않았거나 주목받지 못한 양질의 세계적인 인문학 서적도 발굴, 번역할 예정이다. 신세계 그룹은 지식향연을 인문학 중흥 프로젝트로 브랜드화해 매년 20억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다.

디자인 · 최진이 기자

여성동아 2015년 5월 6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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