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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기혁

시인의 무대에는 언어가 뿌리를 내린다

글·김지은 자유기고가 | 사진·홍중식 기자

2015. 03. 17

시인 기혁의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는 기승전결 없는 연극 무대처럼 난해하다. 그는 이 첫 번째 시집으로 지난해 말 제3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을 떠도는 날카로운 저항의 언어들, 그 실체를 만나기 위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기혁
기혁(36) 시인의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서점 책꽂이에 꽂힌 시집을 펼쳐들었을 때부터 엄습한 난감함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계속됐다. ‘이걸 베고 잘까?’. 시험 전날 도무지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는 내용들을 머릿속에 욱여넣기 위한 최후의 방법처럼 말이다. 책을 베개 삼아 자면 책 속의 내용들이 머리에 쏙쏙 들어와 박힌다는 ‘공부 못하는 학생’의 말도 안 되는 자기 최면 같은 것. 시집 한권이 이토록 사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면 그 시집을 낳은 시인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분열증이 뒤섞여 있을까.

반전이다

그의 시를 다시 한 번 훑어내리며 한숨을 몰아쉴 때쯤이었다. 훤칠한 키에 조금만 다듬으면 꽤나 반듯하게 생긴 연예인 ‘삘’도 날 것만 같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짝이는 큐빅이 여러 개 박힌 귀고리는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거꾸로 솟은 소나무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알아오던 시인들의 초췌한 고뇌쯤은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비주얼을 갖추고 나타나주길 기대하던 찰나였다. 이 정도의 난해함을 쏟아낼 멘탈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내심 판단하고 있던 탓이다. 그가 자신의 시를 “잘못 쓴 시”라고 너무 쉽게 인정해버리지 않았다면 정말 실망할 뻔했다.

“전통적 문법을 기준으로 보면 분명 잘못 쓴 시예요. 맥락이 없거든요. 평론가들 중에도 ‘평론가인 나조차 이해 못할 시를 어떻게 대중이 이해하느냐’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어찌 보면 엄청 심오한 듯하지만 사실 제 시 안에 심오한 뜻이 숨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단어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어려운 게 전혀 없어요. 제가 심오한 사람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제 시는 제 이야기를 쓴 게 아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건데, 특히 김경주 시인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파 시인들은 시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방식을 추구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읽어도 공통적으로 모르겠다는 건 반대로 누가 읽어도 공통적으로 알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의 설명은 이렇다.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택배 상자 안에도, 우주에도.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택배 상자 안 어둠에 대해서는 인지조차 하려 들지 않으면서 우주에는 엄청난 진리와 철학이 숨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대관절, 택배 상자 속 어둠과 우주의 어둠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작은 어둠도 우주와 같다는 그의 논리는 세상의 모든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과 심오한 평가를 받는 것들에 무리 없이 적용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심오하다고 평가받는 것들을 하찮게 여기고 하찮은 것들을 심오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로 그의 시를 들여다보면 무언가 알 듯 말 듯 심오해 보이던 시어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훅 편해진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첫 구절에 등장하는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는 실제로 그가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뿌리 부분이 허공을 향하게 된 나무를 보고 상상한 것이다. 나무가 허공에 뿌리를 내린다면, 허공은 곧 대지가 되고 반대로 대지는 잎이 자라는 공간이 된다.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기혁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기혁

2010년 ‘시인세계’ 신인상 수상에 이어 지난해 김수영문학상까지 거머쥐며 단숨에 문단의 별로 떠오른 기혁 시인은 학창 시절 시로 상을 받아본 적도, 시를 공부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읽자마자 감동이 밀려오고 감탄사가 터지는 시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시를 쓸 수는 없잖아요.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각자의 생각대로 읽고 해석하면 돼요. 오늘 읽었을 때와 한 달 후 읽었을 때, 몇 년 후 읽었을 때 전혀 다른 시처럼 느껴지는 것도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생각의 변화 등에 따라 시의 언어들이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상을 받았을까

시인의 이름을 가리고 진행된 김수영문학상 심사에서‘시집 전체를 통틀어 자신의 시 스타일을 끝까지 견지하고 한 편 한 편에서 긴장을 놓지 않았다’는 평을 얻은 기혁 시인. 그는 지난 2010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시인이 되기 전까지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통틀어 시로 상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게 스물아홉 되던 해쯤인 데다 딱히 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니 문단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4학년 2학기까지 연극이론을 전공했다. 그러다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 싶어 서사창작과로 전과했고, 그래놓고도 소설은 안 쓰고 시를 썼다. 뭔가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지내다보니 대학교를 10년이나 다니고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딱히 전공과 관계 있는 일들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영화사를 전전하거나 바텐터, DJ를 하며 학비를 벌었고 클럽 영업사장을 한 적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시인을 꿈꾼 것이 아니었으니 시에 대한 배움도 짧고 배움의 방식도 남들과 달랐어요. 시를 쓰고 싶어 무작정 독학을 한 거였으니까요. 상은 운이 좋아 받은 거지 제가 그만한 그릇이 돼서는 아니에요.”

극구 ‘운’이라 주장하지만, 기혁 시인은 지난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평론가로도 데뷔했다. 평론을 따로 공부한 것도, 누군가로부터 평론에 대한 조언을 들은 바도 없이 혼자서 써본 것이 덜컥 당선되는 바람에 본인조차 어안이 벙벙했다.

“평론이야말로 대단한 내공이 필요한 분야예요. 다른 사람의 글을 보려면 그만큼 내가 많이 알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공부가 많이 부족한 사람이거든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할 거예요. 저에겐 모자란 제 글에 상을 주신 분들께 당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일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시인이 그러하듯 상복은 터졌지만 생활은 여전히 곤궁하다. 그가 시를 쓰고 공부를 하고 평론을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아내 덕분이다. 아내와는 10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아내는 학창 시절부터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이다.

“상대가 나를 믿어준다는 게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더라고요. 솔직히 얼마나 재수 없어요. 남편이 돈도 안 벌어오지, 공부한다 글 쓴다 하면서 딱히 하는 일도 없지…. 그런데도 아내는 결혼도 해주고 아이도 키우고 생계까지 책임지고 있어요. 남들이 저에 대해 뭐라 해도 자기 남편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주는 게 너무 고마워요.”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 덕분에 그는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야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시를 쓰고 또 쓰는 것. 쓰지 않으면 병이 나고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증세는 시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인에게 타고난 재능 따위는 중요치 않다. 살아가려면 시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다른 걸 생각할 수도 없다. 이제야 겨우 여문 자리를 찾은 시인 기혁, 그도 스스로 그런 상태가 됐음을 깨달은 것이다.

디자인·최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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