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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화와 가족을 사랑하는 법’

영화계의 이단아 장진 감독

글·김지영 기자|사진·지호영 기자

입력 2014.11.14 11:32:00

연극무대에서 놀다 돌연 영화판으로 뛰어들어 메가폰을 잡은 지 어언 17년째. 한동안 거친 영화에 빠졌던 장진 감독이 그의 주특기인 코미디로 돌아왔다. 관객의 허를 찌르는 그 특유의 유머와 페이소스가 녹아든 영화 ‘우리는 형제입니다’는 단란한 가정의 두 아이 아빠 장진의 지나온 삶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내가 영화와 가족을 사랑하는 법’
주된 활동 영역인 영화와 연극뿐만 아니라 뮤지컬, TV쇼에 이어 최근엔 인천 아시안게임 개·폐막식 총연출까지 맡은 대한민국 대표 문화 크리에이터. 희곡을 쓰다 1995년 자신이 각본과 단역을 맡은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로 처음 얼굴을 알리고, 1998년 영화 ‘기막힌 사내들’로 입봉한 후에는 연출과 각본, 제작까지 아울러온 장진 감독(43)이 오랜만에 코미디 영화로 스크린을 노크한다.

10월 23일 개봉하는 ‘우리는 형제입니다’는 휴먼드라마를 그 특유의 기발한 유머 코드로 버무린 ‘장진스러운’ 작품이다. 어릴 적 고아원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목사 형(조진웅)과 홀로 한국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박수무당 동생(김성균)이 30년 만에 방송국에서 극적으로 상봉한 후 갑자기 사라진 치매 걸린 노모(김영애)를 전국 방방곡곡으로 찾아 헤매는 과정을 그린다. 이들 형제처럼 숨 가쁜 인생 여정 속에서 삶을 진정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을 찾은 장 감독을 만났다.

“처연함 속에서 웃음 유발하는 코미디가 딱 내 스타일”

▼ 데뷔 후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쓴 작품을 연출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우리 회사에서 7년간 안고 있던 작품이라 여러 감독이 연출을 희망했는데 그들이 원한 것은 좀 더 청춘스타 느낌이 나는 배우들이었다. 그런 친구들은 촬영 스케줄을 잡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몇몇은 무당 역이라고 난색을 표했다. 캐스팅에 난항을 겪다 결국 내가 감독으로 결정됐다.



▼ 배우를 직접 캐스팅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아시안게임이 시작되기 전 촬영을 끝내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누가 캐스팅됐는지에 따라 투자가 결정되기 때문에 배우 섭외에 공을 들였다. 내가 애초에 무당 동생 역에 염두에 뒀던 김성균부터 섭외했다. 김성균은 정석적으로 연기가 좋고 영화에서 연기를 시작했는데 올 초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로 인지도와 선호도가 높아져서 투자자들도 반응이 좋았다. 성균이가 조진웅을 끌어들였다. 난 진웅이랑 작품을 해본 적도 없고 그를 잘 몰랐다. 투자자가 강력히 요청하고 성균이와 호흡이 좋아서 캐스팅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만족스럽다. 연기를 굉장히 잘해서 배우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었다.

장 감독은 올 초부터 한 달 반 동안 배우 섭외를 마친 후 곧장 크랭크인해 한 달 반 만에 촬영을 끝냈다. 빡빡한 촬영 일정에 예산도 넉넉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차례 열린 시사회에서 영화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장 감독은 “시간이 열흘만 더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을 더 잘 살릴 수 있도록 편집을 손볼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내가 영화와 가족을 사랑하는 법’
▼ 주요 배역뿐 아니라 단역 캐스팅도 절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카메오가 많은 듯하다.

다 친분 있는 배우들이다. 카메오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이다. 다 리허설을 했고, 정식으로 출연을 의뢰해서 OK를 받았고, 후반 작업에도 참여했다. 한 번 나온다고, 비중이 작다고 카메오는 아닌 것 같다. 카메오라는 말이 출연에 대한 진정성을 떨어뜨리는 것 같다. 배우는 때에 따라 작은 역도 할 수 있다. 비중이 큰 역을 하던 사람이 작은 배역을 맡으면 카메오로 치부하는데 그건 지양하면 좋겠다.

▼ 연출할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뭔가.

변별적이냐를 먼저 본다. 기존에 했던 작품과 어느 정도 다를지가 무척 궁금해서다. 이 영화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지도 살핀다. 아직 영화로 돈을 얼마나 벌지는 선택의 기준이 아니다. 이번에는 전작들이 과격한 스타일이라 편한 코미디를 다시 하고 싶었는데 설정 자체가 재미있고 신선해서 끌렸다. 코미디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인간미가 강하게 느껴지는 휴먼드라마였다. 유치하지 않은 방법으로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기고 보는 이로 하여금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 장진 식 코미디는 왜 늘 색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나.

코미디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처연함이다. 그게 있어야 훌륭한 코미디라고 배웠고 그게 맞는 것 같다. 시종일관 에피소드로 웃기고 다소 과장해서 보여주는 건 그냥 웃긴 영화일 뿐이다. 코미디의 정확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선 처연함, 절실함, 품위가 필요하다. 거기서 유발되는 웃음이 코미디를 수준 있게 만든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영화가 코미디 부문에서 상을 받은 것도 외피는 코미디가 아닌 것 같지만, 죽을 병에 걸린 괴팍한 노인과 게이 등 등장인물들의 처연함이 빛을 발해서다. 내가 좋아하는 코미디는 그런 것이다. 한국적 코미디는 관습적으로 덜컥대다가 막판에 과잉 정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코미디는 결코 쉬운 장르가 아니다. 어려워서 해볼 만하고 울어도 즐겁고 따뜻해져서 좋다.

‘내가 영화와 가족을 사랑하는 법’

장진 감독은 서점에서 첫눈에 반한 아내와의 추억, 아빠의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큰아이를 떠올리며 연신 해맑게 웃었다.

“첫눈에 마음 뺏긴 아내는 내가 꿈꾸던 배우자상”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직접 각본을 담당한 영화가 많다. ‘웰컴 투 동막골’, ‘공공의 적1’, ‘바르게 살자’, ‘동감’, ‘묻지마 패밀리’는 그가 각본과 제작을 겸해서 대중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장진 식 유머가 빛을 발한 ‘굿모닝 프레지던트’ ‘킬러들의 수다’ ‘거룩한 계보’ ‘박수칠 때 떠나라’ 등은 각본과 연출을 겸한 대표작들이다. 스토리를 직접 만들며 과격하거나 실험적인 시도를 즐겨온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지 않은 이번 작품에서도 신선한 도전에 나섰다. 전작인 느와르 액션물 ‘하이힐’과 달리 세대를 뛰어넘어 다양한 계층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것.

“이번 영화는 관객이 웃고 즐기는 가운데 순간순간 훌쩍거리게 한다. 많은 이들이 그 지점에서 공감하는 것을 보면서 연출한 사람으로서 흐뭇했다.”

그가 거친 영화에서 다시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코미디로 회귀한 데는 그에게 안정감과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준 가족의 영향도 적지 않다. 그는 2007년 10세 연하의 교육전문가 차영은 씨와 결혼해 차인과 차윤, 2남을 뒀다. 우리 나이로 각각 7세, 5세라는 두 아이와 아내 얘기를 할 때마다 해맑게 웃는 장 감독은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 아내와 공통분모가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만났나.

그 친구(아내)가 대학 시절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처음 만났다. 그때 그 친구는 23세, 나는 33세였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동행한 우리 회사 PD를 시켜 아내에게 쪽지를 전해줬다. 그 뒤로 한 4년간은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끔 얼굴 보다가 아내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6개월 연애 끝에 결혼했다. 예전에는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결혼 3개월 전부터 오빠라고 하더라.

▼ 첫눈에 호감이 갈 만큼 남다른 느낌이었나.

그 친구는 대단한 미인이라기보다 남자들이 원하는 지적이면서도 청순한 매력이 있다. 처음부터 난 그 친구를 여자로 좋아했고, 그 친구도 나를 좋아했지만 열 살 나이 차가 큰 벽이었다. 그 친구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자기 생활반경 안에 내 연령대나 나 같은 사람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 친구를 만나보니 내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내 배우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희로애락에 대한 공유가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아내를 무척 존경한다. 아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친구가 내 아내인 게 뿌듯하고 든든하다.

아내가 여자 연예인과의 접촉을 경계하지 않는지 묻자 그가 손사래를 친다. “여배우와 만날 일이 거의 없고, 아내에게 그런 스트레스를 줄 만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공식 행사에 아내를 자주 동반하지 않는 것도 아내를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영화제에 몇 번 경험삼아 동반했는데 아내가 그런 자리를 싫어했다. 내 영역으로 들어와 장진의 아내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주체적으로 자기 영역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나도 그 점을 존중한다. 더구나 아내는 사람이 북적대는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12월에 아파트를 떠나 더 외진 곳으로 옮긴다. 작더라도 마당이 있는 집으로 가자고 해서 평창동의 조그마한 주택을 얻었다.”

아이들과 대중목욕탕, 축구장 함께 다니며 스킨십

아내 차영은 씨는 현재 ‘장차 차일드’라는 교육전문 업체를 운영한다. 장 감독은 “아내가 만든 교육교재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그 말끝에 “소소한 비즈니스지만 최근 내놓은 한글 블록이 이미 절판됐을 정도로 사용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다”며 은근한 아내 자랑도 덧붙였다. 이들 부부는 아이들에게 알파벳이나 구구단을 외우게 하기보다 뭐든 편견 없이 접할 수 있도록 풀어놓는다. 큰아이가 매주 한번 피아노를 배우게 하고, 테니스와 바둑, 체스, 축구를 가르치는 것도 교습보다는 경험에 무게를 둔 결정이었다. 장 감독은 “요즘 아이들이 지나치게 거칠고 가만 있지를 못해 10세 이후엔 활을 가르치려고 한다. 활을 배우면서 집중하는 습관이 몸에 배면 좋겠다”며 휴일 아침마다 큰아이와 벌이는 바둑 대결을 떠올렸다.

“일곱 살짜리가 바둑을 배워오는 게 아니라 기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저씨들의 말투를 배워오더라. 지금은 술이 다 안 깬 상태에서도 아이에게 이기는데, 내가 바둑알을 먹으면 아이가 이런다. ‘바둑은 남의 알을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집을 어떻게 짓느냐가 중요하지.’ 하하하.”

육아 문제만큼은 항상 아내의 결정을 우선순위에 두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이들과의 스킨십에 소홀한 아빠는 아니다. 아이들을 대중목욕탕에 데려가 서로 등을 밀어주게 하고, 축구나 야구 경기장으로 이끄는 건 그의 몫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야구팀이나 축구팀 멤버들과 운동을 할 때도 큰아들을 대동한다. 이는 운동을 유난히 좋아하는 아이를 위한 그 나름의 교육방식이다.

▼ 결혼과 출산이라는 대사를 치르고 나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더라.

나 역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하하. 결혼 초에는 아내에게 쪽팔리지 말아야지 하며 살았다. 지금은 그 대상이 아이들이 됐다. 큰아이가 얼마 전 이번 영화를 보고 울더란다. 감수성이 풍부해서 4세 때도 내 연극을 보고 울었는데, 어제 유치원에 가서는 “이번에 나오는 우리 아빠 영화가 되게 재미있다”고 자랑했단다. 무슨 장면이 재미있었는지 물었더니 아이다운 일차원의 답이 나오더라. “할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는 장면이요”라고(웃음).

▼ 아이가 아버지의 일에 관심을 보이면 적극 밀어줄 건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이 많으니 두루 접해보고 나서 미래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몸담고 있다는 이유로, 혹은 많이 접했다는 이유로 이 계통의 일을 쉽게 선택한다면 그건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연예계와의 접촉을 조심한다. 최근 MBC ‘아빠 어디가’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을 때도 바로 고사했다. 아이의 동의 없이 쉽게 아이를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공인으로 만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2~3년 후에는 내가 어떻게 케어를 해야 할지 난감할 것 같다.

▼ 아이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줄 충분한 준비가 돼 있나.

아내가 아이들이 TV를 멀리하고 전시회,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신경 쓴다. 아내가 지금 영재교육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영재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아이”라고 하더라. 일반 아이들과 다른 커리큘럼과 다른 접근방식으로 교육해야만 영재성이 좋은 쪽으로 발현되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특이한 아이가 된단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교육 트렌드를 쫓아다니지는 않는다. 유치원에서 숙제를 많이 내주니까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리더라.

가난 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 물려준 부모님

‘내가 영화와 가족을 사랑하는 법’
문득 소년시절 장진의 모습이 궁금했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부하며 혁신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굳혀온 ‘영화계의 이단아’ 장진을 키워낸 원동력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해답이 그의 부모의 남다른 교육관과 집안 분위기에 있지 않을까.

“적당히 모범생이었고 적당히 괴짜였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두 분 다 사람을 좋아해서 친화력이 좋았다. 늘 적정선의 빈곤을 안고 살았음에도 세상을 저주하지 않고 더불어 살기를 즐기셨다. 내 예술적, 인문학적 성향도 부모님이 조성한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돈이 많은 부모는 자식에게 돈을 물려주지만 좀 배운 부모나 영리한 부모는 자식에게 돈 버는 방법을 물려준다. 정말로 오래 생각한 부모는 돈이 없어도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물려준다. 내 경우는 세 번째에 속한다. 서울 변두리에서 우린 늘 가난하게 살았지만 엄마아빠가 즐거워하는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다. 육개장 끓여서 이웃이랑 같이 먹고 놀고, 위아래집이 모여 고스톱 치고 있으면 엄마가 수박 잘라 오고, 어느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다들 가서 도와주고.”

그때와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정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한 예로 “아이들이 호텔 수영장에 데려갔을 때보다 엄마와 함께 폐지로 장난감을 만들 때 더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일”을 상기했다. 그의 아내는 폐지 외에도 우유 곽, 빈병, 다 쓴 화장지 속 등을 모아서 매주 아이들과 함께 재활용 장난감을 만드는 시간을 갖는다. 장 감독은 그런 아내를 보고 있으면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고 한다.

“어머니는 튀김과 아이스크림, 셔벗, 도넛까지 뭐든 다 만들어 먹이셨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온갖 정성을 들여 차려주신 음식을 어찌 손쉽게 돈으로 산 것에 비하겠나. 재화는 시장을 돌아가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뿐이다. 재화의 가치와 삶의 가치가 비례하는 것처럼 인식해가는 세태가 걱정된다. 뭐든 돈으로 해결해서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얼마나 안타깝고 무서운 일인가. 그건 막아야 한다.”

▼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와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보고 싶은가.

나는 운명론자라 돌아가고 싶은 시점은 없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지금이다.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일터에서든, 집에서든 적정선의 고민스러움 속에 산다. 지금이 불행해서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가고 싶다면 서글퍼질 것 같다. 앞으로 가보고 싶은 시점은 있다. 내년 1~2월 정도. 이번 가을을 정신없이 피곤하게 보내서 멀리 가고 싶진 않다. 12월 이사한 직후인 그 무렵이면 마당에서 아이들과 눈을 쓸고 있지 않을까 싶다. 집에서 5분쯤 내려가 슈퍼마켓에서 우리 식구들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을 집어 들고 호호 부는 모습도 그려진다.

재주가 많으면 박복하다는 말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영화계에서 다재다능함을 두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재주가 많다 보니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어느덧 불혹을 넘긴 그가 지향하는 인생도 자신을 채우기보다 나누는 삶에 맞춰져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세상을 윤택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것이 뭘까, 내가 가진 재능을 사회에 환원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학교나 회사 극회에서 내 작품을 갖고 공연해도 되는지 물으면 기꺼이 허락한다. 단 무료 공연을 전제로. 이번 영화를 보고 나가면서도 늘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형제나 부모, 형제 같은 친구들에게 안부전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 그게 상업영화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원이 아닌가 싶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여성동아 2014년 11월 6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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