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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와 만나는 청산도 여행

청보리밭처럼 푸른 바다로 진도아리랑이 흐르던 곳

글&사진·남기환 여행작가

입력 2014.04.03 10:42:00

푸근한 기운이 바다에서도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이면 푸릇하게 돋아나는 봄싹의 빛깔을 닮은 그 바다가 떠오른다. 그 바다는 완도항을 떠나 청산도(靑山島)까지 이어지며 이름값(靑)을 톡톡히 해낸다. 이곳만은 덜 알려져서 사람들의 손길을 덜 타기를, 발길이 덜 닿기를 빌었던 그 청산도로 다시 떠났다. 들과, 그 사이로 구불거리며 난 길과, 돌담과 바다는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여행길에는 작가 이청준의 ‘서편제’가 동행해주었다.
‘서편제’와 만나는 청산도 여행

1 울창한 산세와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의 풍경을 지닌 청산도. 2 청산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우아하면서도 아찔하다.

느리게 찾아가는 푸른 봄 바닷길

‘서편제’와 만나는 청산도 여행

故 이청준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서편제’. 소리꾼 가족 유봉과 송화, 동호가 ‘진도아리랑’을 신명 나게 부르며 걸어가는 장면이 바로 이 청산도에서 촬영됐다.

청산도까지 가는 길은 느리면 느릴수록, 더디면 더딜수록 더 어울려 보인다. 분명 먼 길을 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오히려 천천히 꺼내보면 이 섬이 속속들이 안겨줄 아름다움을 음미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목포를 지나 육지와 다리 하나로 이어진 섬 완도에서 배를 타고 떠나기까지 이 머나먼 길이 육지와 섬, 다시 바다와 섬으로 근근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완도에서 뱃길로 50분. 사람과 차를 실은 페리호의 느릿한 속도감 역시 청산도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려는 의도된 연출인 듯 여겨진다. 봄꽃보다 더 화려한 등산복 차림으로 뱃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떠나온 섬 완도와 다가올 섬 청산도를 앞뒤로 번갈아 보며 그 이탈의 거리를 가늠해보느라 들뜬 표정들이다. 청산도를 찾는 사람들의 차림새는 한결같다. 한참을 걸어도 부담 없을 가벼운 트레킹화에 몸놀림도 이에 맞춰줄 산뜻한 복장. 모두가 청산도를 ‘걷기 위해’ 찾은 것이다.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후 높아진 사람들의 관심에 걷기 열풍까지 더해졌다. 11개 코스, 42.195km에 이르는 슬로길은 지형이 험한 섬 동편 일부를 빼고는 섬을 구석구석 크게 한 바퀴 도는 길이다. 1백 리 길이니 우리나라 수많은 섬 걷기 길들에 비하면 꽤 긴 편이다. 제주도가 아님에도 2박 3일 일정으로 청산도 걷기 여행을 다녀오는 일은 충분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오는 동안의 푸른 물결과 저만치 보이던 청산도의 외형에 들떴던 마음을 발걸음에 담아 약속이라도 한 듯 순례처럼 길을 나선다. 미리 손님맞이 준비를 하고 있던 청산도 내 셔틀버스를 타기도 하지만 대부분 두 발로 섬을 둘러볼 채비를 서두른다. 우리 땅 곳곳의 여러 걷기 길 가운데서도 꼭 걸어봐야 하는 길을 몇 곳 꼽으라면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 청산도 슬로길을 두고 싶다. 섬의 굴곡을 따라 들어가고 나가는 바다는 아늑해서 오히려 섬에서 바다로 물이 뻗어나간 듯하고, 작은 섬임에도 산세가 제법 호기를 부리고 있어 눈이 지루할 틈이 없다.

선착장을 출발해 완만하면서도 긴 오르막을 20여 분 천천히 오르면 왼편으로는 봉우리로 쭉 뻗은 길이, 정면으로는 장난감 블록을 모은 듯한 지붕이 이어진 작은 촌락이, 그리고 오른편으로 초록 사이로 좁고 길게 뻗은 길이 펼쳐진 섬 윗등(서편제길)이 이어진다. 애초에 청산도를 다시 찾아온 이유인 ‘서편제’의 흔적은 의외로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된다.



청산도에서 직선 거리로 그리 멀지 않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작가 故 이청준(1939~2008)은 남도의 한과 풍광을 그린 ‘남도사람 연작’ 3부작을 써냈다. 그 가운데 처음을 장식한 것이 ‘서편제’(1976)다. 소설은 한 사내가 전남 보성읍을 벗어난 공동묘지 옆 길목 주막 소릿재로 하룻밤을 묵으러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 그는 소릿재 주막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찾아온 길. 젊은 시절 끊은 인연의 자락이 이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곳에서 사내는 주막 여인에게 소리를 청하고 자신은 북장단을 맡는다.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등의 소리가 사내와 여인의 대화 사이사이 녹아 들어간다.

여인은 ‘소릿재 주막’이라 불리는 사연이 어느 소리꾼 부녀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들려주었다. 북을 잡은 노인과, 앞을 보지 못하지만 그 소리만큼은 누구나 기막혀 하던 그의 딸은 어느 날 빈집이던 이 주막으로 흘러 들어와 소리로 연명했다. 그러다 노인은 생을 마감했고, 아비의 묘를 지키는지 혹은 누구를 기다리는지 이 집을 떠나지 않는 그녀를 위해 그 소리를 아꼈던 대갓집에서 주막을 열어주었다는 것. 지금의 주막 여인은 그 대갓집에서 보내 그녀를 수발 들던 신분이었지만 덩달아 소리를 배워 지금에 이르렀다고 털어놓는다. 그 이야기가 흐르는 동안 심한 감정의 요동을 경험하는 사내를 보던 주막집 여인. 어쩌면 그가 (눈 먼 소리꾼이 아비의 3년상이 끝난 뒤 홀연히 떠나기 전까지) 그토록 기다리는 듯했던 의붓오빠일지 모른다고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길에서 만난 소설과 영화, ‘서편제’

소설 ‘서편제’는 이청준 특유의 함축적이면서도 극적인 긴장감을 풀어내는 갖은 암시들로 풍성한 작품이다. 그래서 단편이되, 일부러 속도감 낮춰가며 읽어 내려가야 그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설 ‘서편제’의 공간적 배경은 이곳 청산도가 아니다. 사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특정하기는 힘들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릿재 주막은 보성의 어느 길목 정도가 가장 정확하겠지만, 그저 소리 ‘서편제’가 흐르는 남도의 어느 땅이어도 상관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굳이 소설을 만나는 여정을 청산도로 잡은 이유는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 선보인 ‘서편제’의 숨막히는 롱테이크를 담은 ‘진도아리랑’ 신을 이곳에서 촬영했기에, 소설의 감흥을 조금 더 시각적으로 만나볼 수 있어서다. 청산도 슬로길 제1코스, 항구에서 곧장 도착한 이 윗등은 이름도 아예 ‘서편제길’로 지어졌다.

이곳에서 소리꾼 부녀와 사내가 한창 좋았던 시절, ‘진도아리랑’을 신명 나게 부르며 지나던 장면이 촬영됐다. 화면을 꽉 채울 정도까지 가까이 이른 이들은 진도아리랑과 춤을 이어가더니 화면 밖으로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5분 40초의 롱테이크. 감독도 이 길에 푹 빠져 버렸는지 훗날 이렇게 길게 찍을 걸로 애초에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길 초입에 서면 스크린을 들여다보는 듯 익숙하고 반가운 풍경과 만난다. 정감 있는 돌담 사이의 황톳길도 그렇고, 마침 청보리와 마늘이 한창일 때 찾아 밭은 유려한 초록으로 넘실댄다. 바다는 하늘과 닿은 색감으로 먼 배경이 돼준다. ‘서편제’는 흔히 한이 서린 듯하나 정교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굴곡이 많은 남도의 해안을 닮은 여성적인 소리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그에 어울리는 걸로 따지면 이 길이 그만이다. 가만히 서 있으면 불어오는 바람에 청보리가 흔들릴 때마다 소리꾼 부녀와 사내의 소리가 실려 있지 않을까 괜한 기대를 하게 되는, 소설이 감각적으로 재현되는 그런 길이기도 하다.

‘서편제’와 만나는 청산도 여행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후 청산도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푸른 하늘과 바다, 정감 어린 돌담길, 초록빛 청보리밭은 예전 그대로다. 청산도는 크고 맛있는 전복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영화는 소설에서 주막집 여인이 들려준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면서 여러 극적인 요소가 투입되다 보니 소설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드라마성을 살려 만들어졌다. 유봉, 송화, 동호 등의 이름은 영화에서 얻게 됐고, 소리꾼의 딸이 눈 멀게 된 사연도 서로 다르다. 소설에서 그 딸이 처녀의 몸으로 오빠를 기다렸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술집 주인과 반 억지 결혼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극적인 구성과 스토리의 풍성함을 위해 주변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가공해냈다. 여기서 소설이 지닌 힘이 드러난다. 굳이 다 드러내지 않더라도 더욱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는 함축과 암시의 힘. 그래서 청산도를 찾을 때는 영화 속 장면만 떠올리지 말고 꼭 소설 ‘서편제’를 읽은 뒤 눈앞의 풍경과 함께 떠올려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이청준의 1979년 작품 ‘선학동 나그네’도 추천한다. ‘서편제’의 이야기가 조금 더 극적이고 토속적인 장치를 통해 깊이 있게 펼쳐지는 ‘맛’을 경험할 것이다.

세상의 속도감과 잠시 이별해도 좋은 곳

‘서편제’와 만나는 청산도 여행
영화의 장면을 떠올린 이들은 구불구불 뻗은 길, 혹은 초록빛 보리밭과 노란 유채의 색감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가 하면, 근처 밭에서 바로 딴 마늘종을 묶어 파는 어르신들과 기분 좋은 흥정을 즐기곤 한다. 그러나 청산도의 매력은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여행자는 이제 시작된 이 섬과의 만남을 마저 맛보려 발길을 재촉할 것이다.

길은 바다를 바싹 당긴 읍리해변을 지나 청산도 최고의 해안 절경이라 불리는 범바위에서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짙푸르게 변한 깊은 바다의 풍경을 내놓는다. 그 와중에 야트막한 돌담길을 중심으로 깊은 산세와 푸근한 남도 바다의 풍경을 좌우에 거느린 청산도의 모습이 이어진다. 유난히 돌이 많은 청산도의 지세를 말해주듯 거친 기운의 바위가 솟은 해안과 캐낸 돌을 차곡차곡 쌓아 구들장을 놓듯 이어간 청산도의 구들장 논도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돌’은 마을의 풍경도 멋스럽고 독특하게 만들어놓았다. 동촌리와 상서리는 물론 청산도의 여러 마을에서 높직하고 튼실히 쌓아올린 돌담은 오랜 시간이 내려앉아 그 자체로 멋스러운 장면을 연출한다. 돌담 너머에는 어김없이 과실수 하나씩 마당에 심어놓아 허전함을 메웠다. 주어진 자연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척박한 섬으로 내버려졌을 수도 있을 텐데, 청산도가 지금의 이국적인 섬 풍광을 지니게 된 건 오롯이 섬 사람들 덕분인 셈이다.

길은 마을들을 지나 섬 동편의 바닷가를 더듬으며 이어진다. 물이 빠질 때면 2km 넘는 부드러운 모래 해안이 드러나는 신흥리해수욕장(TV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에서는 불등해수욕장으로 소개)의 신비로운 절경을 지나 몽돌 자갈이 곱게 깔린 진산리해수욕장 등에서는 청산도가 바다와 이루는 우아한 곡선을 내려다본다. 우아하면서도 아찔하게 펼쳐진 바다를 발아래 두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장쾌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섬 반대편에서 시작해 논과 밭 사이 길을 따라 마을을 지나는 동안, 울창한 섬의 산세에 눈이 시원해졌다가 다시 그 끝을 헤아리기 힘들 만큼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의 풍경에 탄성을 터뜨리기도 한다.

청산도, 그 섬에서 우리 땅의 자연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조금 과장일까? 섬을 둘러보는 동안은 세상의 속도감과 잠시 이별해도 좋은 곳. 도시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할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청산도행 배에 올라볼 일이다.

‘서편제’와 만나는 청산도 여행
‘서편제’와 만나는 청산도 여행
남기환 여행작가

월간지 ‘Travel·Culture’, ‘CASA Bistro’ 등을 거쳐 여행전문지 ‘TheBeetle Map’, ‘across’ 등에서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편집디자인 업체 ‘아쉬’의 대표이자, 미국계 유통업체 ‘코스트코’가 발행하는 멤버십 매거진 ‘The Costco Connection’한국판의 편집인이다. 저서로 ‘7일간의 이스탄불 여행’을 6월 발간 예정이다.

여성동아 2014년 4월 6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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