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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깊은 울림, 양방언의 드라마틱한 삶

글·진혜린l사진·지호영 기자

입력 2014.02.17 17:29:00

재일교포 2세 음악인, 양방언은 요즘 소치동계올림픽 폐막식 공연 준비로 분주하다. 신의주 출신 어머니, 제주도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의사가 됐던 그가 세계적인 음악가로 우뚝 서며 ‘성공한 음악인’의 공식을 다시 쓰고 있다.
음악으로 깊은 울림, 양방언의 드라마틱한 삶
피아니스트를 인터뷰할 때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을 기사에 썼다고 하니 “이번에는 하얗지도 길지도 않더라고 써야겠네요” 하며 껄껄 웃는다. 그는 손이 큰 사람을 볼 때마다 부러울 만큼, 손이 작아 고생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다. 손가락이 길다고 해서 다 피아노를 잘 칠 수는 없는 거니까. 더욱이 그 소담한 손으로 빚어낸 음악은 양방언만의 또 다른 개성이 된다. 전형적인 ‘음악인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음악대학 졸업장도 없고, 세계 유수의 콩쿠르 수상 내역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국적으로 일본에 살며 유럽과 미국·중국 오케스트라와 협연과 레코딩을 하는 한편 한·중·일 3국에서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는 지금,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양방언만의 고유함을 만들어낸 요인에서 제외할 수는 없다.

의사 가운을 벗고 밴드 키보드 연주하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의 주제곡으로 사용됐던 ‘프런티어’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양방언은 신의주 출신 어머니, 제주도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5남매의 막내로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 2세다.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형과 누나들은 의사나 약사가 됐다. 그 또한 당연히 의사가 되리라는 가족들의 기대에 걸맞게 의대에 진학, 졸업 후 도쿄대 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1년 만에 돌연 사표를 내고 음악인으로 전업을 선언한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음악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너무 고민이 돼서 생활하는 게 힘들 정도였죠. 의사라는 직업도 좋지만 음악이 머리에서 안 떠나니까요. 결국 병원에 있는 게 나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맞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죠. 의사를 그만두고 바로 집을 나왔어요. 그 뒤로도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음악을 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셨죠. 하지만 당시에 너무 많은 고민을 했기 때문인지 한번 선택한 후로는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었어요.”

당연했던 삶을 살던 그의 머릿속을 음악이 장악하게 된 것은 다섯 살 때 시작한 피아노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양방언의 집은 늘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5남매는 피아노나 플루트·클라리넷 등 각자의 악기를 다뤘고, 보사노바·재즈·클래식·때론 대중가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즐겼다. 피아노를 유난히 좋아하던 누나를 따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레슨이 귀찮을 때가 더 많은 소년이었다. 열 살 때 동경예술대학원 다키자키 시즈요코에게 사사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음악은 ‘예쁜 여학생 보러 레슨 받으러 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그에게 ‘음악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순간’이 찾아왔다.



“중학생이 된 후 어느 날부턴가 팝 음악을 들을 때마다 뭔가 감동이 마음속에서 움직였어요. 하지만 저는 클래식 피아노를 치다 보니 팝이 별개의 음악으로 보이더라고요. 팝 음악을 한두 번 듣는 대로 따라 치면서 ‘음악을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 밴드 활동을 하던 친척 형을 보면서 ‘이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졸업할 때 즈음에는 아예 음악에 흠뻑 빠져 있었죠.”

음악을 사랑하는 가족들이었지만 그가 음악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음악을 할 수 있는 다른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의대 진학이었고, 그는 입학하자마자 밴드를 시작으로 음악 활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막상 의사가 된 후에는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만 했고, 그는 장고 끝에 아버지의 외면과 어머니의 무너지는 걱정을 뒤로하고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중에 50만원을 들고 집을 나왔어요. 그때가 25세였는데, 대학생 때처럼 연주할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연주를 하고, 건강검진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허름한 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살았어요. 3년쯤 지났을 때 하마다 쇼고의 공연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음악의 세계에 눈을 떴죠.”

일본의 전설적인 록 가수, 하마다 쇼고의 환호성 가득한 대형 콘서트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인기 가수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연주를 하던 그는, 한두 곡씩 편곡으로 참여하다 작곡에까지 손을 뻗치며 점차 프로듀싱의 영역으로까지 넓혀갔다. 그가 ‘뮤지션’이란 타이틀보다 음악 산업에 더욱 열중하던 때였다.

그렇게 10년간 그는 대중음악을 했다. 그는 여러 인기 가수들의 프로듀싱으로 분주했던 그때를 “공장처럼 음악을 만들던 때”라고 말했다.

“정말 무지무지 많이 했어요. 물론 히트작도 많았고, 좋은 음악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이 되자 계속 비슷한 음악을 공장처럼 찍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대형 아티스트와 일하면서 그만큼 생활도 좋아졌고, 삶의 여유도 생겼지만 음악적 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창문을 열고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싶었죠. 당시 영상 음악에 더 관심을 갖게 됐고, 솔로 음악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이상 팝 계열의 음악은 만들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린 거죠.”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짐을 싸들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일본에서 프로듀서와 편곡자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그의 선언에 많은 사람들이 적잖이 놀랐다. 사람들은 그에게 “잘난척 하지 말라”고들 했다.

“모든 일이 처음부터 순조로울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고도 참았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했고, 수많은 시도를 해 봤죠. 그랬더니 그런 제 음악에 호응해주시는 분이 나타나더라고요. 그분의 투자는 솔로 1집부터 4집까지 이어졌죠.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영국의 비틀스 성지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처럼 개인적으로 상상만 하던 일이 실현되기 시작한 거죠.”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아직도 연례 행사처럼 이어져오고 있다. 비전공자로서의 한계는 크지 않았다.

“제가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쓰는 곡이 전공자가 바라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개성이 있다는 거였죠. 그래서 사람마다 개성을 가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어느 길을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되거든요. 기회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 생각해요.”

음악으로 깊은 울림, 양방언의 드라마틱한 삶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 좋아

첫 솔로 앨범을 낸 1996년은 그의 인생 일대의 전환점이었다. 팝 음악과의 절연을 선언한 후 지금 살고 있는 일본 나가노 현 가루이자와의 산골 마을에서 음악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건 그의 의지와 도전으로 만들어낸 도약의 발판이었다. 그 후 팝에 한정돼 있던 그의 음악 세계는 록, 재즈, 클래식, 국악 등 여러 장르의 벽을 허물며 양방언의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토록 용서받고 싶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이기도 하다.

“그때 일본과 홍콩으로 오갈 일이 많아서 비행기를 타면 항상 우리나라(그는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표현했다) 하늘을 지나가는 거예요. 당시에 저는 조선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과 다르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고향임에도 우리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한 번 나가는 데도 2개월씩 기다리고, 돌아올 때는 재입국 허가서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아버지의 고향, 어머니의 고향, 그리고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에서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출입국의 자유를 위해 그는 일본 국적을 취득할까도 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제도를 따르자면 자신의 이름, 양씨 성을 버려야만 했다. 그는 아버지가 주신 이름을 버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1999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100% 한국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나의 원점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늘 돌아보게 돼요. 하지만 ‘정체성의 혼란’이나 ‘교포 2세로 받는 차별’처럼 무거운 고민은 아니었죠. 나의 본질이랄까. 그 고민은 아무리 해도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사진작가 배병우 씨가 해준 말은 참 고마웠어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은 안쪽을 바라볼 수 있다고요. 그만큼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것은 저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가능성이고, 혹시 있다면 키워나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자신의 본질을 찾는 것은 심각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었기에, 음악가로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중국 쪽에서 영상 음악 의뢰가 계속 들어오니까 한번은 왜 나한테 부탁하냐고 물어봤어요. 할리우드에도 훌륭한 작곡가들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할리우드에 부탁하면 할리우드의 음악이 나온다는 거죠. 동양의 정서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시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인데 말이죠.”

음표의 조합에 불과한 음악은 정서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주제곡으로 사용된 ‘프런티어’가 애초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2001년 일본에서 발매한 4집 앨범 수록곡을 주최 측의 요청으로 사용한 것. 그의 음악에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풍부한 한국적 멋이 담겨 있다.

그는 최근 소치동계올림픽 폐막식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2월 23일 열리는 폐막식에서 한국 평창에서의 차기 개최를 축하하는 공연의 음악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 국제적 무대에서 우리나라를 표현해내고, 겨울의 아름다움을 가슴 뭉클하게 전하고 싶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서 피아노로 연주했던 자작곡‘아리랑 판타지’의 연장선상이 될 것 같다고. 무대의 규모만큼 구체적인 구상을 완성하는 데만도 꼬박 3개월이 걸렸고 이제 본격적인 협연과 레코딩 작업만 남겨둔 상황이다.

“이번 공연처럼 규모가 큰 공연이 아니면 작품의 80%를 가루이자와의 제 집에 마련된 스튜디오에서 레코딩해요. 도시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소설가나 화가 등 작가들이 모인 곳이라 조용하죠. 쓸데없는 술자리나 미팅을 하지 않아서 좋고요(웃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에요. 해발 1000m의 산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작업을 한다고 하면 여유로울 것 같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언제나 마감에 쫓겨 시간과 투쟁하죠. 그럴 때는 저희 집에서 키우는 개도 가까이 오지 않아요(웃음). 제가 민감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가 봐요.”

각종 기자재가 촘촘히 들어찬 아담한 스튜디오. 그 스튜디오의 열린 문을 통해 음악이 흘러나오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그의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은 언제나 그의 아내다.

“의과대학 동창생 아내의 친구였죠. 결혼한 지 벌써 20년이나 됐네요. 지금은 그만뒀지만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IT 계통의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게 오히려 좋아요. 음악을 잘 몰라도 누구에게나 감상은 있으니까.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평가를 하면 제가 더 어려워질 수 있는데, 음악을 모른다면서도 아내의 감상 평은 아주 훌륭해요. 저에게 가장 무서운 의견을 주는 사람이죠.”

그곳에서 탄생한 그의 음악은 의외로 웅장하다. 혹자는 그를 크로스오버 뮤지션이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장르의 악기를 혼합한 음악을 시도하며, 풍족하고 가득 찬 음악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피아노 독주곡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장엄하거나 무겁지 않으면서도 꽉 찬 느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걸 좋아하기는 하죠. 사실 여러 음악가들이 함께 연주를 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아요. 맞춰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난리도 아니죠(웃음). 하지만 저는 같이 호흡하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만들 때는 혼자만의 창작물이지만 그것이 내 음악으로만 머물면 안 되는 거니까요. 같이 공감하고 공존하며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난해한 음악은 싫어요. 물론 만드는 과정은 어렵고 난해할 수 있지만, 결과물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고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장소협조·코나퀸즈(02-720-9106)

여성동아 2014년 2월 6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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