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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바보가 아니거든요!

글·김영희 전 주세르비아 대사

입력 2013.10.01 15:36:00

그리스 사람들은 이야기꾼이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과 사람이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그들 몸속에 스며 있어 저절로 묻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보통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자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거론된다. 그리스 사람들은 낙천적이고 유머가 많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지난 8월 아테네에서 ‘제23차 세계철학자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가 열려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5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이 대회는 ‘철학자 올림픽’이라고 불리며 올해는 전 세계에서 4천여 명의 철학자가 참석했다. 개막식 장소는 기원전 2세기에 세워진 아크로폴리스의 고대 원형극장 ‘헤로데스 아티쿠스’였다. 때마침 떠오른 보름달과 함께 아테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곡이 원형극장을 가득 채우자 우리는 한층 고무됐다. 순서에 따라 그리스 총리를 대신해 문화부 장관이 축사를 했다. 그리스어 연설은 영어 자막으로 비춰주었다. 연설 마지막 즈음 장관이 “철학의 정신 중 하나는 작은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라고 하자 청중석에서 휘파람과 야유가 터져나왔다. 청중의 야유가 계속되자 장관은 읽던 원고를 내려놓고 강한 어조로 연설을 계속했다. 이 부분은 자막 처리가 되지 않았지만 어떤 내용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채무국 그리스의 아우성, 채권국 독일의 반발
그리스는 현재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해 있다. 국가 부도 직전까지 갔던 그리스는 2010년 4월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IMF)의 1차 구제금융에 이어 2012년 2월 2차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받은 구제금융 지원액은 총 2천3백70억 유로(약 3백41조7천억원)인데, 그중 1천7백90억 유로(약 2백58조8백억원)가 유럽연합 지원금이다. 유럽에서 경제력이 제일 큰 독일의 몫은 5백억 유로(약 72조9백억원)에 달한다.
국제사회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으려면 수많은 조건이 따른다. 엄청난 국가 부채를 줄이고자 정부는 긴축정책을 펼쳐야 하고, 이에 따라 공무원·교사·경찰 등 각종 공공 분야 종사자들이 구조조정을 당하고, 문화는 물론 모든 복지 분야 예산이 대폭 삭감된다. 공공 부문뿐만 아니라 모든 민간에서도 해고가 줄을 이어 국민들의 아우성과 시위가 뒤따른다.
머지않아 그리스에 대한 3차 구제금융이 필요하다고 모두가 인식하고 있지만, 9월 하순에 실시될 독일 총선이 끝나야 이 문제가 공론화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 지원의 조건으로 내건 긴축재정 요구에 대해 그리스 국민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채권국 독일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독일 국민들은 그동안 그리스 정부가 쌓이는 부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만하게 예산을 집행했고, 국민들은 탈세와 조기 정년 퇴직에 따른 과다 연금 수령도 모자라 빚을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해왔다고 지적한다. 독일인들은 자신이 65세까지 열심히 일하며 성실히 낸 세금을 왜 다른 나라를 구제하는 데 퍼부어야 하느냐고 반발한다. 경제 위기를 겪는 국가의 문제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밖에서 생각하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어느 나라나 국민의 인식은 무서운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과 그리스의 흥망성쇠
아테네는 2007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와 많이 달라졌다. 시내 곳곳에 문을 닫은 상점들과 건물의 낙서가 재정 위기 상황을 말해주는 반면, 2008년 아테네 하계 올림픽에 맞춰 개통된 지하철 시스템은 무척 편리했다. 2009년 개관한 새로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The New Acropolis Museum)을 보면서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크로폴리스는 ‘높다(아크로)’와 ‘도시(폴리스)’의 합성어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중심 언덕이었다. 기원전 3000년경 미케네 시대에 이곳에 처음으로 신전이 세워졌으나 페르시아와의 오랜 전쟁 중에 모두 파괴됐다. 그 후 전쟁에서 최종 승리한 그리스는 기원전 5세기 다시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는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다. 벽에 그리스 신화가 조각돼 있는 이 신전은 지난 수천 년간 그리스의 흥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라가 멸망하면 국민뿐만 아니라 유물도 수난을 당한다. 고대 그리스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되자 신전의 조각들은 우상 파괴라는 이름으로 훼손됐고 신전 자체도 십자가가 걸린 기독교 교회로 바뀌었다. 15세기에 오스만 투르크가 점령했을 때는 이슬람 사원이 됐다가 점령군 기지와 하렘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1687년 터키군의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신전 대부분이 파손됐다. 그나마 남은 유물들은 1801년 당시 아테네 주재 영국 대사 엘긴 경이 터키의 허가를 받고 반출해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2009년 개관한 새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바닥과 벽이 모두 유리로 돼 있어 고대 그리스의 유물은 바닥의 유리를 통해, 바로 맞은편의 아크로폴리스는 벽의 유리를 통해 볼 수 있다. 박물관 3층에는 원형과 똑같은 크기의 파르테논 신전이 있고 몇 개의 진품 유물과 함께 수많은 모조품들이 전시돼 있다. 현재 그리스는 영국에게 아크로폴리스에서 약탈해간 유물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어, 마치 박물관이 빼앗긴 유물로 인한 고통을 방문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크로폴리스의 건너편에 있는 ‘필로파포스(Philopappos)’ 언덕을 방문했을 때 유적지 근무자 2명이 나무 아래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을 잠시 피하고자 자리를 찾던 우리도 그 나무 그늘에 합석했다. 여성 직원은 10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으나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9월 말이면 그만둬야 한다며 아홉 살 난 딸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역시 9월 말 해고를 앞둔 젊은 남성은 대학을 졸업하고 겨우 잡은 일자리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읽는다는 고대 그리스 현인 7명의 명언이 적힌 종이를 지갑에서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현재 그리스의 실질적인 실업률은 약 30%이고 청년 실업률은 약 60%에 달한다고 한다. 나라 밖에서는 그리스인들이 분수에 넘치게 살아 그 지경이 됐다고 비난하지만,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국가 부채만 늘려온 정치가들과 지도층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 이는 결국 서민들의 몫이 됐다고 두 사람은 울분을 토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1997~1998년 한국의 금융 위기 상황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독일의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급변하는 국내 상황은 예측을 불허했다. 외화 부족으로 현지 직원 월급과 집세조차 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동안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고자 해온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임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정치가는 유권자의 표만 의식하고, 유권자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다’고 한다. 국민의 삶과 국가의 흥망을 책임지는 정치가는 유권자가 아파해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국민을 재앙으로부터 보호하고 국가의 발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가라면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고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국민도 이해하고 따를 것이다.

김영희 전 대사는…

국민은 바보가 아니거든요!




전북 전주에서 6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나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일하다 1972년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독일로 건너갔다. 3년간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한 후 공부를 계속해 쾰른대학에서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쾰른대학 6백 년 역사에서 최초로 ‘전공 과목을 강의한 외국인 여성’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독일 통일 직후 1991년 외무부에 특별 채용돼 주독일 한국대사관에서 1등 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뒤 2005년 세르비아 대사로 임명돼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 대사가 됐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 한국과 미국, 독일을 오가며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가 있다.

여성동아 2013년 10월 5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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