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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With specialist | 김선영의 TV 읽기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일까

드라마 ‘여왕의 교실’

글·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 | 사진·MBC 제공

2013. 08. 07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워즈워스의 시구도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서는 환상에 불과하다. “아이들에게 배울 것은 없다”던 고현정의 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중요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일까


“아이들에게 배울 것은 없다.” MBC 수목드라마 ‘여왕의 교실’ 제작발표회 당시 논란이 됐던 고현정의 발언이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저 말이 흥미로웠던 건, 극 중 고현정이 연기하는 마여진 캐릭터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마여진이라는 인물은 담임을 맡은 초등학생들에게 사회의 냉정한 생존 법칙을 알려주고,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는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독재 교사다.
당연하게도 마여진이 지배하는 교실에서 아이들의 자유와 인권은 깡그리 무시된다. 그는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우등생에겐 특권을, 꼴찌에게는 잡일을 부여하며, ‘능력에 따라 차별받는 것은 우리 사회의 당연한 규칙’이라고 가르친다. 아이들은 마여진의 말에 분노하면서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권력자인 그에게 어쩔 수 없이 굴종하거나 특권층에 속하려 스스로 그의 꼭두각시가 된다.
요컨대 ‘여왕의 교실’은 기존 어린이 드라마와 근본적으로 다른 작품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시인 워즈워스의 유명한 시구도 이 작품에서는 환상에 불과하다. 아이의 동심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면을 가르쳐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완전히 폐기되며, 아이의 행동은 어른의 세계 못지않게 잔혹하게 묘사된다. 가령 주인공 심하나(김향기)가 반 아이들에게 당하는 집단 따돌림은 어른들의 폭력보다 공포스럽고,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반 친구들을 감시하고 배신하는 아이들의 모습 또한 섬뜩하기 그지없다.
‘여왕의 교실’의 이러한 파격은 원작인 일본 드라마의 설정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2005년 방영된 원작 드라마는 일본에서도 큰 논란을 빚었지만, 극 중 아이들의 잔혹한 행동에는 실제로 당시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집단따돌림이나 학원폭력 등의 현실이 반영돼 있었다. 이 작품의 의의는 아이들을 마냥 순수하고 연약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내면이 있고 격렬하게 갈등하는 존재로 그린 현실주의적 시각에 있다.
한국판 ‘여왕의 교실’에서 이러한 특징은 더 두드러진다. 첫 회부터 하나와 남자친구의 키스 신이라는 파격적인 오프닝을 보여줬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작품은 아이들의 당돌하고 공고한 세계를 먼저 제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처럼 공고한 세계가 있음에도 교사나 학부모들은 아이를 보호하거나 계도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
마여진은 그런 아이들에게 더 이상 지질대지 말고 어리광은 그만 부리라며 독설을 날리는 유일한 인물이다. 부임 첫날부터 아이들을 시련으로 몰고 가는 그의 행동은 분명 ‘나쁜 교사’의 전형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마여진은 아이들에게 성장 촉진제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자신보다 큰 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동구(천보근)에게 “도망치지만 말고 그들의 비겁함에 맞서 싸우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반 아이들을 감시하던 나리(이영유)에게 그것이 나리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자각시키는 마여진의 행동은, 아이들에게 누군가의 등 뒤에 숨기보다 스스로 벽을 뛰어넘는 법을 일깨워준다. 아이들은 마여진이라는 거대한 벽을 통해 어둡고 약한 내면을 발견하고 쓰러지면서도, 결국엔 같은 상처를 지닌 친구들의 손을 잡으며 차츰 성장해간다.
이런 측면에서 “아이들에게 배울 것은 없다”고 한 고현정의 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쩌면 중요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라거나 아이들을 순수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 실은 그들의 본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도 어른처럼 복잡한 내면과 어둠, 욕망을 지닌 존재다. ‘여왕의 교실’이 그려내는 아이들의 성장은 바로 그 새로운 시선에서 출발하기에 더욱 큰 울림을 지닌다.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일까


김선영은…
텐아시아, 경향신문, 한겨레21 등의 매체에 칼럼을 기고 하고 있으며, MBC, KBS, SBS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에서 드라마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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