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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고 싶다”

이외수 혼외 아들 단독 인터뷰

글·진혜린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13.06.17 16:27:00

5월 6일자 ‘시사IN’에 이외수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3월 30일, 혼외 아들 양육비 소송에 관한 언론의 첫 보도가 있은 후 가진 첫 공식 인터뷰였다. 기사는 4월 29일 양육비 소송을 조정위원회의 조정으로 합의한 후 ‘법원에서도 지금까지 이외수가 양육비를 지급한 것을 인정했다.
아들을 배척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내용이 보도된 후 여성동아는 이외수의 혼외 아들을 낳은 오모(56) 씨와 그의 아들 오모(26) 군을 그들이 살고 있는 경주에서 만났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고사하던 오씨는 ‘시사IN’ 보도를 접하고 ‘최소한의 해명’을 하고 싶지만 여전히 인터뷰는 부담스럽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고 싶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버지의 번호가 제 휴대전화 화면에 뜨더군요. 최근 들어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알았기 때문에 번호만 보고도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전화를 받으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많은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어요. 고민하는 동안 전화벨이 끊기더라고요. 그리고 곧바로 방 건너에서 어머니의 전화벨 소리가 들렸을 때 저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기회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게 됐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시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때 깨달았죠. 아버지는 제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제가 보고 싶어서 전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재판을 빨리 끝내려고 전화하셨다는 것을. 그걸 깨달았을 때,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소리 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아버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 기억하는 한 자신의 인생에서 딱 한 번 주어졌던 기회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 아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도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어린 시절, 진로 문제로 어머니와 의견 충돌이 생길 때면, 사무치게 아버지가 그리웠다고 했다.
“아버지가 옆에 계셨다면 나를 이해해주셨겠지, 내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아버지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목소리조차 들을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것은 TV뿐이었고,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트위터가 전부였다. 그래도 아버지를 존경했다.
“예전부터 집에 책이 참 많았어요. 그중에 아버지 책도 있었죠. 어린 나이에 ‘사부님 싸부님’ 같은 책을 읽을 때,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것이 저에게는 많은 영향을 끼쳤고, 아버지를 롤 모델로 생각하게 됐죠.”
아들이 갖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없다는 것에 대한 박탈감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를 닮았기 때문에,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아버지의 빈자리가 컸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창작에 대한 욕구가 강했어요. 어머니는 현실적으로 돈벌이가 가능한 직업을 갖기를 원하셨고요. 결국 원하던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지 못했을 때, 아버지의 빈자리가 꿈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가 계셨다면 제가 돈벌이가 가능할 만큼의 기반을 이룰 때까지 도와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금전적인 도움이 아니더라도 아버지 또한 창작을 하고 계시니까 저의 창작 욕구를 이해해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만화가를 꿈꾸던 그가 고등학교 애니메이션학과 진학을 목전에 두고 어머니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을 때 ‘아버지가 계셨더라면’이란 생각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단 두 개인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모습이었으니, 꿈이 좌절될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나는 이렇게 아버지가 보고 싶은데, 아버지도 날 보고 싶어 하실까? 지금의 나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까? 왜 날 찾지 않으실까?’ 하는 궁금증만 품고 살았을 때였다. 그리움보다 큰 것은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이 없었던 거죠. 아버지가 저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모를 정도면 얼마나 철이 없는 거예요(웃음).”
아들은 자신을 찾지 않은, 아니 못했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자신 또한 대중들에게는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 감성마을과 문학관에 덜컥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눌러 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지금 아버지의 가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아버지가 보고 싶은 것. 그것은 이미 장성한 오군의 입장에서도 혼란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처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를 상대로 양육비 소송을 청구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극구 만류했다.
“많이 반대했어요. 제 일임에도 제가 통제할 수 없어지니까요. 이런 일이 터지면 아버지를 아예 못 만나게 될까봐 절대 하지 말라고 했죠. 막상 소송을 하고 나서는 어떻게든 아버지와 연락을 주고받게 되겠구나 하는 기대도 있었어요. 결국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소송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나니까 소송하는 게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간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면서 어머니가 왜 소송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하게 됐거든요.”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고 싶다”

오군과 이외수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오군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낚시도 가는 등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소송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출생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말하자면 언론에 공개돼 대중의 질타를 받았던 부분에 관한 것들이었다. 특히 ‘입양’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어머니 오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했죠. 그래서 구김살 없이 키우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원망할 수 있는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죠. 그렇다고 아이가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품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것은 그쪽 가족에게도 저희 가족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다행히 아이가 자라면서 학교 선생님한테 ‘아버지가 없는데도 그늘 없이 밝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죠.”
오씨가 아들에게 ‘아버지는 네가 태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털어놓은 것도 오군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라고 했다.
“아이가 아버지에 대해 너무 좋게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헛된 기대를 가지게 될까봐 두려웠어요. 뭔가를 바라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처음으로 ‘널 낳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라는 거였어요.”



아들 장성 후 소송한 까닭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없는 셈 쳐라’고 했던 오씨. 왜 이미 아들이 장성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양육비 청구 소송’을 제기했던 것일까?
오씨는 이 부분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아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번에 오씨는 그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차마 아들에게도 하지 못했던, 그 말의 속뜻을 기자에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 제 탓이에요. 제 자신이 너무 바보였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외수 씨를 만나고 있을 때, 저에게는 그 사람이 절대적인 존재였어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고요. 결국에는 아주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거죠. 하라면 하라는 대로 끌려가기만 했던 거예요. 지금 돌아봐도 그 시절의 제가 너무 바보 같고 미워요. 제 인생을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다가 아들의 정당한 권리까지 챙겨주지 못한 거죠.”
오씨는 거듭 이외수에 대한 원망도 없고, 이외수를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고 했다. 단지 당시에는 자신이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던 아들의 권리를 뒤늦게나마 찾아주고 싶었던 거다. 어찌 보면 ‘양육비’는 아이의 권리임과 동시에 양육권자의 권리다. 당연히 받아야 했던 아이와,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1984년 기자와 취재원으로 처음 만나 1986년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그의 삶은 이외수를 향해 수동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외수 또한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그 무렵 춘천집이 아니라 서울에서 오씨와 주로 지냈기 때문에 아이와도 함께 있었다’고 밝힌 것처럼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 넘게 이외수와 함께 ‘살다시피’했다. 다니던 잡지사도 그만둬야 했고, 다시 취직을 해도 계속 다닐 수 없었던 상황. 그러면서도 오씨는 경제적인 부담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받아들이고 벗어나려는 마음만 있었을 뿐, 벗어날 수 없다고 ‘포기’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그런 삶은 오군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반복됐다. 오면 오는가 보다, 가면 가는가 보다 하며 스스로 이외수라는 사람에게 속박돼 살았던 시간이라고 했다. 돌아보면 전적으로 이외수의 탓만으로 볼 수도, 오씨의 탓만으로 볼 수도 없는 일이건만, 결국엔 긴 세월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던 것은 오씨였다. 오군 또한 영문도 모른 채 ‘유명한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하지 못하며 긴 세월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오씨는 ‘오군을 친자로 인지해주고 그간 지급하지 않았던 양육비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청구했다고 말했다. 종합해보자면 ‘왜 그동안 양육비를 주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못 챙겨 받은 것을 이제야 청구한다’는 뜻이 된다. 오씨는 기자에게 여러 번 강조했다. ‘내가 바보 같아서 벌어진 일이다’라고.
하지만 막상 소송이 진행되자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의 예상은 소송을 청구하면 곧바로 연락이 와서 합의가 되는 것이었단다. 전화로나 혹은 만나서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에 소송까지 청구했지만 재판까지 갈 줄은 추호도 몰랐다고 했다. 실제 소장이 청구된 지 한 달 반가량 지났을 때, 이외수 측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합의를 논의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조금씩 합의금이 낮아졌고, 결국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금액이 제시되면서 서로의 감정만 상한 채 합의가 불발됐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고 싶다”

이외수와 오씨가 함께 지낼 때의 사진. 당시 이외수는 ‘산목’을 연재하고 있었지만 ‘산목’은 상권이 출판된 후 하권은 출판되지 않아 미완성작으로 남아 있다.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고 싶다”


이외수는 아들에게 소홀했을까?
오씨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재판이 진행되더라도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구걸하듯이 합의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3월 30일 한 일간지를 통해 사건은 만천하에 공개됐다. 그 후 취재진의 관심은 화천의 감성마을에 쏠렸고 그중 몇몇 언론사는 이외수의 아내 전모 씨와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오씨 또한 사건의 진상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전화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양육비 포기 각서’의 존재가 드러났다. 오씨는 ‘강압적으로 양육비 포기 각서를 썼다’는 내용과 ‘양육비 포기 각서를 쓰고 홀트아동복지에서 아이를 찾아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전씨는 오씨가 자진해서 양육비 포기 각서를 썼다고 말하면서 논란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사건은 진실 공방으로 치달았다. 이외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서로의 주장이 다를 때, 한쪽 주장만 믿고 다른 쪽을 조롱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가는 조만간 법이 가름해줄 것입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법은 ‘이외수가 그동안 양육비를 지급했는가’만 판가름해주었다. 4월 29일 양자가 합의한 법원 조정안 문구는 “원고(오모 씨)는 2005년 10월까지 원고와 피고 사이에 약속된 오모 군의 양육비를 피고(이외수 씨)가 지급하였음을 인정한다”였다. 오모 씨가 이외수에게 약속된 금액, 즉 받아야 할 금액을 다 받았다고 인정한 셈이었다.
처음 소송을 제기했을 때 오씨는 “내가 받은 돈은 양육비가 아닌 생활비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비록 강압에 못 이겨 쓴 거지만 어쨌든 양육비 포기 각서를 썼는데도 이외수가 돈을 보내왔기 때문에 생활비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돈을 받을 때마다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했다. 덧붙여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 많이 부족했지만 당시에는 ‘양육비를 받는 것’이 나와 아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었다”고 했다. 어쨌든 오씨의 계산은 그간 생활비인 줄 알고 받은 돈을 양육비로 감안하더라도 애초 받아야 했던 양육비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하지만 법정에서 조정안 문구를 작성하면서 오씨는 “자신이 양육비를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이외수를 ‘지금의 상황’에서 도와주는 일인 것 같아 인정하기로 양보했다”며 “여전히 내가 받아야 할 정당한 양육비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외수도 양육비를 아예 외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준 것”이라고 했다. 조정안을 통해 ‘양육비를 받은 것으로 인정’했던 오씨는 “이외수는 일시금으로 3천만원을 지급하고 2016년 4월까지 매월 1백만 원을 부양료 명목으로 지급하라”는 내용에 합의했다. 이외수 측은 받을 것 다 받았다고 인정한 사람에게 돈을 더 주는 셈이 됐다.
“최근 이외수 씨가 ‘시사IN’에 합의문을 공개하면서 ‘오씨가 요구한 돈은 합당하지 않다, 아이의 병원비부터 생활비까지 꾸준히 보내왔다’는 뜻을 밝혔더라고요. 이외수 씨는 저에게 돈을 보내주기도 했지만 몇 년간 돈을 보내주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때로는 생활비 명목으로, 때로는 동생 전세금에 보태 쓰라고 돈을 주기도 했죠. 그걸 양육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양육비로 보더라도 그게 제가 받아야 했던 양육비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거죠. 이외수 씨 측은 법정에서 지금껏 보내준 돈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거짓말도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제가 무슨 큰돈을 뜯어먹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처럼 그려지는 게 너무 속상해요.”
오씨는 ‘시사IN’의 인터뷰를 통해 이외수가 ‘자신이 아이에게 소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또다시 오씨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와 함께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길은 또다시 이외수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끝이 없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고, 진실은 우리 두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공인이니까 거짓말쟁이가 되면 안 되고 저는 그냥 일반 사람이니까 거짓말쟁이가 돼도 괜찮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사람 또한 상처받지 않고, 나 또한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다.
오씨는 이외수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해명하고 싶다고 했다.
특히 ‘이외수는 아이를 강제로 입양 기관에 맡겼다’는 논란에 대해 이외수 본인의 이렇다 할 해명 없이 당시의 홀트아동복지 입양 절차에 대해 “산모가 동의하고 상담사가 산모와의 상담을 거쳐서 입양에 대한 판단을 했다”라고 설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제가 아이를 낳기 이틀 전쯤 입원해 있을 때 상담사가 찾아왔던 기억은 나요. 저는 그냥 듣기만 했어요. 특히 입양동의서를 작성하지도 않았죠.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손에는 인주가 묻어 있었고 아이는 없었어요. 기사에서는 아이가 생후 이틀째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겨졌다고 보도됐지만 사실은 태어나자마자였죠. 임신 6개월 때부터 이외수 씨가 아이를 낳지 말라고 강요했을 때, 아이가 너무 커버린 상황이라 제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느껴졌죠. 그것은 임신 8개월이 될 때까지 이어졌어요. 홀트아동복지회에 전화를 걸 수도 없었어요. 퇴원하자마자 몸조리도 하지 못하고 이외수 씨와 여관방에서 지내야 했거든요. 미역국도 먹지 못했고요. 이렇게 표현하면 ‘강압적이었다’는 말이 조금 설명이 될까요?”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고 싶다”

이외수가 오씨를 모델로 그린 그림. 오씨는 당시 이외수에게 시와 그림을 여러 점 선물 받았다. 하지만 살림이 어려워도 이외수의 그림을 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군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이외수가 자신의 호적에 올리려고 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돌 무렵 자신의 호적에 올리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홀트아동복지회로 보내졌고 찾아오기까지 3개월이나 걸렸다. 아이를 찾아왔을 때는 이외수에게 여관방에서 입에 담지 못할 수모를 겪기도 했다. 호적에 올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정작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아무 말도 없었다”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
오군은 어머니의 지나온 세월 이야기를 담담히 들으며 어머니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입양동의서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기억을 착각할 수도 있어요. 누구나 그럴 수 있죠. 어머니나 아버지, 둘 중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둘 중 누군가는 기억을 착각하고 계신 걸 거예요. 그런 점에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특유의 위트 있는 어조로 본인에게는 가장 슬픈 이야기를 유쾌하게 이어나갔다. 본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사건과 본인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르고 살 뻔했던 일에 관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은 엇갈렸다.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오군의 마음은 어땠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가 유명한 분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아예 모른 척하고 살아라, 나를 생각하지 마라’라고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유명한 분이기 때문에 저를 쉽게 외면할 수 없었던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번 일 때문에 피해가 간 것이 안타깝고 죄송해요.”
오군은 적어도 이번 일로 인해 아버지의 작품 활동에 지장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때론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실망스럽다가도 마음속으로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고 했다.
“아버지가 살아오신 삶을 보면 아버지의 생각에 공감을 느낄 때가 많아요. 물론 제가 다른 방향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완벽히 그분이 옳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그동안 왜곡된 진실로 받아왔던 비난과 오해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렇게 아버지를 둘러싼 의혹을 해명하고 싶으신 마음도 이해가 돼요. 아버지가 꼭 그래야만 했다면 명백한 진실에 대한 해명도 하셔야 했다고 생각해요.”
오군이 궁금한 것은 그것일 터였다. 강제든 동의든 자신을 입양시키려고 했던 상황에 대한 아버지의 솔직한 고백. 그도 아니면 그냥 미안했다는 말 한마디라도. 비록 공개적이지는 않더라도, 자신에게 할 수 있었던 혹은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뭔가를 바란다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살면서 한 번은 뵙고 싶어요.”
멀리서 모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부터 한눈에 이외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큼 이외수를 닮아 있던 오군. 조목조목 닮았다기보다 풍겨오는 이미지가 비슷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가장 닮은 구석을 꼽으라면 걸음걸이였다. 서 있는 자세나 스르르 걷는 게 금방 이외수를 떠올리게 했다. 오씨는 아들이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것도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사실 두 모자를 만나기 전까지 큰 사건에 휘말려 있는 당사자가 풍기는 일반적인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울하고 어두운 어쩔 수 없는 분위기. 하지만 이 모자는 상황을 설명할 때는 진지했지만 분위기는 밝았다. 자신에게 닥친 슬픈 현실도 웃으면서 표현할 수 있는, 천성적인 밝음이 느껴졌다.
오군의 현재 직업은 만화가다. 오군은 “아직은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의 실력이 되지 않는다. 오늘 조금 더 성장하고 나면 어제 그린 그림이 부끄러워 그 그림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싶다”며 웃었다. 이어 “작은 사이트지만 작품을 연재한 지 2년 정도 됐고 이걸로 적은 돈이지만 돈벌이를 하는 작가다”라며 “내가 보는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주면서도 독자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있으면서도 완벽한 작품을 만드는 데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취재진과 헤어질 때까지 자신의 웹툰 제목을 알려주지 않았던 오군. 언젠가는 그의 작품을 아버지의 작품처럼 쉽게 만나볼 수 있는 날이 기다려졌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기필코 자신의 꿈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는 오군의 모습은 누군가의 젊은 시절과도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한편, 4월 16일 1차 공판때 판결이난 ‘친자인지(이외수의 호적에 오군을 등록하는 것)’는 아직도(5월 21일 기준) 등록절차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친자인지는 사건 당사자 2인이 해당 구청에 인지신고를 함으로써 효력을 갖는다.

여성동아 2013년 6월 5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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