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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는 철학자 승효상 비움과 나눔의 미학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 착한 건축에 선한 삶이 깃든다”

글·김명희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이로재 제공

입력 2013.01.17 10:41:00

건축가 승효상이 15년간 고(故) 김수근 문하를 거쳐 ‘빈자의 미학’을 선언하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집 수졸당을 지은 지 꼭 20년이 됐다. ‘집은 크고 건물은 화려해야 제맛’이라며 한껏 부풀었던 부동산 시장은 거품이 가라앉으며 초라한 잔해를 남겼다. 이제 건물은 재산의 척도가 아니며 비우고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는 승효상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집 짓는 철학자 승효상 비움과 나눔의 미학


건축가 승효상(60)의 사무실 이로재는 서울 대학로 오르막길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외관을 뒤덮고 있는 붉은색 코르텐(내후성 강판)은 우중충한 날씨 탓에 더 무겁게 느껴졌다. 철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내부로 들어가니 바깥 세상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유리로 분리된 공간들이 환한 조명 아래 따스하게 빛났다. 다시 좁고 어두운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자 승효상의 아지트가 나왔다. 트레이드마크 같은 검정색 카디건을 입은 반백의 그가 성직자처럼 인자한 얼굴로 맞아준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중세 고성의 으스스한 지하 세계를 상상하며 긴장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이렇게 짧은 동선에도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이야기를 담은 그는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이 발동했다.

유홍준 교수의 집 수졸당을 지어주고 받은 ‘이로재’ 현판
이 건물은 그의 사무실이자 살림집이다. 이로재라는 가호는 절친 유홍준 교수의 집 수졸당(守拙·바둑 초단의 별칭으로 ‘겨우 자기의 집이나 지킬 정도’라는 겸양이 담겨 있다)을 설계한 후 답례로 받은 것이다. 당시 유 교수는 부친과 살기 위해 부친의 퇴직금으로 서울 강남 학동에 주택을 지어달라고 그에게 의뢰했다. 건축가와 집주인이 ‘상호 믿음’ 아래 최소한의 땅에, 최소한의 돈으로 잘 지은 이 집은 아직까지도 주택 설계의 모범으로 통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집이 완공돼 입주하던 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도 세상에 나왔다. 이후 유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빚을 내 집을 지은 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잘돼서 대출금을 빨리 갚았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넉넉지 못한 형편이라 설계비를 제대로 주지 못했던 유 교수는 대신 승효상이 평소 탐내던 이로재 현판을 답례로 건넸다. ‘이로재(履露齋)’는 ‘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뜻으로 연로한 부친을 모시고 사는 가난한 선비가 아침마다 이슬을 밟고 아버지의 처소로 가 따뜻한 옷을 입혀드린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후 꼭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비움을 지키는 집이라는 수백당(守白堂)을 비롯해, 공간을 나누고 비움으로써 숨 쉴 수 있는 도시를 표현한 웰콤시티, 퇴촌주택,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 소석원, 한옥 구조의 고급 빌라 라온채, 절제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템플스테이센터 등 1백여 개의 삶을 담는 그릇 같은 공간들을 만들어냈다.

▼ 수졸당 지어주고 이로재 현판을 받은 일화가 재미있습니다. 당시는 두 분이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죠?
“유 교수가 집 지을 돈이 넉넉지 않아서 설계비조차 충분히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지, 내가 탐내던 현판을 주었죠. 이사 오던 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첫 권이 나왔고 이곳에 살면서 공전의 히트를 했으니, 그 집이 만복의 근원이 됐어요(웃음). 수졸당은 ‘빈자의 미학’을 선언하고 나서 처음 지은 집이고 거기서 얼마큼 왔나를 알 수 있는 기점이 되기 때문에 내게도 무척 의미가 있죠.”

집 짓는 철학자 승효상 비움과 나눔의 미학


▼ 수졸당은 건축학도들에게 교과서 같은 작품이라고 하던데, 지금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잘못한 것 천지라 부끄럽죠(웃음). 주택은 원래 보수적이라서 잘 바뀌지 않는데 한국의 주택은 한 차례 파행적으로 바뀌었어요. 경제 개발 열풍이 불어 가옥 구조가 바뀌면서 전통 가옥에 대한 개념이 무너졌죠. 그런데 새롭게 바뀐 서양 집은 우리 생활과 잘 맞지 않았어요. 외형은 서양식으로 짓더라도 공간적으로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살리자고 해서 지은 집이 수졸당입니다. 그런 의도는 충분히 살렸지만 개인적으로는 공간의 크기나 높이에 관한 아쉬움도 있고 ‘재료나 장식을 좀 더 버렸으면 색깔이 더 분명해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하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부모는 6·25 때 월남했고, 그런 까닭에 그는 부산의 산비탈 피난촌과 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 승효상은 화가나 성직자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좌절됐다. 대신 누나가 건축을 권유했다. 피난촌이라는 공간과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지금껏 그의 건축에 자양분이 되고 있다.

▼ 부산 피난민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건축을 하는 데 큰 자산이 됐다고 하던데,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판자촌에 살았는데, 우물과 화장실 하나를 공동으로 두고 7~8세대가 모여 사는 구조였어요. 아침마다 북새통을 이루고, 사람들이 일을 나가는 낮에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가 해 질 무렵 사람들이 돌아오면 밥 짓는 냄새, 땀 냄새, 웃음소리로 가득 차곤 했죠. 돌이켜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로 가득 찬, 정말 근사한 곳이었어요.”

▼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잘하셨던 모양입니다. ‘경남고 문과 1등은 문재인, 이과 1등은 승효상’(그와 문재인은 경남고 25회 동기다)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하하하. 재인이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과 1등이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겁니다. 진짜 1등 했던 친구가 들으면 섭섭해할 수도 있어요(웃음). 그저 4~5등 했던 것 같습니다.”

▼ 학창시절 술도 마시고 방황도 했다던데, 그럼에도 서울대 건축학과를 갈 실력이 됐다니 신기합니다.
“순전히 운이 좋았어요. 그게 참,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약 오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제가 시험을 잘 봐요(웃음). 심지어 건축사 시험을 볼 때 남들은 계산기를 갖고 들어가는데, 나는 그것도 몰라 1번부터 루트(√) 문제를 직접 계산해가며 풀다가 시간을 다 까먹었어요. 그래서 나머지 문제는 한 번호로 다 찍었는데도 합격했으니 운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죠.”

▼ 건축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나요.
“원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신학이나 미술을 전공하려고 했죠. 그런데 여섯 살 위 누님이 그림 잘 그리고 공부 잘하면 건축과에 진학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으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대학에 와서 그림 잘 그리는 게 건축에는 방해가 된다는 걸 알았어요. 건축이라는 건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를 연구하고 조직하는 것이기 때문에 손보다 마음이나 머리를 동원해야 합니다. 사람의 삶을 생각하지 않은 채 모양만 예쁘게 그려놓고 ‘이게 좋은 건축’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서는 안 돼요. 그런데 대부분은 그림만 잘 그리면 좋은 점수를 주죠. 친구들의 설계 숙제를 대신해주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다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 그런데 정작 본인은 공부를 안 했나 봐요. D, F학점이 수두룩해 대학 시절 별명이 ‘데프’였다고 하던데.
“군사독재 정권 하에 암울했던 시기라 상아탑 아래서 공부만 하는 것이 옳을까란 생각을 많이 했죠. 한번은 MIT에서 공부하고 갓 돌아온 선생님이 계셔서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목욕재계하고 수업에 들어갔는데, 건축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 나온 제도기를 소개하더라고요. 그래서 참다못해 ‘선생님 그게 우리한테 하실 이야기인가요’라고 소리치고 뛰쳐나왔죠. 그길로 학교를 안 나갔는데, 유신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결석이 의미가 없었어요. 당시는 시국도 어수선하고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도 안 됐기 때문에 오히려 교수님들이 빌미를 찾아서 학점을 올려주시고, 될 수 있으면 낙제를 안 시키려고 봐주기도 하고 그랬죠.”

어릴 적 피난촌, 금호동 달동네에서 깨친 건축의 본질

집 짓는 철학자 승효상 비움과 나눔의 미학


학창 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김희춘 교수의 추천으로 1974년 김수근 선생이 이끄는 건축사무소 ‘공간’에 들어갔다. 작고한 김수근 선생은 서울 계동의 공간 사옥,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경동교회, 서울법원종합청사 등의 걸작을 남긴 건축가로, 건축의 생명은 건물을 어떻게 예쁘게 짓느냐가 아니라 공간을 어떻게 아름답게 조직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주창했던 인물이다. ‘공간사랑’이라는 잡지를 통해 사물놀이, 공옥진, 김금화 등 전통문화와 문화인을 발굴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건축사무소 공간에서 건축의 본질을 배웠고, 건축가는 건축주의 시녀가 아니라 그 나름의 사회적 기능이 있다는 자부심도 깨쳤다.

▼ 김희춘 교수는 왜 그런 ‘문제아’를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김수근 선생께 추천했을까요.
“학교를 계속 안 나가다가 마지막 수업 날 기념으로 한 번 나갔는데 교수님이 동급생들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진로를 물어보고는 저는 그냥 지나치시더라고요. ‘아, 교수님이 나를 잊으셨구나’ 했는데 따로 방으로 불러 ‘자네는 김수근한테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감격이었죠. 당시 김수근 선생의 말 한마디가 한국 건축을 좌우할 때였으니까요. 그때 교수님이 왜 나를 김수근 선생께 추천했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업은 안 들어가도 건축 공부는 열심히 했어요. 학교 제도실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요.”

▼ 공간에서는 술 많이 마시고 밤 많이 새우기로 유명한 직원이었다고 하던데.
“김수근 선생은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분이었는데, 그 권위가 싫었어요. 그 카리스마를 깨려고 죽기 살기로 건축을 붙들고 싸웠죠. 입사 1년 동안은 거의 사무실 밖을 나오지 않았어요. 일이 끝나 시간이 빌 때는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았던 시간이었죠.”

사무실에서 그의 몰골은 늘 꾀죄죄했고, 월급날에는 외상 술값을 받으러 온 마담들이 줄을 섰다. 그런 그가 사무실에서 가장 인기 많았던 김수근 선생의 비서와 결혼한 건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반전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항쟁을 견디다 못해 유학을 결심하고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차, 우연히 길에서 만난 그녀에게 청혼을 했고, 거짓말처럼 그녀가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혼식을 오스트리아 빈 남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의 그림 같은 고성(古城)에서 했다. 가족과 친지 13명이 하객으로 참석한 가운데 여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한 신부가 주례를 맡았다. 결혼식을 올리던 날, 첫눈이 내렸다.

▼ 아내가 ‘왜 별 볼 일 없는 청년’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을까요. 여자들은 나쁜 남자한테 끌린다던데, 그런 심리가 아니었을까요.
“미친 듯이 일하거나, 아니면 술에 절어 있어 남자로서의 매력이 별로 없었을 텐데…(웃음). 어디가 좋았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아내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거죠. 동료들이 나는 아예 경쟁 상대로도 보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저 사람과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연애 상담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집 짓는 철학자 승효상 비움과 나눔의 미학

이로재에서 승효상의 사무실은 좁고 어두운 계단을 지나 으슥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그는 마치 성직자처럼 인자한 얼굴이다.



▼ 언감생심이던 아내와 유럽의 고성에서 영화 같은 결혼식을 올리셨으니 참 행복했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꿈같은 행복을 견디다 못해 폭음을 하는 바람에 식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중 길거리에서 쓰러졌죠. 그 바람에 신혼 첫날밤은 악몽이 됐고, 이후 저는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훈계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부부싸움은 생각도 못해봤어요. 아내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대등한 위치에 있는 남편들이 부러울 뿐이죠(웃음).”

▼ ‘빈자의 미학’이라는 건축 철학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김수근 선생 문하에서 15년 동안 있었는데, 1986년 그분이 돌아가시고 독립을 하려니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다가 우연히 서울 성동구 금호동 달동네를 지나게 됐어요. 어릴 때 내가 살았던 마을 구조와 흡사한데 거기 건축의 지혜가 다 담겨 있더군요. 가난했기에 오히려 나눠 쓰고 같이 살았던 달동네의 골목길이야말로 건축의 온갖 지혜가 응축된 곳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걸 내 건축의 화두로 삼게 된 거죠.”

▼ 가난한 사람은 집을 지을 땅도 돈도 없는데 ‘빈자의 미학’이라니,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물신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에 건축을 통해 자기 발언을 하겠다는 의미죠. 집은 물론 등기도 있고, 자식에게 물려주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돈으로 짓지만 옆집 사람도 그 집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죠. 돈이 있다고 다른 집보다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은 범죄 행위에 가깝습니다. 건축의 최고 가치는 공공성입니다. 자기 땅 안으로도 길을 내주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가 오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는 것, 그게 선하고 바른 건축입니다. 사회와 건축주의 의견이 다를 경우 ‘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설득하는 것이 건축가의 직능이고요.”

집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면서 완성해 가는 것
그런 탓에 처음 사무실을 열었을 땐 집 지으러 왔다가 욕하고 가는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 오래 굶기도 했다. 그 대신 건축의 공공성을 인식하고 오는 건축주에게는 몸이 부서져라 ‘봉사’한다. 요즘은 그의 성향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독립하려는 후배들에게는 10년 굶거나 버틸 돈이 있으면 나가라고 권한다.

▼ 김수근 선생님이 56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승 선생님도 어느덧 그 나이를 넘겼는데 스승을 뛰어넘었다는 생각이 드나요.
“선생님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저는 아직도 그 밑에서 ‘승 실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아쉬운 점은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들은 대부분 건축가가 일흔 즈음에 설계한 것들입니다. 삶에 대한 각성이나 깨달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김수근 선생께서 지금까지 계셨더라면 얼마나 큰 감동을 주셨을지, 건축뿐 아니라 지리멸렬한 문화계 전반에 큰 가르침을 주셨을 텐데, 그것만 생각하면 안타깝죠.”

▼ 최근의 경제 위기로 집에 대한 인식도 사는(買) 것에서 사는(生) 곳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좋은 집이란 어떤 집인가요.
“건축은 당대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면서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시간을 견딘 것은 추억이 쌓여 아름다워지죠. 대신 처음 세워져 익숙해질 때까지의 과정이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에펠탑과 샹젤리제 없는 파리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처음 생길 때는 흉물 취급을 받았죠. 모파상은 파리 어디에서나 눈에 들어오는 에펠탑이 보기 싫어 에펠탑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고 하고, 샹젤리제도 파리 시내를 바리캉으로 밀어놓은 것같이 흉측하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파리의 상징이 됐잖아요. 제가 주장하는 건 건물을 허물지 말고, 새로 짓지도 말고 오래된 집을 고쳐서 오래 살자, 새집보다 기억이 있는 집이 아름다우며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 같던 빌딩이며 아파트들이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다. 건물마다 쌓인 추억의 더께가 부동산 시세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잊고 살았던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승효상은 건축을 통해 세상을 선하게 깨우치는 성자다.

집 짓는 철학자 승효상 비움과 나눔의 미학

크고 화려한 건물 숲에서 절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승효상의 건축들. 1 대전대 30주년기념관 2 수백당 3 웰콤시티 4 사야원 5 수졸당 6 풀무원 로하스아카데미.



여성동아 2013년 1월 5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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