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세 베니스 총독의 주거지였던 두칼레 궁전 앞에서. 두칼레 궁전은 고딕·비잔틴·르네상스 양식이 어우러진 화려한 건축물이다.
여행은 현지의 삶을 본다는 면에서 그저 생활의 연장일 뿐이다. 나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좀 더 편하고 객관적이 될 수 있고 거꾸로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다시 말해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느낄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다면 단언컨대 정말 훌륭하게 다녀온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가족도 스위스 인터라켄의 한 야산 벤치에서 시내를 한참 내려다보고 돌아가던 백발의 할머니를 보고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삶을 반추하는 듯한 그 모습에 ‘우리도 저렇게 지나온 세월을 되새기며 미소 지을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봤다. 마침 벤치도 먼저 간 가족을 그리워하며 누군가가 기증한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서울(파리) 구경에 나선 한 프랑스인 가족을 만났다. 큰아이가 고등학생쯤 돼 보였는데 파리 관광이 처음이란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떠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다녀왔다는 것을 알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들떴던 그 아이 엄마의 순박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40대에 서울 구경이 처음이라니. 소녀처럼 행복해하는 순수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사실 평범한 가족에게 유럽 여행은 부담스럽다. 언어도 비용도 문제지만 한 달 남짓 온 가족이 집을 비우고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마침 내가 회사에 사표를 내고 새 사업을 준비하는 기간이었기에 초등학교 6학년, 2학년 두 아이를 결석시키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아마 아이가 고등학생이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지만 있으면 못할 것도 없다. 직장 연차를 활용하면 거의 한 달 정도 휴가를 낼 수 있다. 정 안 된다면 무급 휴가를 내도 될 일이다. “월급 한 달 안 나오면 가계가 휘청거리는데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5년이나 10년 단위 장기 적금을 들면 2천만~3천만원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1천7백만원에 영국,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을 32박 일정으로 다녀왔다. 나는 비용을 너무 아낀 나머지 아내에게 ‘이게 관광이냐, 극기훈련이지’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가끔 분위기 있는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에 들러 아내의 기분을 맞춰준다면 그런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2 큰딸이 피사의 사탑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3 베니스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아름다운 풍경. 4 에펠탑의 조명쇼.
세계 문화의 보고 박물관·미술관이 공짜인 런던
출발은 2009년 10월 19일. 첫 여행지 런던은 모든 것이 좋았지만 특히 박물관·미술관이 무료라는 사실이 고마웠다. 국립미술관, 대영박물관, 자연사박물관, 과학박물관 등이 모두 무료다. 대신 로비마다 기부함이 있었는데, 기부함에는 ‘무료 정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부를 기다립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우리도 가끔 기부함에 1유로(한화 약 1천4백원) 동전을 넣었다. 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배려다. 보통 12세 이하면 호텔에서 아침 식사도 무료고 지하철도 무료 또는 헐값이다. 런던 관광의 편리함은-파리 등 대도시도 마찬가지지만-지하철에서도 알 수 있다. 어디든 지하철로 편리하게 다닐 수 있다. 지하철 구조도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찾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지하철역마다 비치된 노선도 한 장이면 누구나 쉽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다만 문에 달린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리는 객차가 많다는 점만 잊지 않으면 된다.
아이들과 같이 간다면 자연사박물관과 과학박물관을 추천한다. 딸이 있다면 보석과 옷이 엄청난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도 좋다. 자연사박물관은 웅장하기 그지없다. 고래, 공룡의 뼈와 함께 온갖 희귀 생물 표본이 넘쳐난다. 관람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간다. 과학박물관 역시 체험 프로그램이 많아 아이들이 좋아한다. 세 박물관이 사이좋게 모여 있으니 시간을 잘 배분해 관람해보자.
런던 관광에서 유의할 것은 변화무쌍한 날씨다. 우리가 여행할 때가 10월 말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4일 동안 잠깐이라도 매일 비가 내렸다. 반소매나 긴소매 옷, 가벼운 외투 등 옷가지를 준비하고 우산도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한다. 버스로 다녀온 옥스퍼드는 그 고풍스러움에 압도됐다. 옥스퍼드가 왜 문·사·철에 강한지 알 수 있다. 그런 역사와 전통을 가진 건물에서 공부한다면 저절로 공부가 될 듯싶었다.
영국의 물가는 우려와 달리 그리 비싸지 않았다. 우리가 레바논 식당, 터키 식당 등 싼 곳을 찾아 다니고 저렴한 지하철비(정기권의 일종인 트래블카드를 사면 어른은 하루 5.6유로, 어린이 1유로)을 이용하며 무료로 박물관을 관람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내는 조금만 스쳐도 “ I ’m sorry”를 연발하는 영국 신사의 매너와 모든 면에서 어린이를 배려하는 영국의 정책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베르사유 정원을 자전거로 달리는 묘미, 파리
영국을 둘러본 후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넘어갔다. 듣던 대로 예술의 도시였다. 조각은 섬세하고 훌륭했고,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로댕 박물관,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명화, 조각들로 가득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도는 데 3, 4일은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루브르와 오르세를 반나절 만에 주파하는 관광객들이 대다수다. 그런다면 눈도장 찍는 것 외에 무슨 다른 의미가 있겠는가. 영국에서와 달리 파리에서는 플래시가 터져도 사진 촬영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노트르담 성당과 베르사유 궁전은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아름답다. 노트르담 성당 뒤편에 가면 놀이터가 하나 있다. 박물관 관람에 지쳐 있던 아이들이 놀이터를 보더니 반색했다. 놀이기구 중에 빙빙 도는 원판처럼 생긴 것이 있었는데 재미있어 보여 아이들에게 “돌려줄 테니 올라가라”고 했다. 너무 세게 돌려 첫째가 나가 떨어졌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고 아내가 캠코더로 녹화해 이후 두고두고 보면서 웃었다.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아이들은 관람만 하면 지겨워서 견디지 못한다. 우리 딸들도 루브르와 오르세를 자꾸 가니 나중에는 벤치에 앉아 자기들끼리 장난치며 놀았다. 여행 일정을 짤 때 아이들을 위한 일정을 반드시 끼워 넣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도 아이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자전거 타기를 꼽는다. 자전거 대여 요금은 1인당 6.5유로다. 시간이 꽤 걸리므로 1시간 이상 빌리는 것이 좋다. 우리 가족은 궁전보다 정원이 훨씬 아름다웠다고 이구동성이었다.
기차를 타고 둘러본 지베르니(모네의 집)와 오베르쉬르우아즈(고흐의 마을)도 좋았다. 어느 나라나 도시보다 시골이 훨씬 아름답고 인심도 후했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이런 기억으로 아내와 나는 나중에 여행하게 되면 렌터카로 비관광지만 둘러보자고 의기투합했다. 파리에서는 카르트오랑주(지하철·버스·국철 정기권으로 이를 구입하려면 사진이 필요하다)를 사면 편리하고 뮤지엄패스(박물관 등 문화 시설 정기권)를 사면 이익이다.
1 바르셀로나의 한 거리에서. 이곳에선 의자도 예술이다. 2 여행 중 머물렀던 숙소에서. 숙소를 저렴하게 구하려면 최소 여행 6개월 전부터 서둘러 알아보고 예약해야 한다.
아름답지만 춥고 불편했던 스위스
연휴로 인해 스위스행 기차표가 매진돼 파리에서 이틀 더 머물렀다. 이 때문에 일정에 차질을 빚어 취리히를 건너뛰고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호스텔 가족실을 잡았다. 하지만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난방비가 비싼 탓인지 숙소는 너무 추웠고 세탁기는 아예 없었다. 목욕탕도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음식을 데우려면 1층 식당으로 가서 전자레인지를 써야 했다. 여기서 숙소에 대한 팁 하나. 호텔은 깨끗하고 편하지만 숙박비와 음식 값이 비싸고, 호스텔은 약간 저렴하지만 편의시설이 부족해 불편하다. 관광지에서 기차로 한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는 싸고 좋은 호스텔이 많다. 민박은 한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과 한국인들끼리 여행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여행의 긴장감이 사라지므로 잘 생각해봐야 한다.
인터라켄에서는 융프라우요흐 꼭대기까지 철도를 깐 스위스인의 저력에 감탄했고 루체른에서는 유람선 탑승이 좋았다. 한 문구점에서 본 크리스마스카드는 디자인의 격이 달랐다. 아기자기한 손재주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야간열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야간열차는 경험상 한 번 정도 즐기는 게 좋다. 자꾸 타면 피곤해져 나중 일정에 도움이 안 된다.
3 아내와 딸들은 베르사유 정원에서 자전거를 탔던 것을 유럽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는다. 4 이탈리아 남부의 포지타노 해변.
관광지와 멀어질수록 인심 좋고 물가 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서는 빈 대학이 인상적이었다. 조그만 이 대학에서만 노벨상 수상자가 9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빈에는 클림트의 그림 ‘키스’가 소장된 벨베데레 궁전 등이 있어 특히 아내가 좋아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갈 때 쥐드반호프 역이 아닌 베스트반호프 역으로 갔다가 기겁을 하고 택시 탄 일은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2분만 늦었어도 하루를 날릴 뻔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인포메이션에서 우리의 요구 사항과 달리 엉뚱한 곳의 호스텔을 잡아줬고(그것도 유료로), 가게 간판이 명함만한 크기라 숙소를 찾느라 헤맸는데(그것도 비에 흠뻑 젖어), 중국인으로 보이는 가게 주인이 바로 옆집임에도 손가락으로 방향만 가르쳐줘 1시간 가까이 더 헤매야 했다. ‘next door’라고 한마디만 했어도 아내가 울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분하다.
더 큰 문제는 이 숙소가 빈대 소굴이었다는 점이다. 잡아도 잡아도 신기하게 이가 계속 나왔다. 나는 곤히 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밤새 빈대를 잡았다. 새벽 4시가 돼야 잠들었는데 깨서 보니 50군데쯤 물렸다. 아내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인한테 항의하니 2유로를 깎아줬다.
바티칸의 미켈란젤로와 베드로 성당은 압권이었다.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절대 권력의 힘이 느껴졌다. 참고로 바티칸만큼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기를 권한다. 피렌체와 피사의 사탑을 하루 만에 돌아보고 나폴리로 가 다시 소렌토와 포지타노 관광을 했다. 바다에 접한 하얗고 푸른 집들이 그림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관광지와 멀리 떨어질수록 물가가 싸고 인심이 좋았다. 아내는 이곳에 꼭 다시 와 2박3일쯤 묵고 싶다고 했다. 화석화된 사람들로 아이들이 흥미로워했던 폼페이를 거쳐 치키타베키아 항에서 페리를 타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지중해를 가르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바르셀로나에선 가우디라는 거장에 놀랐다. 성가족성당의 독창성이란. 마드리드로 갈 때 유레일패스가 만료된 걸 모르고 고속철을 탔다가 낭패를 보았다. 하지만 아내가 “예약을 해준 당신들도 책임이 있다”고 우겨 무사히 마드리드에 도착해 귀국길에 올랐다.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행은 그렇게 머리와 가슴으로 소화하기 벅찰 만큼 많은 것을 우리 가족에게 안겨줬다.
자꾸 떠오르는 여행의 추억이 아이들의 자산
여행이 아이들에게 준 선물은 넓어진 시야다. 여행으로 우리 가족은 세상에는 성당보다 훨씬 멋지고 큰 건물이 많다는 것과, 외국인이 사는 모습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큰아이는 외국인과 두려움 없이 영어로 대화를 하며 세계사 과목이 쉬워졌다고 한다. 미술책에 나오는 그림을 상당 부분 직접 봤다는 것도 자랑으로 간직하고 있다. 작은아이는 그림 솜씨가 많이 늘었다. 여러 미술관을 다니며 그림을 많이 보여준 것이 색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또 엄마나 아빠가 숙소를 잡을 때 흥정하고, 식당에서 음식을 시킬 때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을 보고, 영어는 저럴 때 필요하구나 하고 공부가 아닌 언어로서 영어를 접하게 해준 것도 보람이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 영어 듣기 공부에 열심이다.
가장 보람 있는 것은 아이들이 외국 여행을 자꾸 추억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본 곳이 행여 책이나 영화에 나오면 그때를 떠올리면서 웃는다. 아이들은 두고두고 이 여행을 회상하면서 아빠와 엄마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이들이 힘들 때마다 버틸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가족이라는 안식처 말이다. 여행 그 자체로 아이들에게 힘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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