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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생 사용설명서 열두 번째 | 우리시대 진정한 영웅

“누구라도 그 상황이라면 다 그리 했을끼라예”

6층에서 떨어진 아이 온몸으로 받은 대구 슈퍼맨 이준희

글 | 김유림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2012. 10. 15

모든 상황이 종료되기까지 불과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6층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아이. 아이 엄마의 비명을 듣고 쏜살같이 화단으로 달려간 남자는 3초 뒤 기적처럼 아이를 받았다. 대구의 용감한 시민, 이준희 씨의 잊지 못할 그날.

“누구라도 그 상황이라면 다 그리 했을끼라예”


“무식해야 용감하다고 하지 않습니꺼. 허허.”
6월 23일 아파트 6층에서 떨어진 아이를 온몸으로 받은 이준희(50) 씨의 말이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사고 앞에 어떤 계산도 필요 없었다. 오로지 ‘저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사건 당일, 이씨는 고3 수험생인 아들을 학교까지 데려다주려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 문을 열려는 순간 ‘꺅~’ 하는 비명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90도 방향으로 돌리자 옆 동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여섯 살배기 남자아이였다. 그 순간 이씨의 발은 이미 아이의 예상 낙하 지점인 화단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아이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아이는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하면서 아이의 두 다리가 이씨의 배를 가격했지만 이씨는 아이가 튕겨져 나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아이를 잡고 옆으로 쓰러졌다. 당시 아이 엄마는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다 실수로 떨어진 옷가지를 주우러 1층에 내려와 있었다.
“아이와 제 인연이 보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가 화단으로 달려가 낙하 지점을 가늠하는 동안 아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난간을 한 번 더 잡더라고요. 몇 초였지만 그렇게 시간을 끌어줘서 아이를 안전하게 받을 수 있었어요. 만약 아이가 잘못됐다면 저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을 겁니다. 아무 탈 없이 회복해준 아이에게 오히려 고맙죠.”
이씨의 품으로 떨어진 아이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이씨는 아이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박을 확인했다. 다행히 맥박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둘이 함께 넘어지면서 흙바닥에 까인 상처 때문에 아이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에서 피가 조금 묻어났지만, 가벼운 찰과상이었다. 아이 엄마가 오열하며 달려오자 이씨는 주민들에게 아이 엄마를 꽉 붙잡아달라고 소리쳤다. 아이에게 또 다른 충격이 가해질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주민들도 한마음이 돼 상황을 수습했다. 한 주민이 베란다 창문으로 매트리스를 내려 보내 아이를 눕힐 수 있게 해주고, 찬물도 준비해줬다. 이씨가 조심스럽게 물로 얼굴을 마사지하자 의식을 잃었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깨어났다.
“사고 발생 후 4분 정도 흐르자 119 구조대와 경찰이 도착했어요. 그때의 4분이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4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가 추락하자마자 경비 아저씨한테 119를 불러달라고 소리쳤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까 구급차가 오기까지 5번이나 119에 전화를 걸었더라고요. 마음이 급하니까 거의 1분에 한 번씩 전화를 건 거죠(웃음). 아이가 병원으로 후송된 뒤에도 ‘제발 살아만 도, 살아만 도’ 하고 기도했어요.”
아이를 실은 구급차가 아파트 단지에서 벗어나자 함께 있던 주민들은 이씨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뒤늦게 집에서 나온 그의 아내와 아들도 직전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씨는 주민들에게 “박수 받을 일 아닙니데이” 이 한마디를 남기고 서둘러 가족들과 차에 올라 아들 학교로 향했다. 출발한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그제야 이씨에게도 서서히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운전하기 힘들 정도로 허리와 배 부위 통증이 심해졌다.
“많이 아프긴 했지만, 뭐 별일일까 싶어서 출근을 했어요. 하지만 사고 후 3시간 정도 지나니까 도저히 참지 못할 만큼 온몸이 아프더라고요. 결국 병원을 찾았고 그길로 입원했어요. 다음 날 보니까 배 전체가 시커멓게 멍이 들었더라고요. 아이가 떨어질 때 일차적으로 배로 받았는데 그 무게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누구라도 그 상황이라면 다 그리 했을끼라예”

평소에도 위험한 상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준희 씨. 남다른 의협심으로 상도 많이 받았다.



호텔 화재 현장에 뛰어든 의용소방대원의 25년 봉사 활동
실제로 6층 높이에서 떨어진 아이의 무게는 중력에 의해 1t에 가깝다. 만약 이씨가 아이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 이씨도 아이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준희 씨는 “우리 마누라도 잘했다고 칭찬해주면서 한편으로는 ‘누구 과부 만들 일 있나’ 하고 면박을 주더라”며 웃었다.
만약 이씨에게 이번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주저 없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날이 토요일 오전이라 아파트 단지 내에는 저 말고 아무도 없었어요. 누구라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면 바로 아이에게 달려갔을 겁니다.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씨는 열흘간의 병원 입원비도 자신이 부담했다. 아이의 부모가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이씨는 “돈 얘기 할 거면 앞으로 오지 말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 일로 금전적 포상이 있었으리라 지레짐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준희 씨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아이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동안 이씨는 평소에도 남다른 의협심을 발휘해왔다. 2005년부터 5년 동안 의용소방대원(소방 업무를 보조하는 봉사 활동)으로 활동했고, 자연보호 민간단체에도 소속돼 있다. 얼마 전에는 라이온스 회원으로 ‘자랑스런 라이온 사자트로피’를 수상했으며 교통사고 목격자로 경찰서에 자진 출두해 피해자 증인을 서기도 했다. 또 대구 시내 유명 호텔에 불이 났을 때는 가던 길을 멈추고 현장으로 뛰어들어 우왕좌왕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날 이씨는 자신의 지갑을 털어 편의점에 있는 생수를 모조리 사와 화재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그간의 공적은 이씨가 25년 동안 운영하고 있는 섬유(원사)회사 한켠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봉사 활동으로 받은 여러 개의 표창장과 트로피가 그의 삶을 말해준다.
“그저 타고난 성격입니다. 하하. 누구한테 칭찬받자고 한 일들은 아니고, 그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자는 생각으로 한 행동들이에요. 사회정의라는 게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를 보면 달려가서 짐을 들어 드리는 것, 그런 사소한 것부터 행동으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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