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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름다움을 사랑한 신사임당

독일인 주부 유디트의 좀 다른 시선

기획 | 한여진 기자 글 | 유디트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2.10.02 15:28:00

평범한 아름다움을 사랑한 신사임당

신사임당의 그림이 보관돼 있는 오죽헌.



어느 금요일 저녁, 나는 강릉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참 바쁜 날이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 것 같았다. 주말 동안 먹을 것을 사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 옆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주부들도 나처럼 지친 것 같았다. 모두 말없이 멍한 표정으로 자기 앞에 있는 쇼핑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까지 유난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는 쇼핑카트를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시선이 가지와 오이에 향했다. 이어 할인된 가격으로 산 수박에 시선이 멈췄다. 수박의 녹색 무늬를 따라갔다. 수박을 계속 쳐다보다 갑자기 몇 년 전 오죽헌에서 본 신사임당의 그림이 생각났다. 신사임당이 그린 수박은 5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오니, 한국에서 이 수박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한다. 몇 년 전 오죽헌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신사임당의 그림에 반했다. 5백여 년 전에 그린 그림인데도 그림들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감동적이었다.

신사임당은 채소, 과일, 꽃을 즐겨 그렸다. 텃밭에 살고 있는 벌레들도 매력적으로 표현했다. 신사임당은 이런 식물과 동물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5백여년 전 신사임당이 느낀 아름다움이 오늘날에도 그림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죽헌에 처음 갔을 때, 나는 5백여 년 전 신사임당이 텃밭에서 식물과 벌레를 꼼꼼히 살펴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신사임당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신사임당이 그림에 담은 오이, 가지, 수박, 원추리, 잠자리를 사랑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순간 누구든 그 존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지친 상태로 마트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나의 쇼핑카트에 담긴 수박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 어렵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그림을 생각하면서 나도 할인된 가격으로 산 나의 수박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수박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내 생각에 신사임당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평범한 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긴 행군을 마친 군인들처럼 나와 다른 주부들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범한 아름다움을 사랑한 신사임당




평범한 아름다움을 사랑한 신사임당

수박, 가지, 꽃 등을 아름답게 표현한 신사임당의 작품.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또 다른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몇 년 전 어느 대학교에서 일했을 때 일이다. 아름다운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어느 여교수와 함께 교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캠퍼스를 산책하고 있었다. 캠퍼스에는 철쭉이 온통 하얗고 빨갛고 분홍빛으로 피어 있었다.
여교수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봄 날씨 참 좋죠?”
내가 대답했다. “맞아요. 철쭉이 정말 예쁘게 피었네요.”
여교수가 갑자기 이렇게 얘기했다. “아, 솔직히 말하면 저는 철쭉이 싫어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왜요? 예쁘지 않나요?”
여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철쭉은 너무 흔하고 싸요. 그래서 나는 철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철쭉이 예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연구실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여교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 연구실에 돌아와서도 계속 여교수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여교수는 ‘철쭉은 너무 흔하고 싸서 예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름다움이 가격이나 흔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주차장에서 다시 그 여교수와 마주쳤다.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여교수는 자신의 명품 가방을 고급 승용차 뒷자리에 던져 넣으면서 큰 소리로 인사했다. 여교수는 골프 연습하러 빨리 가야 한다고 말하며 빠른 속도로 학교 정문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강릉의 어느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나의 할인된 수박을 보면서 ‘몇 년 전 그 5월의 철쭉’을 떠올렸다. 5천원 지폐에 그려져 있어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신사임당의 수박을 그 여교수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만약 ‘신사임당의 너무도 평범한 수박’을 안다면 그림의 아름다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철쭉은 너무 흔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 그 여교수가 신사임당의 수박 그림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또다시 질문이 하나 생긴다. 만약 신사임당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어떤 분이었을까? 골프 연습을 마친 다음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해 가사도우미가 사다놓은 수박을 그림에 담고 있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의 평범한 수박’을 바라보며 주말에 다시 한 번 오죽헌에 가보기로 계획했다.

평범한 아름다움을 사랑한 신사임당


평범한 아름다움을 사랑한 신사임당


유디트(41) 씨는…
독일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유학 온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왔다. 현재는 강릉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강의를 나가면서 강원도 삼척에서 남편과 고양이 루이, 야옹이와 함께 살고 있다.



일러스트 | 한은선

여성동아 2012년 10월 5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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