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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새’ 김혜정 다시 부르는 희망가

어두운 바닷가 홀로 나는 새야~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홍중식 기자, 김혜정 제공

입력 2012.08.16 09:22:00

‘바다새’는 요즘 들어도 어깨가 들썩이는 신나는 노래. 하지만 이 노래를 부른 혼성 트리오 멤버 김혜정은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한 세월, 그의 삶은 신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며 숨죽여 울어야 했고, 두 번의 화재로 인한 경제적 고통도 컸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강한 엄마다. 아들을 위해 마이크를 고쳐 잡은 김혜정은 다시는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바다새’ 김혜정 다시 부르는 희망가


얼마 전까지 ‘개그콘서트’에 ‘위대한 유산’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개그맨 황현희가 나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문화를 우스꽝스럽게 소개하는 코너였다. 그 코너에서 황현희가 ‘바다새’를 소개한다면 이랬을 것이다. ‘35세 이상 공감 가능. 그 86년 강변가요제에서 동상 받은 노래 있었잖아. 어두운 바닷가 홀로 나는 새야로 시작하는. 그때 사람들이 다 그 노래 따라 부르고 그랬잖아. 그 노래 어디 갔어? 그 노래 부른 김혜정 어디 갔어?’
그 김혜정(45)을 지난 7월 중순, 서울 홍대 앞 한 카페에서 만났다. 커트 머리에 보이시한 모습이 여전한 그의 옆에는 혼성 트리오의 다른 두 멤버였던 이용찬, 김명호 대신 남편이자 작곡가, 매니저인 마봉진(45) 씨가 서 있었다. 아직도 서로를 ‘오빠야~’ ‘혜정아’라고 부르는 부부. 그 다정한 호칭에서 19년째 살을 비비고 살며 크고 작은 파도를 함께 넘어온 부부의 노련함이 느껴졌다.

어릴 적 별명은 조용필 동생 조용순, 가요제 동상 받고 “아쉬워서” 울다
부산 출신인 김혜정은 어릴 때 별명이 ‘조용필 동생 조용순’이었다. 학교 소풍이나 학예발표회에서 ‘기도하는~’ 하고 한 소절만 불러도 친구들이 다 옆으로 쓰러졌다. 그런 그의 꿈은 가요제에 나가서 상을 받고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때는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서 수상하는 게 가수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어요. 이문세, 이선희, 이상우 선배를 봐도 다 그렇잖아요. 대학 입시 공부도 가요제 나가려고 했어요(웃음). 그렇게 부산 경성대에 입학해 통기타 서클에 들었는데, 이용찬·김명호 선배가 강변가요제에 나가려고 굉장히 좋은 곡을 만들고 여자 멤버를 구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이거다’ 싶어 그길로 오디션을 보러 갔죠.”
그렇게 결성된 바다새는 1986년 제7회 강변가요제 본선에서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대상)와 도시의 그림자의 ‘이 어둠의 이 슬픔’(금상)에 이어 동상을 수상했다. 김혜정은 내심 기대가 컸던 터라 아쉬움도 컸다고 한다.
“거기까지 간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리허설 때도 그렇고 주변 반응이 너무 좋으니까 점점 욕심이 나더라고요. 사회를 보던 이문세 선배가 ‘동상 바다새! ’라고 호명하는 순간 서러워서 펑펑 울었죠.”
가요제가 끝난 뒤 전국의 거리란 거리엔 ‘바다새’가 울려 퍼졌다. 그는 멤버들과 지방의 작은 다방부터 서울의 콘서트장까지 바쁘게 오가며 무대에 섰다.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용찬 씨가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김명호 씨도 다른 일을 시작하면서 활동이 흐지부지된 것이다.
갑자기 팀이 해체되자 그도 활동할 길이 막막해졌다. 고향인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여러 차례 컴백 기회를 노렸지만 여의치 않았다. 재기를 위해 제작자나 작곡가도 만나봤으나 ‘일단 같이 살자’는 둥 ‘트로트 메들리를 해보자’는 둥 얼토당토않은 제안에 상처만 받았다. 하도 답답해 점집을 찾기도 했다. 용하다는 점쟁이는 ‘노래는 마흔 넘어서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더 큰 실망만 안겼다. 그 무렵 친구의 소개로 남편 마씨를 만났다. 당시 마씨는 부산에서 음악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남편은 학창 시절 부산 경성대를 주름잡던 록밴드 보컬리스트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로 헤드뱅잉을 하면 반하지 않는 여학생이 없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김혜정과 마씨는 서로 전공은 달랐지만 ‘아, 록밴드 보컬!’ ‘아, 강변가요제 동상! ’ 하는 식으로 서로에 대해선 조금씩 알고 있었다. 둘은 만나자마자 대화가 술술 풀렸다. 밀고 당기고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해 만난 지 3개월 만인 1993년 12월 웨딩마치를 울렸다.

좀 늦되는 줄 알았던 순둥이 아들, 다섯 살 때 자폐 판정
신혼 초는 여느 부부들처럼 행복했고 맏아들 준영(18), 둘째 무영(14)이가 차례로 태어났다. 김혜정은 노래는 새카맣게 잊고 살림과 육아에만 매달렸지만 조금도 힘든 줄 몰랐다. 그런데 평범하던 결혼 생활에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왔다. 첫째 준영이가 여느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서너 살 때까지 말도 잘 안 하고, 얌전해서 어른들이 우리 준영이만 보면 ‘어이구 착하다, 순둥이’ 그랬어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서 늦되는 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혼자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하고 눈도 안 맞추고,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자폐라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저는 그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바다새’ 김혜정 다시 부르는 희망가

든든한 둘째 무영이(왼쪽)와 장애를 안고 있지만 더없이 착한 첫째 준영이(오른쪽)는 김혜정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처음에는 자폐에 대해 잘 몰랐기에 오히려 담담했다. 하지만 아들의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외계어 같은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고 돌발 행동을 했다.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는 기대감으로 초등학교 입학을 한 해 늦췄지만 소용없었다.
“발달장애아마다 집착하는 게 있는데 준영이는 돌아가는 것에 집착해서 선풍기 날개, 비행기 프로펠러, 자동차 바퀴 같은 것만 보면 자리를 떠나지 못했어요. 동네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바퀴를 다 들여다봐야지, 하나라도 놓치면 집에 안 가겠다고 떼를 쓰고, 나중엔 심지어 제 팔을 물어뜯거나 자해까지 했어요.”
그런 아들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미어졌다. 잠든 아들의 모습을 보며 ‘준영아, 니와 내만 조용히 사라지면 될 낀데’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발달장애아 엄마치고 우울증을 안 겪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무엇보다 ‘다른 엄마에게서 태어났더라면 안 그랬을 텐데,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아이가 이렇게 됐나’라는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었죠.”
실의에 빠져 있는 아내와 달리 남편은 씩씩했다. 그는 준영이가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를 뿐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의 자폐 사실을 감추거나 아이 자체를 숨기기도 하지만 그는 부끄러운 일도, 창피한 일도 아니라며 당당하게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런 남편을 보며 김씨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였다. 준영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생활은 여전히 고달팠다.
“초등학교 때 준영이가 특수반이 있는 일반 학교에 다녔어요. 오전 1교시는 특수반에서 공부하고, 2교시부터는 일반 학급에서 수업을 받았죠. 저는 준영이를 데리고 등교해 1교시 동안은 운동장에서 기다리다가 2교시부터는 준영이와 교실 맨 뒤에 앉아서 수업을 받았어요. 다른 친구들은 다 교과 내용을 따라가는데 준영이는 인지가 안 되니까 뒤에서 딴짓하고, 그러다가 돌발 행동을 하면 제가 아이를 살살 달래서 수업 내용과 상관없는 색칠 공부, 선 긋기 같은 걸 하고….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한테 참 미안해요. 엄마가 수업에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경 쓰였겠어요. 그래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셨어요. 친구들도 준영이 일이라면 서로 나서서 도와주고. 우리 준영이가 사람 복은 참 많은 것 같아요(웃음).”

‘바다새’ 김혜정 다시 부르는 희망가

시련을 딛고 다시 무대로 돌아온 김혜정.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노래에는 인생의 깊이가 묻어난다.



아들 때문에 아파트에 화재, 엄청난 빚 떠안아
부부는 힘들었지만 준영이가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6년 부부의 바람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사고가 났다. 당시 부부는 아파트 상가에서 음악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토요일 밤 11시, 수업을 끝내고 지인들과 모임을 갖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금 집에 불이 났습니다.”
처음엔 장난 전화인 줄 알았다. ‘실없는 사람’이라며 서둘러 끊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이었다.
“지금 큰불이 나서 집 앞에 소방차가 10대도 넘게 와 있습니다. 빨리 오세요.”
연로한 시어머니, 어찌할 바를 모를 준영이, 어린 무영이…, 김씨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울먹이며 시어머니와 아이들의 생사를 물었다. “연기에 질식해서 일단 병원으로 옮겼지만 무사할 것 같다”는 대답을 듣는 순간, 고맙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시어머니가 초인적인 힘으로 자는 아이들을 끌고 나오셨어요. 연기 때문에 앞도 안 보였을 텐데 일흔 살 노인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할머니가 아이들을 얼마나 잡아당겼는지, 옷이 다 찢어졌더라고요. 어머니가 경상도 토박이셔서 겉으론 무뚝뚝해도 자식, 손자 사랑은 정말 대단하시거든요.”

부부가 도착했을 때 집은 전소돼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살림살이 하나 건지지 못한 것은 물론, 위층 아래층까지 불이 번지고 그을어 있었다. 화재감식반이 출동해 원인 조사에 나섰다. 발화 지점은 양초를 넣어두던 장식장이었다. 평소 준영이는 촛불을 켜놓고 불빛이 장식장 창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노는 걸 좋아했다. 그대로 두면 위험할 것 같아 집 안에 있는 라이터를 모두 감춰뒀는데, 발화 지점 근처에서 라이터가 발견됐다. 준영이가 불을 낸 게 확실했다. 김씨 부부는 이웃에게 사과하고 복구 비용을 물어줬다. 그러느라 수억원의 빚을 졌다.
“큰 빚이 생기니까 작은 빚도 주렁주렁 늘더라고요. 음악 학원 운영만으로는 이자 갚기에도 벅찼어요.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남편 옷, 제 옷 한 벌 산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몇 년 전 국제시장에서 만원도 안 주고 산 거예요.”
그날 이후 김혜정은 전화번호부에서 음악 카페 번호를 찾아 무조건 전화를 걸었다.‘바다새를 불렀던 김혜정인데 거기서 노래할 수 있을까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잘나가던 시절의 자존심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남편도 수강생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음악 학원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그런데 2011년 누전으로 인해 또다시 화재가 발생했다. 가족의 생계 터전이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 우리 가족한테 일어난 거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속이 상해요.”
화재로 더는 학원을 계속할 수 없게 된 부부는 다른 데서 돌파구를 찾았다. 올봄 케이블 채널 tvN ‘슈퍼디바 2012’에 출연해 4강에 오른 것을 계기로 다시 가수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저는 주부 오디션이라 40~50대가 많을 줄 알았는데 전부 20~30대 새댁들이더라고요. 다들 얼굴도 예쁘고 창법도 세련된 데 반해 저는 너무 올드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보컬 트레이너도 ‘김혜정 씨, 부산에 너무 오래 계셨네요! ’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예쁘고 노래 잘하는 사람은 많잖아요. 결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진솔하게 다가가느냐인데, 그런 면에서는 경험 많은 제가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젠 음표 하나하나까지 진정성을 담아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세상의 모두를 보석으로 채워도 너 하나와 바꿀 건 나에겐 다시 없다. 내가 가진 것들 내가 가진 전부 모두 다 주고 싶다…’(김혜정의 노래 ‘모두 다 주고 싶다’ 중에서)

일찍 철든 둘째 무영이, 든든하지만 가슴 아파

‘바다새’ 김혜정 다시 부르는 희망가

김혜정과 작곡가인 남편 마봉진 씨. 남편은 한때 부산을 주름잡던 록밴드 보컬리스트였다.



남편 마봉진 씨는 아내의 컴백을 위해 노래를 만들었다. 곧 발매될 새 음반의 타이틀곡은 ‘바다새’처럼 신나는 리듬에 희망적인 노랫말을 얹은 ‘일어나! ’. 얼마 전 김혜정이 부산지적장애인복지대회에서 처음 발표해 행사장을 울음바다로 만든 ‘모두 다 주고 싶다’는 부부가 준영이에게 바치는 노래다.
“한때는 준영이 때문에 힘든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준영이가 우리 부부에게 온 천사 같아요. 그 아이한테는 악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얼마나 좋은 기운을 많이 얻는지 몰라요. 준영이 눈을 5분만 마주 보고 있으면 영혼이 맑아지고 마음이 정화가 돼요.”
요즘 김혜정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지낸다. 김씨 부부는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서울 용답동에 반지하 전세방을 얻었다. 준영이는 얼마 전부터 그룹홈에서 지내며 사회에 적응하는 연습과 미래 직업을 위한 훈련을 받고 있다. 언제나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인 시어머니와 무영이는 부산 집을 지키고 있다. 김씨는 준영이도 준영이지만 일찍 철이 든 무영이를 보면 든든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엄마가 형 때문에 정신없는 줄 아니까 어릴 때부터 학교 갈 준비도 혼자 하고,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했어요. 형을 괴롭히는 친구가 있으면 찾아가서 혼내주기도 하고, 숫자 세는 법 같은 것도 가르쳐주고…. 준영이는 무영이가 잠시만 안 보여도 ‘무영이 어디 갔노?’ 하면서 두리번거려요. 요즘은 사춘기라 말수가 적어진 데다 떨어져 지내는 게 마음에 걸려 ‘무영아, 엄마 안 보고 싶나? 왜 전화도 안 하나’ 하고 물었더니 ‘가족끼리 그걸 일일이 말로 해야 하나? 다 마음으로 느끼는 거 아닌가?’ 그러더라고요. 무영이 말로는 자기가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이래요(웃음).”
마지막으로 김씨에게 바람을 물었더니 “열심히 일해서 형편이 나아지면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살고 싶고 바빠서 잠시 중단했던 봉사 활동도 계속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간의 시련이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가족만은 앗아가지 못했다. 남편은 준영이를 위한 노래를 만들고, 아내는 그 노래를 부르게 됐으니, 어쩌면 이 부부는 준영이 덕분에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준영이가 아빠, 엄마에게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장소협찬 | 커피스미스(02-3143-6740)

여성동아 2012년 8월 5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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