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등단 40년 여섯 살 순이로 돌아온 이경자

“24년 전 소설 ‘절반의 실패’는 절반의 성공”

글 | 이소리 시인·문학in 대표 사진 | 조영철 기자, 사계절 제공

2012. 06. 15

올해 2월 장편소설 ‘순이’로 민중문학상 본상을 받은 이경자 작가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왜곡된 가부장제와 남아선호 사상에 반기를 들었던 당찬 계집애, 결혼 후에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던 남편에게 이혼이란 카드로 맞섰던 드센 여자도 어느새 예순넷이 됐다.

등단 40년 여섯 살 순이로 돌아온 이경자


서울 올림픽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들썩들썩했던 1988년도 저물어가던 12월 들머리. 한국 문단에 예기치 못한 소동이 일어났다. 가정주부인 작가가 금줄이라도 친 듯 금기시되던 여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파헤친 소설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 날벼락 같은 소설집이 바로 이경자(64)가 쓴 ‘절반의 실패’다. 소설은 이듬해 KBS 2TV에서 드라마(김현준 감독)로 방영돼 우리 사회에 너울파도를 일으켰다. 이경진, 정한용, 강부자, 장용, 박혜숙, 김흥기, 이효춘, 김세윤, 한진희, 김자옥 등 당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연해 한국 여성들이 멍에처럼 지고 있는 고부 갈등과 혼수, 맞벌이 문제 등을 벌침처럼 쏘아댔다. 책은 순식간에 20만 부가 팔렸다.
‘절반의 실패’에 놀란 남자들의 눈이 쑤욱 튀어나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4년이 흘렀다. 박범신, 정호승과 나란히 올해 등단 40년을 맞은 이경자는 ‘절반의 실패’에 이어 ‘혼자 눈뜨는 아침’(80만 부)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고, 남편과 가정의 사슬에 얽매여 꼼짝달싹 못했던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 마음의 물꼬까지 새롭게 돌려놓았다. 그렇게 바뀐 물줄기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첫 성장소설 ‘순이’로 민중문학상 수상
‘계절의 여왕’ 5월을 입에 문 햇살이 꼬리를 가물거리면서도 마지막 몸부림처럼 더위를 부채질하는 날,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 창가에 앉아 넋 놓고 차림표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소리~’ 하며 반갑게 손을 내민다. 장편소설 ‘순이’로 올 2월 민중문학상 본상을 받은 이경자 작가다. 그날따라 안경 너머의 눈빛이 유난히 맑고 밝아서 소설 속 여섯 살 순이가 눈앞에 나타난 듯했다. 그는 안부 인사 같은 것은 생략하고 대뜸 “저녁때도 됐으니 맛난 거 먹어가면서 이야기할까?” 한다. 이경자는 시인 고정희(1991년 작고), 작가 윤정모·유시춘과 함께 문단 후배들 사이에서 누님으로 통한다. 그만큼 외모도, 목소리도, 행동도 시원시원하고 마음이 살갑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장편소설 ‘순이’로 이어졌다.
“저의 첫 성장소설입니다. 1945년에 갓 태어난 순이를 통해 그 당시 남아선호 사상과 미군정,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 등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제사 때 여자는 어떻게 소외되는가, 조부모님과 아버지는 딸 순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느님이 왜 아버지보다 더 무서운가, 천주교 신앙은 순이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미국은 천국(천주교)이라 생각하며 ‘앉은 자리에서 계속 땅을 파면 기와지붕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순이…. 소설 속 순이는 분단과 성장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죠.”
순이는 한국전쟁 직후 수복지구인 강원도 양양에서 자라는 소녀의 이름이고, 소설 ‘순이’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순이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여성 수난사다. 책 속 내용을 몇 줄만 슬쩍 들춰보자.
‘아버지는 무서웠다. 한번 화를 내면 집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어머니는 매를 맞아 눈두덩이 시퍼런 적이 많았고, 순이도 종아리에 붉고 푸르게 죽죽 금이 생긴 적이 있었다.’(12쪽)
‘심지어 내가 무슨 죄를 져서 저런 걸 낳았느냐, 저걸 낳고 미역국을 먹었으니 내가 사람이냐, 하고 욕에 욕을 치쌓아 나중엔 누가 욕을 먹는 건지, 자신이 누굴 욕하고 있는 건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52쪽)
‘할머니 인생에서 남편과 아들의 핀잔보다 자신을 더 주눅 들게 하는 건 없었다. 속으로 씨부랄 눔들, 하고 욕해보았자 할머니의 기가 살아나지는 않았다.’(233쪽)
“신부가 곧 하느님으로 보이는 천주교와 서부 개척 영화 등을 통해 미국에 대한 존경과 선망을 품고, 잿더미에서 사금파리를 캐서라도 살아야 했던 사람들, 폐허와 궁핍 속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정체성 혼란과 슬픔, 미래를 어린 순이의 눈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경자는 한국전쟁 때 세 살이었으니 어린 순이에게 작가 자신이 투영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소설에는 ‘마숩너(맛있니)’ ‘좋너(좋으냐)’와 같은 강원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온다. 이경자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양양은 이북이었다”라며 “강원도 이북은 함경도 원산어권이고 이남은 경상도어권”이라고 귀띔한다. 이경자는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단발머리 나풀거리던 여고 시절까지 살다 18세에 서울로 와 줄곧 지금까지 도시 생활을 했다. 탯줄이 묻혀 있는 양양 사투리도 다 잊었을 세월이다. 그런데 소설은 마치 1950년대 흑백 필름을 돌리듯 생생한 양양 사투리와 함께 한국전쟁 당시 순이 가족 3대에 걸친 이야기를 복원해낸다.

“소설을 위해 저는 취재부터 철저히 해요. ‘순이’는 제 고향 이야기니만큼 더더욱 선연하게 그려야 했죠. 다시 양양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제 어릴 적 기억을 더듬고,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을 만나 묻고, 공부도 많이 했지요.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쓰면서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세상을 보는 눈도 관대해졌고요. 순이는 제 자신이자 대한민국이기도 합니다.”
문득 여섯 살 순이가 자라 오늘날 작가 이경자로 거듭난 것만 같다. “순이는 대한민국이 겪은 슬픔이자 희망”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작가는 “그동안 소설집을 30여 권쯤 냈지만 ‘순이’ 표지가 제일 좋다”며 윤슬처럼 빛나는 눈웃음을 툭툭 굴린다. 표지 제목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썼다.
“글씨를 받으려고 저녁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신 선생님이 바쁜 일이 있다고 저를 만나주지도 않고 그냥 가버리셨어요. 속이 상해 인사동 길을 걷는데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쳐서 받은 글씨인데 책이 잘 안 팔린다고 글씨 값도 받지 않으셨어요.”
2010년 6월 끝자락에 나온 ‘순이’는 지금까지 3쇄를 찍었다. “이번 인터뷰 기사로 책이 더 팔리면 좋겠다”는 말 속에 신영복 선생에게 보란 듯이 글씨 값을 드리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화나면 주먹 올라가는 남편, 시댁에서도 소설 쓰는 며느리 싫어해



등단 40년 여섯 살 순이로 돌아온 이경자


이야기는 다시 ‘절반의 실패’로 돌아갔다. 작가는 대체 언제부터 여성이기에 억압당하는 사회, 여성을 ‘성’이라는 꼬리표로 바라보는 남성을 향해 반기를 들었을까.
“저는 어려서부터 꽤 잘난 아이여서 남자애들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학생회장을 했고, 양양여고 시절 숙명여대에서 주최한 전국 여고생 단편소설 공모에 ‘멎어버린 행진’으로 입상을 할 만큼 글 잘 쓰는 아이로 이름을 날렸어요. 그런데 집에만 가면 계집애라며 남동생과 차별을 하니 꼴통 짓을 할 수밖에 없었죠.”
딸은 나 몰라라 하고 아들에게만 새 옷을 사주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발심이 생기자 그때부터 반항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기어이 새 옷을 얻어 입고야 마는 게 이경자식 반항이었다.
“어릴 때부터 상상한 것을 노래나 춤,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쓰기를 선택한 것 같아요. 제가 결혼할 즈음 ‘중학생’이라는 잡지가 있었죠. 잡지 편집장이 조세희 선생님이셨는데, 제게 연재소설을 쓰라는 거예요. 소설을 연재하면서 결혼했어요. 신혼 때 남편 월급이 7만~8만원이었는데 제 원고료가 회당 3만원이었죠.”
결혼 생활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톤이 높아진다. 그는 26세인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확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9세에 결혼했다. “원고를 써서 번 돈으로 살림을 꾸려가며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데 남편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결혼 생활을 회고한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달라질 줄 알았는데 이건 어릴 때 부모님이 자신을 남동생과 차별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가슴이 턱 막혔다.
“시댁에서는 제가 소설 쓰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소설 나부랭이 쓴답시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남편은 화가 나면 저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마구 차기도 했죠. 그렇다고 저까지 남편을 때릴 수는 없잖아요. 그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죠.”
결국 2003년 이혼을 하고 지금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당시 그는 한 잡지에 이혼 사실을 털어놓으며 이렇게 썼다.
‘여자인 나를 남자의 말뚝에 고삐 매려고 아득바득 시달리는 어리석은 인생 다시는 살지 않으려 한다. 남자를 벗어던지자 비로소 내가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를 깊은 병에 들도록 한 분노는 남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학대한 것에 대한 분노라는 걸, 이제 깊이 깨달았다.’
‘절반의 실패’ 1부에 나오는 ‘고부 갈등-두 여자 이야기’와 3부 ‘폭력-맷집과 허깨비’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소설가란 언어로 일상을 그리는 것”이라며 “이야기를 잘못되게 그릴 수 없다”고 못 박는 그의 말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등단 40년 여섯 살 순이로 돌아온 이경자

“소설은 밥을 뜸 들일 때 잠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경자 작가. 그는 저녁 9시에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 8시 30분부터 오후 2시 정도까지 매일 글을 쓴다.



‘절반의 실패’ 성공이 가족법 개정 부추겨
“가정을 가진 여성은 돌봐야 하는 아이가 있고,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밥도 해야 하기 때문에 외박을 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외박하는 여성을 향한 시선이 매섭잖아요.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남자에겐 아주 관대하죠. 남편과 아내는 공동체로 가정을 이루는데 왜 그런 불평등이 존재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죠.”
이경자는 “이 차별의 근거가 무엇이냐? 조물주가 이렇게 만들었나? 아니다”라며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는 모든 차별이 제도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는 차별의 근원이라고 여긴 ‘친족상속법’(가족법)을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이 법이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더욱 화가 났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지금도 그 책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또 “지금의 가족법이 만들어지기까지 내 소설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라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실제로 1989년 이후 대폭 개정된 가족법은 호주제도 폐지와 친족 범위 결정에서 남녀평등 실현 등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낮았던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려 부부 중심의 평등한 가족제도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가정 안에 비민주적인 행태가 만연한데 어떻게 우리 사회가 민주화될 수 있겠어요. 제가 12개 상황을 설정해 연작소설 형태로 ‘절반의 실패’를 쓴 것도 이 때문이었죠. 고부 갈등, 맞벌이 아내, 폭력, 남편의 외도, 혼인빙자 간음, 매춘, 성의 소외(2꼭지), 이혼, 빈민 여성(3꼭지)이 그것이에요. 제가 이런 차별들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지만 이 세상에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도 깨달았죠.”
소설집 ‘절반의 실패’ 원고가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작품을 들고 발표할 지면을 찾았지만 그 어떤 잡지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문학잡지들은 이건 문학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할 수 없이 가족처럼 지내는 김창완 시인이 편집자로 있는 여성잡지에 게재를 부탁했다. 이렇게 여성지에 몇 회에 걸쳐 연재를 한 뒤 책으로 나오고 드라마로 만들어지자 난리가 났다. 마치 옷을 뒤집어 입고 나간 것처럼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당시 방글라데시, 보스턴, LA에서까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소설집 제목을 ‘절반의 실패’라고 붙인 까닭은 이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이 반반이니까 저 하늘의 절반도 여성의 것이라는 의미죠. 누가 누군가를 ‘압도’한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압도한다’ 이런 말은 활활 불태워버려야 하죠. 조화가 필요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권력인 까닭도, 권력은 조화가 아니라 남을 지배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가 그토록 애타게 꿈꾸던 ‘절반의 성공’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가 지금도 현재(성옥이네 집은 어디인가)나 과거(순이)에 있었던 여성 문제를 줄기차게 소설로 쓰고 있는 이유다.
“아직도 남성 위주 문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요. 여성들은 몸값을 높이기 위해 S라인 몸매를 가꾸고 성형수술을 하죠. 남성들은 그런 여성을 보고 ‘저 애 잘빠졌다’고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몸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팔기 위해 칼을 대는 것이 자본주의가 지닌 깊은 슬픔이죠.”

“한국 문단은 지금도 나를 섬 취급”
“한국 문단에서 이경자는 아직도 섬 같은 존재예요. 주요 문예지들이 제게 원고 청탁을 하지 않거든요.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를 노골적으로 까발려서 얄밉다는 것이겠죠. 그뿐이 아니에요. 그만큼 화제를 뿌렸는데 ‘절반의 실패’는 번역 시도조차 되지 않았어요. ‘절반의 실패’가 한국사회의 치부를 너무 많이 드러내 번역돼 나가면 국가 망신이라고 하는 이도 있어요.”

등단 40년 여섯 살 순이로 돌아온 이경자


작가는 지금도 여성들이 안고 있는 ‘절반의 실패’를 ‘절반의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현장을 뛰어다니고 있다. ‘성평등 부부 리더십’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살기’ ‘여성주의의 모든 것’ 등 여성 문제와 관련된 강연 활동과, ‘여성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에서 남북여성 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다.
이경자는 요즘 ‘여성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장편소설 ‘성옥이네 집은 어디인가’를 탈고해 출판사에 넘겼다. 이 소설은 탈북자로 한국에 온 성옥이가 비로소 일본에서 조센징으로 살아야 했던 할아버지, 북한에서 귀국자라는 이름으로 이방인 취급을 받던 아버지가 느꼈을 소외감을 이해하게 되면서 할아버지의 숨결을 찾아 후쿠오카 탄광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성옥이네 집은 어디인가’는 ‘한국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 탈북한 여성 이야기죠. 주인공 성옥이를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에 걸쳐진 비극과 지배 이데올로기 등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이러한 지배 권력의 모순이 선량한 한 인간을 어떻게 찢어발기나, 그것이 핵심이죠. 성옥이는 자본주의가 뭔지,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한국으로 와서 그저 열심히 살아보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에게 탈북자라는 족쇄를 채웠어요.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그는 “한동안 성옥이에게 미쳐 있었다”며 “이제 나이가 좀 드니까 밥(소설)을 어떻게 해야 맛있게 지을 수 있는지 알 것 같다”고도 했다. 탈북이라는 무거운 이슈를 연애 스토리로 풀었다는 말에 소설의 전개 과정이 궁금해지는데 “주인공 성옥의 연애 상대는 건축가”라는 귀띔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도스토옙스키에 푹 빠졌다. 그 가운데 1868년에 발표한 ‘백치’를 마음에 새겨두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에 대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마음씨가 곱고 때 묻지 않은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이경자는 소설 속 백치가 되고 싶고, ‘백치’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곱고 때 묻지 않은 인간’이야말로 작가가 그토록 바라던 차별에서 벗어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요즘 도학이나 명리학, 선사시대 예술을 담은 책들을 자주 읽는다. 여성 문제에 머물지 않고 ‘백치’와 같이 인간의 근본을 탐구하는 대작이 나오리라 기대한다.
“소설은 밥을 뜸 들일 때 잠깐 쓸 수 있는 게 아니죠. 밥 뜸을 들일 땐 방도 쓸고 뜨개질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소설은 그렇게 안 돼요. 소설을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시간은 필요해요. 그 시간 동안 아무런 간섭이 없어야 해요. 이건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노동의 특수성이죠. 소설을 쓰려고 일단 자리에 앉으면 집에 아무리 급히 필요한 것이 있어도 장을 보러 가서는 안 되죠. 저는 저녁 9시쯤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 6시에 일어나 밥을 하고, 딸 출근을 시킨 뒤 8시 30분쯤 자리에 앉아 소설을 써요. 그러다 12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글쓰기를 끝내고 그 다음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죠. 오후나 밤에 소설을 쓰면 긴장되고 흥분돼서 그 다음 날까지도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에요. 빨래는 꼭 손빨래를 하죠. 세탁기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운동 때문에 그렇게 해요.”
그에게 요즘 작가들이 SNS와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SNS를 잘 모르기도 하지만 아예 하지 않는다”며 “SNS는 상대를 지엽적으로 슬쩍 건드리다가 마치 그게 전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스마트폰 속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대신 그는 자주 걸으며 진짜 세상을 만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일부러 목적지를 두세 정거장 남겨놓고 내려서 걷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사람살이를 느껴보고 싶어서다. 천생 작가임에 틀림없다.
한 시대 여성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작가에게 이번 대선에서 여야 관계없이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지 물었다.
“저는 대통령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고생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생한 사람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거든요.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해요. ‘차별’을 싫어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그런 대통령이 나오면 우리 사회가 한층 더 빛나지 않겠어요?”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가 곧 여성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 이경자. 그가 바라는 대통령은 여성성을 생활화하고 평화, 평등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이는 곧 작가가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차별’을 염두에 둔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여성은 자기가 여성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왜 그럴까. “여성 속에는 그 어떤 영롱한 보석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보물을 찾는 것에 희망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란다.
“난자 속에도 남성성이 있고, 정자 속에도 여성성이 있어요. 이러한 음양의 조화가 깨지면 모든 것이 다 깨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음양이 있어요. 이것이 곧 모든 문명의 뿌리랍니다.”


등단 40년 여섯 살 순이로 돌아온 이경자


작가 이경자는 1948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양양여고에 다닐 때 숙명여자대학교 주최 전국 여고생 단편소설 공모에 ‘멎어버린 행진’으로 입상했다.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확인’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8년 여성 문제를 적나라하게 그린 소설집 ‘절반의 실패’로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주요 작품으로 ‘할미소에서 생긴 일’ ‘절반의 실패’ ‘꼽추네 사랑’ ‘사랑과 상처’ ‘情(정)은 늙지도 않아’ ‘계화’ ‘천 개의 아침’ ‘빨래터’ ‘혼자 눈뜨는 아침’ 등이 있으며, 산문집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 ‘남자를 묻는다’ 등이 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