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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길에서 야생을 찾는 여행”

캐나다 누카 섬 트레킹 떠난 생태학자 탁광일

글 | 김현미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탁광일 제공

입력 2012.05.31 16:12:00

탁광일 박사는 야생의 바다와 원시 숲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캐나다 서해안의 누카 섬을 네 차례(2002, 2004, 2005, 2011년) 방문한 뒤 ‘죽은 나무가 없는 숲은 아름답지 않다’라는 여행기를 펴냈다. 이를 통해 그는 단순한 하이킹이 아닌 ‘특별한 미적 체험’으로서 여행의 의미를 알려준다.
“길 없는 길에서 야생을 찾는 여행”

새벽 5시 무렵, 가문비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숲 안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은 알 수 없는 성스러움과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손자와 함께 길을 걷고 있던 할아버지가 나무에 붙은 매미를 발견하고 손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리치며 말했다.
“얘야, 이리 와 나무에 붙은 이 멋진 매미를 봐라!”
손자가 다가와서 매미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얘야, 그런데 어쩌면 저렇게 꼼짝도 않고 있니!”
그러자 손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마,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그럴 거예요!”(탁광일 ‘죽은 나무가 없는 숲은 아름답지 않다’에서)
일본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라는데 남 일 같지 않다. 한국 청소년의 20%가 게임중독에 빠질 고위험군에 속한다고 한다. 실내 공간도 부족해 가상공간 속에서 하루의 상당 부분을 보내다 보니 현대인들은 대부분 ‘자연결핍증’에 걸렸다. 자연결핍증은 자연을 느끼지 못하는 ‘자연불감증’을 넘어 자연을 두려워하는 ‘자연공포증’으로 이어진다. 생태학자 탁광일(58) 박사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1999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세 자매를 나무에서 놀게 한 아버지에게 1천 달러의 벌금을 부과한 사건이 있었어요. 공원 측은 나무에 올라타는 행위가 공원 규정을 어긴 불법행위라며 벌금을 매긴 것인데,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노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며 오히려 권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공원 당국이 나무 타는 행위를 불법화한 이유는 사고가 났을 때 책임 소재를 놓고 발생할 수 있는 분쟁 등을 우려해 예방 차원에서 한 것이죠. 결국 여론은 안전에 무게를 두고 공원 측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아이들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셈입니다.”
탁 박사는 자연결핍증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을 불결하고, 위험하고, 무질서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성인이 돼 자연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면 거리낌 없이 자연 파괴나 무차별적 개발을 감행하게 된다고 말한다. 환경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연을 보호하자’와 같은 구호가 아니라 생명체를 사랑하는 마음 즉 ‘바이오필리아(Biophilia)’를 길러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바이오필리아는 생명체들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음미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려면 일단 가상현실이 아닌 진짜 자연과 만나야 한다.

누카 섬의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남부 도시 밴쿠버와 마주한 밴쿠버 섬은 남한 면적의 3분의 1에 이르는 큰 섬으로 여러 개의 부속 도서를 거느리고 있다. 밴쿠버 섬 서쪽 누카 만에 있는 작은 섬 누카도 그중 하나다. 18세기 말 밴쿠버 섬 서해안은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된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이곳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제멋대로 작명을 하고 자신들이 다녀갔다는 표식을 남기기에 바빴다. 1778년 영국의 전설적인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두 척의 탐험선을 이끌고 누카 만에 들어왔다. 부서진 돛대를 수리하고 식량과 식수를 보충하러 정박한 쿡 선장에게 누카 섬 남단 유쿠앗(프렌들리 코브)에 거주하던 모와찻 원주민 부족이 접근해왔다. 모와찻 부족은 쿡 일행에게 훈제 생선과 각종 동물 모피를 주고 대신 단추와 연장 등 금속 제품을 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교역은 탐험대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었다. 당시 해달 모피는 뛰어난 보온성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고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싼 값에 팔렸다. 이로 인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유럽 교역선들이 누카 만으로 몰려들어 해달이 멸종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처럼 누카 섬은 캐나다 서해안 원주민과 백인의 첫 접촉이 이루어진 곳이자 모피 교역의 중심지로 각광받았지만, 대부분 교역기지들이 백인들의 정착과 함께 도시화가 진행된 것과 달리 지금까지 원시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누카 섬의 숲은 해안 온대우림(온대지방이면서 비가 많이 내리는 해안 지역에 발달한 숲)으로, 탁 박사에 따르면 “침엽수로 이루어진 해안 온대우림의 숲은 공룡시대 이전의 오래된 지구의 모습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해안선을 따라 싯카 가문비나무가 자리 잡고, 숲 안쪽에는 웨스턴 헴록과 레드시더 등이 자라는데 대부분 수령이 7백~8백 년, 키가 60~80m에 이른다. 콜럼버스가 북미 대륙에 도착했을 때 이 나무들은 이미 2백 년 동안 이곳에 서 있었음을 상기하면, 누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길 없는 길을 걷다
누카 섬 서해안 트레킹은 밴쿠버 섬 무찻트랏 강(골드 리버)에서 수상비행기를 타고 누카 섬 루이 베이 라군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섬 남단을 돌아 남동쪽 유쿠앗까지 걷는 데 5~6일이 걸린다. 탁 박사는 “누카 섬 하이킹의 특별한 매력은 왼쪽엔 원시의 숲, 오른쪽엔 원시의 바다를 끼고 걷는 것”이라며 “전혀 다른 두 생태계인 숲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있는 모습은 마치 남녀가 만나 한몸이 된 것 같다”라고 운치 있게 묘사한다.
숲 속 길은 지형에 따라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며 쓰러진 나무를 타고 넘거나 기어서 지나가야 한다. 바닷가를 걸을 때는 따로 정해진 길이 없으니 걷고 싶은 대로 발길을 옮긴다. 그때 등산화 바닥을 통해 살아 있는 대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도시에서 포장된 길에 익숙한 사람들은 길이 없는 길을 걸으면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이킹의 묘미다. 한 가지 더. 하이킹의 매력은 주위 환경과 밀착된 상태에서 그곳의 경관과 지형이 뿜어내는 분위기를 음미하는 데 있다.

“길 없는 길에서 야생을 찾는 여행”

1 그물이 물속에 가라앉지 않도록 매달아 놓는 어구인 유리공. 1960년대 아시아 어부들이 쓰던 이 어구가 해류를 타고 1만km나 되는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 서쪽 누카 섬까지 흘러들어왔다. 숲 속에서 찾아낸 유리공을 배낭에 매고 가는 탁광일 박사. 2 연어가 산란을 하는 하천에서 체험 학습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 이처럼 야생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바이오필리아를 키울 수 있다. 3 바이오필리아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된다.





내 안의 야생성을 회복하다
하이킹 중 트레일 주변에 흑곰의 배설물이 무수히 널려 있고,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사슴, 늑대, 밍크의 발자국들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흑곰의 배설물들은 그날 아침 또는 전날 배출된 듯 신선했고, 해변에 남아 있는 발자국 역시 흑곰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지나간 듯 선명했다. 이들이 남긴 흔적만으로도 야생동물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들을 직접 보거나 마주치면 흥분은 더욱 더 커진다. 탁 박사는 20m도 안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서 늑대를 만나기도 했고, 두 마리 새끼를 거느리고 막 숲을 빠져나온 어미 사슴 무리와 눈이 마주쳐 몇 초간 숨을 멈추고 서 있었던 경험도 있다. 불과 몇 초의 시간이지만 그때 느낀 공포와 환희의 전율은 지금도 몸이 떨릴 정도다.
“2004년 여름방학 때 두 아이를 데리고 75km에 이르는 캐나다 웨스트코스트 트레일을 8일간 종주했어요. 이 길은 양 방향에서 하루에 각각 26명씩만 출입을 허용해 하루 종일 걸어야 한두 사람 만날까 말까입니다. 누카 섬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여행이 처음엔 무섭고 불편하고 거부감도 있죠. 하지만 그런 곳에 가야 비로소 야생의 날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요. 이것이 서울의 북한산 등반과 가장 큰 차이죠.”
탁 박사는 편안하게 거실에 앉아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99% 편집된 영화는 오히려 자연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요. 현실 속 동물은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눈앞에 머물지 않죠. 우연히 나타났다가 휙 하고 사라져버리니까요. 그럼에도 그 짧은 순간이 생생한 장면들로 가득한 다큐멘터리 영화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미적 체험을 가져다줍니다.”

“길 없는 길에서 야생을 찾는 여행”


죽은 나무가 없는 숲은 아름답지 않다
“진정한 숲은 죽은 나무와 살아 있는 나무가 함께 어울려 만들어진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숲의 생태를 알아야 한다. 누카 섬의 숲에는 죽은 나무들이 많다. 죽은 채 서 있는 나무, 줄기가 중간에 부러진 나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무, 오랜 세월 쓰러져 있어 땅속에 거의 파묻혀 형체만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 나무가 죽으면 쓸모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는 죽은 후에도 할 일이 많다. 나무들은 죽어가면서도 이끼나 고사리 같은 착생 식물들이 자신의 줄기나 가지에 붙어 자랄 수 있도록 한다. 독수리는 죽은 나무의 높은 가지에서 다음 사냥감을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개울가에서 자라던 나무가 쓰러지면 나무 주변에 낙엽, 가지 등 유기물들이 걸리면서 천연의 댐이 만들어지고 물살이 댐에 부딪혀 회전하면서 깊은 웅덩이가 생겨 이곳에서 어린 물고기들이 자란다. 누카 섬 숲에서는 죽음이 삶을 키우고(쓰러진 나무 위에 새 나무가 자란다), 삶이 죽음을 부둥켜안은(산 나무가 죽은 나무를 감싸며 자란다) 배양목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탁 박사는 배양목을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숲 속에서 배양목을 만나면 가슴이 떨리고 코끝이 찡해진다고.
목재 생산을 위해 상업적으로 조성한 숲에는 죽은 나무들이 없다. 죽은 나무들이 없는 숲에는 죽은 나무를 분해하는 곤충들이 살지 않는다. 곤충들이 없는 숲에는 이를 먹이로 살아가는 새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새들이 찾아오지 않는 숲은 적막하다. 적막한 숲 속에선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 죽은 나무가 없는 숲은 그래서 아름답지 않다.

미적 체험의 공간으로서 자연을 발견하다
벚꽃이 활짝 핀 화창한 봄날 벚나무 아래 서면 우리의 마음은 야릇해진다. 밤하늘을 초롱초롱 수놓은 별들을 보면 무한한 우주 속에서 지구와 나 자신의 존재가 새롭게 느껴지면서 가슴은 떨리고 팔뚝에는 굵은 소름이 돋아난다. 탁 박사는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의 신체가 일으키는 생리적 반응이라고 설명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산, 캠핑, 산책, 나들이, 야외 스포츠 활동 등을 통해 자연을 접하면서도 이를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미적 체험은 박물관이나 음악 공연장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숲은 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들어가서 직접 느껴야 할 대상이다. 자연은 시각적 아름다움만 지닌 것이 아니라, 예술품이나 유물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자발적, 오감적, 생태적, 신체역학적 아름다움을 지닌다. 또한 자연은 예술품이 가지지 못하는 태고성과 영원성의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을 체험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탁광일 박사는 책 한 권에 담긴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아름다움을 느끼면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어진다. 소유는 보호와 보전하려는 동기를 부여한다.”

생태학자 탁광일은…

“길 없는 길에서 야생을 찾는 여행”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대에 중동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32세에 뒤늦게 유학길에 올라 캐나다 레이크헤드 대학에서 임학 석사,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산림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밴쿠버 섬의 작은 마을 뱀필드의 온대우림에 반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School for Field Studies(온대우림과 생태계를 연구하기 위해 세운 현장 실습 학교) 캐나다 뱀필드 센터의 유일한 동양인 교수로 재직했다. 당시 탁 교수의 활동은 2003년 7월 KBS1TV ‘한민족 리포트’를 통해 알려졌다. 2004~2009년에 국민대 산림과학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지금은 밴쿠버 섬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의 청소년, 대학생, 교사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체험 중심의 환경 교육을 하는 기관인 Naturewalks Education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숲은 연어를 키우고 연어는 숲을 만든다’(넥서스), ‘숲과 연어가 내 아이를 키웠다’(뿌리깊은나무), ‘죽은 나무가 없는 숲은 아름답지 않다’(범우), ‘숲이 희망이다’(공저, 책씨) 등이 있다.

여성동아 2012년 6월 5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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