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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여, 힘든 일을 먼저 하라”

세계은행 총재 된 이민 1.5세대 김용의 성공 메시지

글 | 김유림 기자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 로이터 제공

입력 2012.05.15 16:14:00

한국계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이 4월 16일 세계은행 차기 총재로 선임됐다.
이로써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한국계 인사 두 명이 국제기구 수장이 됐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김용이 살아온 이야기.
“젊은이들이여, 힘든 일을 먼저 하라”


한국계 미국인 김용(53)이 지난 3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지구촌 개발도상국가들의 경제 개발을 지원하는 세계은행의 차기 총재로 지명됐다. 1944년 창설된 세계은행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계가 총재로 지명되자 김용 총재는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결국 그는 4월 16일 미국 워싱턴의 세계은행본부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 이웨알라 재무장관을 제치고 차기 총재 자리에 올랐다. 한국인의 위상과 투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김용 총재는 아시아계 최초로 아이비리그(다트머스대) 대학 총장에 이어 아시아계 최초의 세계은행 총재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그는 선임 직후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흐름에 맞춰 세계은행을 새롭게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세계은행이 지속가능한 성장, 이념보다는 실증적인 해결책 우선, 개발도상국들의 목소리 확대, 전문가와 경험 있는 인재 영입 등을 통해 강력한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노력할 것”이란 포부도 드러냈다.
그가 세계은행 총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동안 공중보건의로서 빈곤 국가를 상대로 펼친 활약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1987년 3명의 동료들과 함께 ‘파트너스 인 헬스’라는 조직을 결성한 김 총재는 빈곤 국가인 아이티에서 결핵 퇴치 의료운동을 벌여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1990년대 초까지 10만 명의 아이티 결핵 환자를 치료했고, 제약회사 등과 협상을 벌여 값은 매우 싸면서도 효능은 우수한 의약품들을 구입하는 능력도 보였다. 당시 미국에서 결핵 환자 한 명을 치료하는 데 드는 비용이 1만5천~2만 달러였지만, 김 총재는 아이티에서 결핵 환자들을 집에서 돌보며 1인당 1백50~2백 달러를 들여 그들을 질병으로부터 구했다.

결핵·에이즈 퇴치에 앞장선 영원한 봉사자

“젊은이들이여, 힘든 일을 먼저 하라”


이후 김용 총재는 파트너스 인 헬스를 떠나 2004년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에이즈 담당 국장으로서 주로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퇴치에 앞장섰다. 그는 당시 ‘3×5이니셔티브(계획)’를 내세웠다. 3백만 명의 에이즈 환자를 2005년까지 치료하겠다는 목표였다. 결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2004년 이 방안을 제시한 이후 올해까지 아프리카에서만 7백만 명의 에이즈 환자들이 치료를 받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처럼 지구촌 빈곤국들을 돌면서 결핵, 말라리아, 에이즈 퇴치에 앞장섰던 김 총재는 탁월한 의료 행정가로 인정받으며 2009년 3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아이비리그의 총장에 선출돼 큰 주목을 받았다. 2003년에는 맥아더 천재상을, 2005년에는 유에스 뉴스앤드월드 리포트가 선정한 ‘미국의 25대 리더’에 꼽히기도 했다. 또 2006년에는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포함돼 한국인으로서 위상을 떨쳤다.
1959년 12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간 김용 총재는 엄밀히 말하면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한인 이민 1.5세대다. 영문 이름은 JIM이고 한국 이름은 용으로 ‘짐 용 김’으로 불린다. 그가 처음 밟은 미국 땅은 내륙의 작은 백인 농촌 마을인 아이오와주 머스카틴. 그의 아버지 고(故) 김낙희 씨는 한국전쟁 당시 열일곱 살에 고향인 북한 남포에서 홀로 월남해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 머스카틴에 정책해 아이오와대학 치과 교수를 지냈다. 어머니는 아이오와대학에서 퇴계 연구로 철학박사를 받았다. 당시 머스카틴에는 김 총장 가족과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가족 등 아시아계로는 딱 두 집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김용 총재는 2009년 10월 뉴욕에서 열린 한인 커뮤니티 재단의 연례 만찬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소개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 뉴욕 유학 시절 한인 파티에 왔던 어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진 끝에 결혼했다고 전하며 어머니에 대해 “전쟁으로 어머니를 여읜 뒤 동생들을 돌보려고 마산에 머물며 당시 경기여고의 부산 피난 학교로 통학할 만큼 억척이었던 것 같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김용 총재는 어려서부터 여러모로 두각을 나타냈다. 머스카틴 고등학교에서 전교 회장을 지냈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미식축구팀의 쿼터백과 농구팀의 포인트가드로 활동했다. 아이오와주립대학에 입학했다가 아이비리그 브라운대학으로 전학해 졸업했고, 하버드대학에서 1991년 메디컬닥터 M.D와 1993년 인류학 박사 학위를 잇달아 받았다. 그는 하버드대학의 의학박사와 사회과학 박사 통합 학위 프로그램의 첫 입학자였다.
그가 오늘날 이처럼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부모의 남다른 교육관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케이블 방송 tvN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에 출연한 김용 총재는 아버지의 실질주의와 어머니의 인문학적 사상이 교육적인 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치과 의사는 다른 어떤 직업에 비해서도 실용적인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치아가 완전하게 고쳐지지 않으면 고통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수시로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지라고 조언하셨다”고 말했다.



실리주의자인 아버지, 철학박사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

“젊은이들이여, 힘든 일을 먼저 하라”

지난해 10월 소아과 의사인 아내 임윤숙 씨와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 초대 만찬에 참석한 김용 총재.



“아버지는 저희를 공부시키는 아주 재미있는 기술을 갖고 계셨어요. 금요일만 되면 오늘 해야 할 숙제는 주말로 미루지 말라고 하셨어요. 일요일 저녁에 숙제를 하려고 하면 ‘시간을 놓쳤다’면서 숙제를 하지 못하게 하셨죠(웃음).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주어진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어요. 한 번은 브라운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집에 잠깐 들렀을 때였는데, 공항에서 집까지 직접 차를 몰고 가던 아버지가 학교생활은 어떤지 물어보셨어요. 새롭고 흥미로운 것투성이라며 나중에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 차를 길가에 세우시고는 한국어로 ‘야 인마, 인턴십이나 다 끝내고 나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셨어요. 간단히 말하면 ‘넌 동양인이다. 그러니 철학을 공부해서 네 생각을 말한다고 해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할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셨죠.”
그때와 비교해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김 총재 역시 많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서 그는 “젊은이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힘든 일을 먼저 하고 확실한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김용 총재의 어머니는 그에게 아버지와는 또 다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공부만을 강요하지 않고 마틴 루터 킹, 간디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니’ ‘넌 어떤 사람인 것 같니’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니’ ‘세상이 어떻게 보이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이니’ 등을 물으며 다양한 사고를 하게끔 했다. 비록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세계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순조롭게 많은 것을 누렸고 얻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계를 위한 나의 책임은 뭘까’하는 고민을 많이 했고 제가 내린 결론은 나의 경쟁력인 의술과 인류학으로 세계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거였어요. 부모님과 함께 살 때 종종 ‘잘 먹고 잘살아라’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말인즉 ‘너는 반드시 성공하고 큰 집에서 살아야 한다’였어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큰 집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실제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 적은 없습니다. 오로지 해결해야 할 세상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지를 고민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사회정의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김 총재는 한국인에게도 다양한 방식의 구호를 호소한다. 한국 국민에게 큰 고통을 안겨줬던 외환위기 시대는 지나갔고 과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바뀐 만큼 가진 자들의 더 큰 나눔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 총재는 “여전히 경제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자선과 구호, 나눔에 대해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뤄져야 할 시점임은 분명하다. 만약 한국의 리더들과 이러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 역시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얘기한 “소수의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다.

“젊은이들이여, 힘든 일을 먼저 하라”

2009년 아시아인 최초로 아이비리그 다트머스대 총장으로 부임한 김용 총재.



“이제 충분히 성공했다” 말할 시점은 결코 오지 않을 것
1995년 서른일곱 늦은 나이에 보스턴 아동병원 소아과 의사인 임윤숙 씨와 결혼한 김 총재는 열한 살, 네 살배기 두 아들을 둔 늦깎이 아빠다. 그는 앞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부모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한다. 부모는 그에게 세상에 기여할 만한 훌륭한 기술을 지니기 위해 노력하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작가 등 그 무엇이 돼도 좋으니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연습하라는 조언을 들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김 총재는 “흔히들 훌륭한 작가는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작점에서는 재능이 중요하지만 그다음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느냐다”라고 주장한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책에는 어떤 분야든 진정한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심지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빌 게이츠라도 그 분야에 있어서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내용이 서술돼 있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너희들은 아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 우린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열정을 갖고 있다면 너희를 도울 것이다. 작가가 되든 아티스트가 되든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목표를 찾고 나면 천 시간, 만 시간을 기울이며 노력을 해라’라고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인생으로 꼽히는 김용 총재. 과연 그에게 성공의 정의는 어떤 것일까. 그는 “내게 성공이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겸손함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세상을 위해 일을 하기보다 저의 지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순간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날 겁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다 보면 책임감을 느끼기보다는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 쉬워요. 제게 ‘이제 충분히 성공했다’고 말하는 시점은 결코 오지 않을 겁니다. 제게 성공이란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친구가 되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이건 훨씬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웃음).”
4월 말에는 백지연이 김용 총재를 인터뷰하고 쓴 책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 마라’가 출간된다.

여성동아 2012년 5월 5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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