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 투표날 동반 외출을 한 심은하·지상욱 부부.
서울 여의도 한 오피스텔에 자리 잡은 지상욱씨(46)의 사무실 책꽂이에는 가족사진으로 만든 달력이 놓여 있다. 11월 모델은 앙증맞은 둘째 딸. 젖병을 들고 있는 걸 보니 꽤 오래된 사진인 것 같다. 달력을 한 장 넘겨보니 생일 파티 모습인지, 지씨와 두 딸(5, 6세), 그리고 아내 심은하(39)까지 네 식구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큰딸은 엄마를 닮아 갸름한 미인형 얼굴이고, 둘째는 아빠를 닮아 귀엽고 씩씩해 보였다. “아이들이 예쁘다”고 하자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가족 자랑을 하는 게 겸연쩍게 느껴졌던지 “건강하게 잘 자라야죠”라며 말을 아꼈다. 옆에는 국제아동구호기구 컴패션을 통해 인연을 맺은 인도네시아 소녀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나 보다”라고 물었더니 “김장훈씨나 션·정혜영 부부 정도 되면 몰라도, (내가 하는 기부는) 어디 가서 내놓고 말할 수준은 못 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보수주의의 대안, 시민사회 끌어안는 굿 소사이어티
지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심은하와 결혼할 무렵이었다. 당시 심은하는 은퇴를 했음에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됐다. 전격 결혼 발표의 상대인 지씨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지씨는 언론과 거리를 뒀다. 그는 결혼 후 자유선진당 대변인으로 활동하거나 지난해 6·2 총선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을 때도 아내를 내세워 홍보나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 심은하는 남편이 선거에 출마하면 함께 유세장을 돌며 표심을 잡는 여느 정치인의 아내와 달리 먼발치에서 남편의 유세 장면을 지켜보는 정도로 조용한 내조를 펼쳤다. 지씨는 아내의 유명세에 기대기보다 한 사람의 오롯한 정치인으로서 인정받고 싶었고, 이런 남편의 마음을 잘 알았던 심은하도 애써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 지씨가 정치적 경험과 성찰을 담아서 펴낸 책 ‘굿 소사이어티(Good Society·예지)’는 그런 진정성의 산물이다. 그는 여기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시민사회에 있다’고 진단했다. 도덕성, 리더십 등 다양한 측면에서 위기를 맞은 한국의 보수주의는 시민사회를 파트너 삼아 내부 한계를 극복하고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 시민사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건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면서부터다. 거리의 시민, 시장의 상인, 대학생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자신이 세상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통합해야 할 정치권이 왜 외면받는지를 생각하게 됐다는 것.
“지금 우리의 모습은 대기업이라는 거대 자본이 시장을 독점하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지역 이기주의로 변질되고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이 날로 심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시민적 가치나 덕목을 찾는 게 시급하다 생각해 시민사회에 관심을 갖게 됐죠.”
결론적으로 그가 말하는 ‘굿 소사이어티’는 사회,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도덕적으로 더 무장된 사회다. 그는 굿 소사이어티를 건물에 빗대 설명했다. 지씨는 연세대와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학사, 석사), 도쿄대에서 건축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백 층짜리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위에다 황금을 바르거나 치장하지 않는 이상 지상에 들어가는 공사비나 그걸 지탱하기 위해 들어가는 기초 공사비나 거의 비슷해요. 그래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죠. 사람들은 높이 솟은 화려한 건물만 보지만 사실 그 건물을 지탱하는 힘은 지하 컴컴한 곳에 있는 볼트, 너트, 콘크리트 조각 같은 것들이죠. 그런 것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탄탄하게 얽혀 있어야만 건물이 튼튼하게 버틸 수 있어요.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개인이나 단체, 조직 덕분에 건강하게 지탱될 수 있죠.”
그가 굿 소사이어티를 제안하는 이면에는 현재 보수 정치권이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내포돼 있다.
“원래 보수는 책임, 원칙, 신뢰, 정직 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보수 정치권은 그동안 공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의 풍요로운 삶에만 가치를 뒀고, 기득권의 이익만 대변했어요. 누구는 20:80의 사회라고 비판하지만, 사실 들춰보면 1:99의 사회가 아닙니까. 가진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계층 간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어요. 그래선 안 되죠.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를 되찾는 것입니다. 잘못된 경제 관행에 대해서는 칼을 들고, 편법과 탈법엔 엄정하게 대처하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따뜻한 가슴을 열어야 해요. 그러려면 기존 정치권이 구태를 벗어던지고 비움과 나눔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고 봅니다. 안철수씨가 급부상하는 사례로 보듯, 국민들은 쓰나미 정도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여의도 정치권은 목욕탕에서 물장구치는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가고 있으니 안타깝죠.”
지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그는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 선언을 했지만 당의 번복으로 무산됐다.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그는 불출마를 선택했다. 그는 “탈당이 무소속 출마의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치권을 향한 불신의 사단은 권력을 쥐려고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 불신의 대열에 서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수한 주부의 모습도 아름다운 아내
언젠가 일요일, 한 교회에서 심은하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부부는 예배를 본 뒤 아이들과 함께 교회 내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심은하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흰색 블라우스, 굽 없는 단화 차림이었다. 오랫동안 고수하던 긴 머리 대신 짧은 단발로 바꿔서인지, 여느 주부와 다름없이 평범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 날 곱게 차려입고 명품 핸드백을 들었던 건,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서는 걸 의식해서였을 수도 있다. 이날 심은하는 타조 가죽으로 만든 에르메스 버킨백을 들어 화제가 됐다.
“선거 전날 집사람이 ‘오빠, 이 가방 들어도 될까’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요. 집사람이 배우를 했던 사람이니까 거기에 맞는 물건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감추려고, 허름한 가방을 사서 들고 나오는 게 더 우스운 일이 아닐까요. 물론 나중에 그 가방이 저도 사줄 능력이 안 될 정도로 비싼 것임을 알고 놀라긴 했지만, 감추고 가리면서 쇼를 하고 살고 싶진 않아요. 남편으로서 많은 분들이 걱정하는 부분을 달게 받아들이고 더 조심스럽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내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날은 아내에게도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에 예쁘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평소에는 화장품 샘플 같은 것도 꼼꼼하게 챙기고 살림도 야무지게 하는 알뜰한 사람이에요.”
요즘 이들 부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녀 교육. 되도록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고 한다.
“대여섯 살 무렵이 가장 예쁘다고 하잖아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내가 연년생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고, 조금만 더 크면 부모보다 친구를 좋아한다고 하니 지금 많이 놀아줘야죠. 아이들이 책 읽는 것과 옛날이야기를 좋아해서 저녁에는 두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해주는데 웬만한 이야기는 다 했고, 이젠 창작을 해서 들려줘야 해요. 아내와 날마다 머리를 쥐어짜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웃음).”
지씨 부부는 2009년 신접살림을 차렸던 서초구 양재동을 떠나 남산 근처 빌라로 이사했다. 집 앞에는 여러 세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마당이 있어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다고 한다.
“아내와는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사교육을 시키는 것보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하게 하도록 하자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아직 아이들이 어떤 일에 재능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큰아이는 피아노는 별로고, 그림 그리기와 흙장난을 좋아하더라고요. 어제도 아이들과 마당에 나가서 노는데 하루 종일 땅을 파며 놀더라고요. 그 안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웃음), 아이들은 그렇게 놀아야죠.”
두 사람이 결혼할 무렵 지상욱씨의 부친 지성한 한성실업 회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회사에 메모를 남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지 회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메모였건만 그는 “아무래도 (기자가) 기다릴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고 말문을 연 뒤 아들 내외를 결혼시키게 된 배경, 며느리 심은하에 대한 생각과 바람 등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이를 통해 지 회장의 인품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내가 시부모에게 어떤 며느리냐고 묻자 지씨는 “부모님께 여쭤봐야지, 내가 답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웃으면서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대답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해요. 밥을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아이들도 자주 보여드리고, 자꾸 만나야 정이 쌓이잖아요. 부모님도 집사람이 배우를 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이해해주시고, 집사람도 부모님께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써요.”
정점에서 내려온 아내의 결단 존경
요즘에도 종종 인터넷엔 ‘심은하를 봤다’는 목격담이나 사진이 올라온다. 본인이나 가족들로선 여러모로 불편하고 활동에 제약도 많이 받을 것이다.
“은퇴한 지 꽤 오래됐는데 지금까지 잊지 않고 사랑해주시니 감사한 일이죠. 힘든 점은… 지금도 가끔 기자들이 집 밖에서 서성이곤 한다는 것…(웃음), 아내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또 저는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 받아들여야죠. 저도 열심히 살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돼보지는 못했는데 아내는 최고가 돼봤고, 정점의 순간에 그걸 움켜쥐려 하지 않고 내려놓았다는 점, 그 가치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는 점은 정말 저도 존경하는 부분이에요.”
아내의 내조 스타일에 불만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아내가 나를 믿고 이해를 많이 해준다. 또 어떻게 사람 마음이 다 같겠나, 내가 원하는 걸 상대방이 그대로 해주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라는 우문현답이 돌아온다.
종종 불거지는 심은하의 컴백설에 관해서는 “아내가 결정할 문제지만 지금 시점에서 컴백이 크게 의미 있다고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팬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의 행보는 어떨까. 이번의 책 출간이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넓히려는 포석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는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저는 그동안 목표와 전략을 정해놓고 살아오지 않았어요.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뿐이죠. 지금 당장은 저를 비우고 무엇으로 다시 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