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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이 있기에 늘 푸르렀던 삶

참 바보처럼 살았던 그들

글 | 김화성 동아일보 전문기자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1.12.15 16:42:00

10월18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강기석 대원이 사라졌다.
11월11일 김형일 대장과 장지명 대원 2명이 촐라체 북벽을 탐험하던 도중 추락사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인간은 왜 산에 오르는가’란 원초적 물음만 남아 있다.
도전이 있기에 늘 푸르렀던 삶

(작은 사진)베이스 캠프에서 튀김 요리를 하고 있는 신동민 대원.



난 원래 뉴질랜드 시골에서 벌을 치며 먹고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모험은 나처럼 평범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1914~86)와 나는 한 팀으로 1953년 5월29일 세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어떻게 올랐느냐고? 그건 간단하다. 한발 한발 걸어서 올라갔다. 에베레스트는 체력이 강한 사람이 오르는 게 아니라, 오르고 싶은 사람만이 오른다. 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왜 산에 오르는지 명확한 답을 하긴 어렵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거기에 오르기 위해 갈 뿐이다. 내 유골을 내 고향 뉴질랜드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달라. 나에게 영광을 안겨준 산엔 그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

2007년 5월 박영석 대장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르다 오희준·이현조 두 대원을 가슴에 묻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이 꺼졌다. 가슴속은 온통 까만 숯덩이였다. “나를 데려가지 왜 하필 그들인가?”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고,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켰다. 시도 때도 없이 꺼억꺼억 피울음을 울었다. ‘다시는 산에 가지 말자. 아예 영원히 은퇴해버리자.’ 수없이 되뇌었다. 몇 달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렴풋한 새벽에야 겨우 의자에 휴지처럼 구겨지곤 했다.
“나를 다시 일으켜세운 건 내 가슴속에 묻은 바로 그들이었다. 나는 여태껏 9명의 대원(셰르파 2명 포함)을 잃었다.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 이상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들은 늘 내 곁에 있었다. 난 그때까지 희준이, 현조와 같이 합숙하던 서울 성북구 월곡동 아파트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들이 나한테 말했다. 형이 주저앉으면, 우리도 같이 끝나는 거라고. 그렇다. 난 그들을 봐서라도 그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2009년 5월20일 결국 박영석은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 성공)
2011년 10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갔던 박영석 대장이 끝내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와 함께 월곡동 아파트에서 뒹굴며 살았던 신동민·강기석도 연락이 없다. 그들은 도대체 안나푸르나 어느 골짜기에서 ‘놀고 있는’ 걸까. 그 억센 산사나이들은 뭐가 그리 좋아서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수많은 산꾼들 영원히 품은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 사람들 말로 ‘풍요의 여신’이란 뜻이다. 높이는 8091m. 1950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중 처음으로 프랑스 모리스 에르조그와 루이 라슈날에게 첫 등정을 허락했다. 이후 14좌 중 가장 적은 1백60여 명만이 정상을 밟았다. 한국 원정대는 1994년 박정헌 대원을 시작으로 9명에 이른다.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4천5백여 명이 정상에 올랐다(2백여 명 사망).
안나푸르나는 오르기가 까다롭다. 등정 성공률이 11%대에 불과해 로체(8516m)에 이어 두 번째로 악명 높다. 여태껏 60여 명이 목숨을 잃어(한국 원정대 10여 명), 8000m 이상 봉우리 중 사망률이 가장 높다.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지현옥도 1994년 4월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됐다.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 길에 사고를 당했다. 안나푸르나 노멀 루트는 1950년 프랑스 원정대가 처음 오른 북면이다. 박영석 대장은 낙석과 눈사태로 악명 높은 남서벽에 새 루트를 뚫려다가 사고를 당했다.

무병을 앓듯 산병을 앓다
박영석 대장은 히말라야에 갔다가 서울 평지에 돌아오면 거의 자동차를 탔다. 걷는 게 지긋지긋하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히말라야에서 눈만 뜨면 걷고 또 걸었는데 서울에선 차 좀 타고 다니고 싶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답답해 미치겠다”며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끈적끈적하다며 머리를 감쌌다. 뱃속이 느끼해지고, 머리가 멍하고, 도무지 사는 것 같지 않다며 술을 퍼마셨다. 그건 박 대장이 슬슬 히말라야로 떠날 때가 됐다는 신호였다. 박 대장은 산에 있지 않으면 늘 불안해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뭔가 불편하다”며 “아무래도 도시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다. 박영석은 무당이 무병(巫病)을 앓듯이 산병(山病)을 앓았다. 그건 누구도 어쩔 수 없었다. 박 대장은 누가 말린다고 히말라야에 가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도전이 있기에 늘 푸르렀던 삶

1 올해 1월 그린 원정대를 이끌고 남극점을 밟은 박영석 대장. 2 박영석 원정대(신동민, 강기석 포함)는 2009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악명 높은 남서벽에 새 길을 뚫었다.





“산꾼이 산에 가는 것은 직장인들이 회사에 출퇴근하는 거나 똑같다. 일반인들이 직장을 그만두면 영 사는 맛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산에 못가면 머리에 쥐가 나 안절부절못한다. 산은 내 삶의 일부이다. 난 산으로 떠나기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하는 과정이 아주 좋다. 정신없이 바쁘지만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힘든 줄 모른다.”
박 대장은 건망증이 심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해 곧잘 오해도 받았다. 자기 집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 나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며 싱겁게 웃었다. 휴대전화는 10대 넘게 잃어버렸다. 아예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것도 포기해야 했다. 여기저기서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현금카드로 돈을 빼면 현금이나 카드 중 하나는 꼭 두고 나왔다. 무려 1천만원 가까이 날린 적도 있다. 모두가 고산병 때문이었다. 해발 5000m가 넘는 산에 오르면 뇌세포가 조금씩 파괴된다. 전문가들은 “고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면 한동안 정자가 형성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두세 달 정도 그런다고 들었다. 하지만 난 특이 체질인가 보다. 히말라야 정기를 받고 태어난 아들이 둘씩이나 있으니까(웃음). 사실 내 머리가 엉망인 건 맞다. 손가방도 목에 둘러매지 않으면 언제 잃어버릴지 모른다. 내 몸무게가 76kg쯤(174cm) 되는데 설산에 한번 올랐다가 내려오면 60kg으로 확 줄어든다. 아마 긴장과 스트레스 탓일 것이다.”

무사히 돌아오게만 해달라고 빈다

도전이 있기에 늘 푸르렀던 삶

카트만두 보우다 사원에서 실종자들을 기리는 라마제가 진행됐다.



박 대장은 1년에 7~8개월은 얼음구덩이에서 살았다. ‘히말라야→남극→베링해협→히말라야→북극→히말라야’식으로 끊임없이 얼음산을 찾았다. 서울에 돌아오면 다시 떠나기 위해 스폰서를 구하러 다녔다. 1996년 안나푸르나 등정 땐 시흥에 있던 31평 아파트까지 처분해버렸다. 집을 잡힌 건 헤아릴 수도 없고, 전세금을 뺀 적도 있었다. 그는 결혼 8년 만에 첫 월급을 가져다주었다. 부인이 한때 닭칼국수집을 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 그는 스물여섯 살 때부터 등반 대장을 맡아 히말라야 등정 34번에 19번 성공했다.
박 대장은 신에게 운명을 모두 내맡기고 살았다. 신에게 굳이 정상에 꼭 오르게 해달라고 빌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제발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등반은 집에서 시작해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빈다는 것이었다.
베이스캠프에 있으면 히말라야에서 죽은 대원들이 ‘소주 한잔하자’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느 땐 ‘나랑 같이 있어줘’ 하는 것 같기도 하다며 말을 잊었다. 그럴 땐 가슴이 먹먹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며 허탈해했다.
가끔 셰르파들도 속을 썩였다. 산소가 희박한 7000m 넘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박 대장 앞에서 시위를 했다. 그럴 땐 박 대장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산소가 희박해 뻑뻑 세게 빨아야 겨우 탔다. 몇 모금 빨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별들이 우르르 떴다. 그래도 시침 뚝,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하며 셰르파들을 휘어잡았다.
박 대장은 걸을 때마다 관절에서 소리가 났다. 왼쪽 눈 밑 얼굴뼈엔 쇠못을 3개나 박았다. 온몸이 등반 사고의 흔적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얼굴 쇠못은 1991년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남서 루트로 오르다가 100m 낭떠러지로 떨어져 생긴 흔적이다. 그때 마취도 하지 않고 철심을 박았다. 1993년 에베레스트에서 발을 헛디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적도 있다. 그때 20~30분 동안 어린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울었다. 1996년 봄 다울라기리(8167m)에서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하다가 얼음 다리에 배낭 끈이 걸리며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박 대장의 노래방 18번은 ‘바보처럼 살았군요’였다. 가끔 노래방에서 혼자 미친 듯이 불러댔다. 허리와 목을 뒤로 활처럼 제치고 피를 토하듯이 불렀다. 땀이 비 오듯 흘러도 아랑곳없었다. 언뜻 눈에 물기가 어리고 목이 멨다. 뭐가 그리 바보처럼 살았을까. 그는 참 외로운 사내였다. 그래서 그만큼 자유로웠다.
“저 흐르는 강물처럼/ 멋없이 멋없이 살았죠/ 흘러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김형일 대장 촐라체 원정대의 이루지 못한 꿈

도전이 있기에 늘 푸르렀던 삶

2011년 11월11일 김형일, 장지명 대원이 히말라야 촐라체 북벽에서 추락사 했다.



2009년 7월13일 오전 11시50분, 아웃도어 업체 K2 익스트림팀 김형일 대장, 민준영·김팔봉 대원은 파키스탄 서부 스팬틱 골든버그(7027m) 봉우리를 북서벽 신루트로 처음 올랐다. 걸린 시간은 딱 7일(하산 하루). 식량(아침-비스킷 2조각·코코아 1개, 점심-파워젤, 저녁-알파미)은 5일분밖에 없어서 이틀을 꼬박 굶었다. 장비는 8.1mm 더블로프(캠 1조), 너트 1조, 하켄 20여 개, 아이스 스크류 7개, 스노바 3개, 눈삽 1개가 전부. 베이스캠프는 4500m 지점에 설치하고 그다음부터는 비박으로 해결했다.
김형일 대장은 “벽의 길이(등반 고도 2100m)가 아래서 보는 것보다 훨씬 길었다. 고정 로프를 설치하지 않고 단숨에 올라야 하는데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민준영 대원은 “대원 3명이 돌아가면서 선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 대원은 곧바로 이어진 9월 직지원정대의 히말라야 히운출리(6441m) 북벽 신루트 개척에 참가했다가 실종됐다.
2011년 11월11일 오후 4시쯤 촐라체 원정대 김형일 대장과 장지명 대원 2명이 촐라체 북벽을 탐험하던 도중 추락사했다. 이들은 촐라체를 36시간 만에 왕복하겠다는 목표로 원정길에 나섰으나 8부 능선(약 5100m)에 올랐을 때 봉변을 당했다. 탐험대는 베이스캠프에서 정상을 공격할 때 텐트 없이 한 끼 식사 분량에 못 미치는 식량만을 준비한 채 목표에 도전했다. 이것은 10월18일 사고를 당한 박영석 대장처럼 정상에 오르기보다 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박영석 대장 실종 사고’가 발생하자 촐라체 탐험 일정을 바꿔 안나푸르나에서 박영석 대장의 1차 구조 활동에도 참여했다. 촐라체 북벽은 험준하기로 유명하며 2005년에는 촐라체 북벽을 탐험하던 박정헌 대장 등이 조난당했다가 5일 만에 구조되기도 했다.
김재봉 대한산악연맹 전무는 “히말라야 도전은 기업 후원과는 전혀 관계 없이 등반가의 의지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다. 돈을 줘도 안 가는 사람이 있고, 돈을 안 줘도 간다는 사람이 있다. 알피니즘 추구를 규제하는 것은 행복권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인간의 존엄성이 거론될 수밖에 없다. 산악연맹을 포함한 관련 단체들이 안전한 등반을 격려할 수는 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는 도전 열정을 규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김재수 대장은 “히말라야 등반은 관중도 심판도 없는 취미에 불과하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자기가 좋아서 계속 강행하는 도전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박용학 블랙야크 이사는 “대체로 후원 계약서에는 ‘고산 등반 때 후원하기로 한다’는 식의 일반적 문구가 들어간다. 산악인들이 간다고 하면 후원을 하는 것이지 후원을 조건으로 등반을 강요하거나 권유하는 경우는 없다. 어느 기업이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로 잡고 홍보를 하겠느냐”고 했다.
인간은 왜 산에 오르는가. 인간이 산꼭대기에 서는 순간, 산은 정복되는 것인가. 아니다. 파리가 잠시 황소 뿔에 앉았다고, 황소가 파리에게 정복된 것인가. 산에게 인간은 잠시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다.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다가 조난당한 단독 등반자들의 배낭 속에선 니체의 책이 흔히 발견된다. 니체의 ‘초인사상’이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초인은 바로 ‘도전과 탐험정신’을 먹고 큰다.
산에서 온 엽서

도전이 있기에 늘 푸르렀던 삶
2010년 7월 김형일 대장이 가셔브룸 5봉 등정에 앞서 필자 앞으로 보내온 엽서. 늘 죽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산꾼의 비장함이 담겨 있다. 원정대는 체력 저하로 정상을 500m 남기고 하산했지만 이들은 이듬해 다시 떠났다.

“서울을 떠나온 지 보름이 넘어 이곳 카라코람 산맥의 발토르 빙하 끝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하였습니다. 원정대의 여정은 히말라야 최난벽을 향한 거칠고 황량한 발걸음이었지만 대원 모두 모래사막과 낯설고 이질적인 문화에도 굴하지 않고 참된 산악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셔브룸 5봉을 바라보면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만큼 험난하고 위험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산을 향한 동경과 이상을 향한 열정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다짐해봅니다.” -발토르 빙하 가셔브룸 5봉 베이스캠프에서 원정대장 김형일


여성동아 2011년 12월 5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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