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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 원경선 원혜영 부자 유기농 인생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 돈보다 가치 있는 삶 실천으로 보여주신 아버지”

글 김명희 기자 사진 홍중식 기자 || ■ 장소협찬 신정주말농장(010-8356-7556)

입력 2010.09.15 16:24:00

원혜영 의원에게는 절대 고장나지 않는 든든한 인생 나침반이 있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너나없이 화학비료를 쓰던 시절, 비료와 농약은 ‘인간에게 독약’이라며 이 땅에 유기농을 정착시킨 아버지 원경선 선생이다.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아름다운 삶의 전형인 원경선 선생과 “그런 아버지가 참 좋았다”고 말하는 원혜영 의원 부자 이야기.
풀무원 원경선 원혜영 부자 유기농 인생


올해 아흔여섯, 갈라지고 주름진 피부는 이 땅을 닮았고 꼿꼿한 자세는 나무를 닮았다. 평생 겸손한 자세로 땅을 일궈온 이,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며 재산을 모두 내놓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 좋은 뜻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발 벗고 나서는 이. 원경선 옹은 그래서 ‘인간 상록수’라고 불린다.

현미와 유기농식 덕분에 아흔여섯에도 꼿꼿한 아버지
초록이 막바지 생명력을 내뿜는 여름의 끝, 원경선 선생과 아버지와는 다르지만 역시 한길을 걷고 있는 아들 원혜영 민주당 의원(59·경기도 부천 오정)을 만났다. 2년 전까지 농사를 지었다는 원 옹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기억력도 비상하고 유머감각도 젊은 사람 못지않다. 농사를 지으려면 억지로 지을 수도 있겠지만 몸이 전과 같지 않음을 느끼고 스스로 활동 속도를 늦추고 있다고 한다. 듣는 것이 좀 불편한데 예전에 귀를 다친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 옹이 질문을 잘 듣지 못할 땐 원 의원이 중간에서 ‘통역’을 했다. “아버지, 기자가 건강 비결이 뭐냐고 묻습니다~”
“현미식이 영향이 있지. 현미에는 백미에 없는 감마오리자놀이라는 성분이 있어요. 이게 뇌를 컨트롤해 머리를 맑게 해요. 현미를 많이 먹으면 기억력이 점점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웃음).”
원 의원이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한 가지 일화를 들려줬다.
“몇 해 전 아버지께서 허리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처음엔 의사들이 아흔 가까운 나이에 장시간 수술을 받는 건 위험하다며 말리셨어요. 그런데 막상 뼈 검사를 해보니 젊은 사람 못지않게 튼튼해서 수술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아마 아버지가 디스크 수술을 받은 환자 가운데 최고령일 겁니다.”
원 옹은 그 자체로 유기농이 인간에게 얼마나 좋은지를 보여주고 있다. 원 옹은 원래 평안도 빈농 출신이다. 어려서는 신앙심이 깊어 “주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성경 가르침을 따라 비가 오는데도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을 걷지 않아 아버지에게 혼난 적이 있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아껴 쓰고 남은 장학금을 졸업할 때 학교에 되돌려줄 정도로 강직했다. 청년 시절 우유배달부, 사진사, 인쇄소 사장, 건축업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한때는 돈도 꽤 벌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큰아들을 병으로 잃으면서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풀무원 원경선 원혜영 부자 유기농 인생


“큰돈을 만졌지만 못되게 번 것이라서 금방 다 나갔어. 그렇게 살아봐야 부질없다는 걸 알았지.”
이때부터 원 옹은 경기도 부천에 풀무원 농장을 세우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함께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풀무원이라는 이름은 쇠가 풀무질을 통해 철기구로 거듭나는 것처럼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풀무원에는 문도 담도 벽도 없었다. 고아원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아이, 장애아, 깡패, 누구에게나 든든한 집이 돼주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스스로 일해서 먹고 남은 것은 이웃과 나눈다”였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 군목이 오갈 데 없는 하우스보이들을 맡아주면 돈을 주겠노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아이들이 열심히 일하면 먹고살 수 있는데 내가 왜 돈을 받느냐’며 거절하셨어요.”
“돈을 받았으면 아이들이 엇나갔을지도 몰라. ‘저 사람은 돈 받고 우리를 봐주는 사람이니 우리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스스로 일을 해서 먹고살면 바른 사람이 돼.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어.”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안식처, 풀무원 공동체

풀무원 원경선 원혜영 부자 유기농 인생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으니 원 옹 부부와 7남매도 이들과 한방에서 자고 한솥밥을 먹었다. 농사일과 허드렛일도 똑같이 거들도록 시켰다. 2남5녀 중 셋째인 원 의원은 “언제나 삼촌, 형, 동생이 넘쳐났다. 그런 북적대는 생활이 좋기도 했지만 가끔은 ‘감자·고구마만 먹어도 좋으니 우리 가족끼리만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누이들이 아침에 학교 갈 때 교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갈아입을 곳이 없어 쩔쩔매는 걸 보면 안쓰러웠어요. 저희 형제들이 그런 불만이 다 조금씩은 있었겠지만 불편함 속에서도 옳은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풀무원을 거쳐간 사람은 수백, 수천 명을 넘는다. 대살림의 중심에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원 옹의 아내 지명희씨가 있었다.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결혼해 농장일은 물론 그 많은 사람의 빨래며 식사를 책임지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가족을 대하던 담대하면서도 따뜻한 아내. 자식들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네 아버지 가는 길이 바른 길인데 무엇이 힘드냐’고 말하던 강한 어머니. 지씨가 없었더라면 풀무원이라는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 옹이 지씨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졸업 후 상경, 우유배달부를 하면서 교회에 다닐 때였다. 지씨는 당시 배화여고를 졸업한 신식여성이었는데 원 옹의 신심에 반했다고 한다.
“그때 교회에 총각이 나 하나였고, 처녀는 지명희 하나였지. 우유배달을 끝내고 세종로 사거리에 서 있는데 안사람이 ‘지금 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거야. 그게 인연이 됐지.”
원 옹도 지씨를 마음에 둔 터였다. 그는 지씨에게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 자기한테 시집을 오면 얼마나 고생할 것인지 설명했다. 그래도 뜻이 변함없음을 확인한 뒤에 결혼했다. 주례를 맡은 목사는 “그러잖아도 중매를 서고 싶었는데 워낙 조건이 기울어 망설이고 있었다. 신부는 땅속에 있는 보배를 캐낸 것”이라며 두 사람을 축복했다고 한다.
조건 없는 결혼은 자식대에도 이어졌다. 7남매 중 다섯째인 혜덕씨가 풀무원 공동체에 함께 있던 김준권씨와 결혼한 것. 혜덕씨는 경기지역 예비고사 수석을 할 정도로 총명했는데 풀무질을 통해 훌륭한 농부로 거듭난 김씨에게 반했다. 주변에서는 기우는 결혼이라고 반대했지만 원 옹은 자신과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위를 두 손 들어 환영했다. 김준권씨는 현재 원 옹의 정신을 계승해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정농회 회장이다.
풀무원은 서로 다른 궤적의 사람들이 모인 만큼 바람 잘 날이 없었고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원 옹은 자신의 생각을 공동체 사람들에게 강요한 법이 없다.
“내 뜻이 이해가 안 가면 반문하게 하고 잘못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지. 우리 아이들 이야기라고 더 들어주는 법도 없었어.”
농장 초기 포도나무 농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비료를 구하지 못하면 농사를 망치게 생겼는데 관에서는 비료를 쌓아놓고도 도무지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웃돈을 주면 비료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옳지 않은 일이었다. 원 옹은 자신의 일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농사를 포기했겠지만 공동체의 일인지라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풀무원 원경선 원혜영 부자 유기농 인생

평생 나눔의 삶을 살아온 원경선 옹과 그런 아버지를 닮은 원혜영 의원.



“김종복이라는 형이 부정한 방법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며 아버지 뜻에 동의를 해줬어요. 뇌물을 주더라도 비료를 받아 포도농사를 지으면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니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옳은 게 좋은 거다’라는 아버지의 신념을 알아주는 형이 있어 너무나도 고마웠죠. 형님은 지금 진도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어요.”
원 옹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써서 농사를 짓는 일에 회의를 느끼던 차, 일본 유기농의 선구자인 고다니 준이치씨를 만나 유기농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유기농단체인 정농회를 조직했다. 유기농을 시작한 첫해, 병충해로 내다팔 수 있는 농작물이 하나도 없었다. 손해가 막심하다며 정농회를 탈퇴하는 농민도 있었다.
“당시 정부가 증산정책을 할 때인데 감산(유기농)을 한다고 미움도 받았고, 시중에 가짜 유기농 상품이 나도는 바람에 기운 빠진 적도 있지. 그래도 농약과 제초제를 쓰는 농사는 자연과 사람을 해치는 것임을 알게 된 이상 유기농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 그렇게 몇 해 더 반복하면서 노하우가 쌓이고 지력이 회복되면서 유기농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지.”

‘부를 쌓아두지 말고 나누라’는 가르침 실천한 아들

원 옹은 자신의 공동체 신념을 풀무원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가두지 않았다. 90년에는 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지부를 설립해 나라 밖의 굶는 이들에게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거울이다. 평생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 살아온 원경선 옹처럼 원혜영 의원 역시 서울대 재학시절 유신반대투쟁을 벌여 3번의 제적과 2번의 투옥을 당하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복역 후 생계가 막막해지자 아버지가 생산한 유기농 농산물을 팔기 위해 세운 회사가 ㈜풀무원이다. 수지 균형조차 맞추기 힘들던 회사가 겨우 적자를 면할 무렵 그는 친구 남승우(㈜풀무원홀딩스 총괄사장)에게 회사를 맡기고 정치로 뛰어들었다. 풀무원이 운동권 출신과 관련된 회사라는 불이익을 당할까봐 자신의 모든 지분을 처분하는 형식을 취하고 나중에 지분을 돌려받기 위해 상표권만 남 사장과 공동명의로 남겨뒀다. 95년 풀무원이 상장되자 원 의원은 지분을 돌려받기 위해 상표권을 매각하려 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국세청은 상표권을 돈으로 환산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풀무원의 상표권 가치를 인정해줄 수 없다고 했다. 원 의원은 “당시 풀무원의 상표권 가치가 수백억원은 됐을 텐데 그런 해석을 받고 나니 허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분을 되찾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남 사장의 이름으로 돼 있던 자신의 지분으로 경기 부천지역 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인 ‘풀무원 부천 육영재단’을 설립했다.
원 의원이 사업을 그만두고 정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돈의 유혹에 빠져 초심을 잃을까 경계한 것이다. 원 의원은 “하나님을 기준으로는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기준으로는 잘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원 의원이 88년 한겨레민주당 대변인을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한 지 22년째. 부천시장과 3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아들이 처음 약속대로 정치를 바르게 하고 있느냐고 묻자 원 옹은 “혜영이한테 돈 가져다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라며 웃었다. 잘하고 있다고 치켜세우지 않은 건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최근 원 의원은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아버지, 참 좋았다’(비타베아타)라는 책을 펴냈다. 제목이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에 원 옹은 “괜찮다. 듣고 싶었던 말”이라며 합격점을 줬다.
인터뷰를 마치며 원경선 옹의 손을 잡아 보았다. 가벼웠지만 진정성이 느껴졌다. “재산을 쌓기만 하지 말고 나누고 또 나누라”는 그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 깊이 스며들면 좋겠다.

여성동아 2010년 9월 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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