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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인생

80년대 스타 임영규 이혼 후 17년 굴곡진 삶 고백

“잇단 사업 실패, 노숙 생활, 폭행 사건…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이지만 열심히 일하며 두 딸에게 떳떳한 모습 보이고 싶어요”

글 김유림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0.08.16 10:42:00

인생은 롤러코스터라지만, 80년대를 주름잡았던 탤런트 임영규의 인생은 참으로 굴곡지다. 부잣집 아들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그는 잇단 사업 실패 후 현재 마땅한 거처도 없이 찜질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고해성사 같은 인생이야기.
80년대 스타 임영규 이혼 후 17년 굴곡진 삶 고백


17년 동안 브라운관을 떠나 있던 탤런트 임영규(54)의 근황이 최근 화제가 됐다. 식당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하며 찜질방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MBC ‘기분 좋은 날’을 통해 공개된 것. 방송이 나가고 며칠 뒤 서울 장안동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취재진의 방문이 여전히 쑥스러운 눈치였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자신의 처지를 공개하기까지 오랜 시간 고민했다는 그는 “이제와 후회해도 소용없고, 지난날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의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80년대 드라마 ‘3840 유격대’ ‘설중매’ ‘내일은 잊으리’ ‘일출봉’ 등에 출연하며 개성 있는 연기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임영규. 하지만 그의 삶은 93년 동료 탤런트 견미리와의 이혼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혼 사유에 대해 그는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어요. 연기자로 한창 잘나갈 때였는데, 촬영 핑계 대고 늦게까지 술 마시는 날이 많았거든요. 아이들이 네 살, 두 살 때였는데 방탕한 저의 생활을 참기 힘들었을 거예요. 이혼만은 막고 싶었지만, 아이들 엄마의 마음을 돌리기엔 제 잘못이 너무 컸어요.”

식당 주차요원 생활, 일당 3만원으로 생계 이어가

80년대 스타 임영규 이혼 후 17년 굴곡진 삶 고백


결국 6년 만에 이혼한 그는 현실을 도피하고자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이종사촌 형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게 되자 형이 운영하던 무역회사를 부채탕감 조건으로 넘겨받은 것. 하지만 사업의 ‘사’자도 모르던 그로서 회사를 꾸려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점점 더 많은 돈을 투자하게 됐고, 급기야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거액의 부동산까지 처분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모든 것을 잃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남은 돈이 아파트 전셋값 정도였어요. 그거라도 지켰으면 좋으련만 한국에 와서도 그 사업을 계속했어요. 심지어 형, 누나, 동생한테 돈을 빌려서 계속 쏟아부었죠. 하지만 끝내 사업이 망했고, 그 뒤로 폐인 같은 생활이 시작됐어요. 마땅히 하는 일 없이 술만 마시고 방황했죠.”
7남매 중 여섯째인 그는 형, 누나에게 수시로 돈을 요구한 탓에 어느 순간부터 형제 관계도 소원해졌다고 한다. 그는 “나라도 동생이 정신 못 차리고 방황하면 화가 날 것 같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간이 갈수록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전셋집에서 월세로, 그마저도 돈을 내지 못해 쫓겨났을 때는 죽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돈이 없어 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날도 있었고, 그러다 장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그는 “돈 1백원이 모자라 김밥 한 줄을 못 사먹고 돌아서 나올 때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새우잠을 자야 하는 고시원 생활은 물론 공원에서 노숙까지 경험해본 임영규는 현재 찜질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공동수면실에서 잠을 청하는 생활이 옹색하기 짝이 없었죠.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까 서서히 적응이 되더라고요. 주인한테 사정을 얘기하고 로커 키를 하나 얻어서 날마다 짐을 옮기지 않아도 되었고, 속옷 등 작은 빨래는 사람들이 적은 새벽에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어요. 처음 속옷을 빨다가 걸렸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려요.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은 자괴감이 들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깨끗하게 씻을 수 있고, 이불 한 채 없지만 잠잘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80년대 스타 임영규 이혼 후 17년 굴곡진 삶 고백


그는 얼마 전부터는 식당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잔심부름부터 식당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은 하루에 3만원. 사장은 월급으로 주겠다고 했지만 하루 벌어 하루 쓰는 그에게는 일당으로 받는 게 더 낫다고 한다. 그가 하루에 쓰는 비용은 2만2천원으로 찜질방 이용료에 식사비를 포함한 최소 금액이다. 교통카드도 한 번에 3천원 이상 충전하지 않는다. 몇 벌 안 되는 옷은 찜질방 인근에 있는 세탁소에 맡겨놓고 필요할 때마다 바꿔 입는다고 한다.
“찜질방에서건, 일터에서건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에는 창피해서 아니라고 딱 잡아뗐는데, 지난번 방송에 나가고부터는 속이지도 못하게 됐어요(웃음). 어려서 곱게만 자라 생활이 힘들어지니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사업을 하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돈에 대한 개념도 부족했던 것 같아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추락의 고통 더욱 커
중소기업을 운영한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그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불렸다고 한다. 9명의 식구 외에도 운전기사, 가정부, 정원사, 보일러공 등 8명의 도우미와 함께 생활했을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연예인이 돼서도 동료들 사이에서 ‘술 잘 사고, 밥 잘 사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신인 때 최불암 선배님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녀서 혼난 적이 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신만만하고 부족함 없던 그였기에 갑작스런 추락은 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괴로워서 한잔, 외로워서 한잔 그렇게 술에 의존해 사는 동안 임영규는 수차례 폭행 사건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자신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사람에게도 시비를 걸고 주먹을 휘두르는 날이 많았던 것. 한 달간의 유치장 생활까지 겪고 나서야 술을 끊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자진해서 병원을 찾은 그는 의사로부터 ‘알코올성 단기 치매’라는 병명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소위 ‘필름이 끊겨’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데, 실제로 술만 마시면 180도 다른 사람으로 변하곤 했다고.
“처음에는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중독이 되더라고요. 거의 자포자기한 삶이었죠.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어요. 다시 연기를 해보려고 애썼던 적도 있지만 매번 방송국 관계자들에게 ‘아직은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들어야 했어요. 그러다 한번은 친한 PD로부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자’고 전화가 왔는데 소주 값이 없어서 나가지 않았어요.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던 것 같아요.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그는 연기자로 재기하기가 쉽지 않자 신문 광고란을 뒤지며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연기와 운전밖에 없던 그에게 일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운전기사 모집 공고를 보고 회사로 찾아갔다가 회장 비서로부터 단칼에 거절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가 연기자라는 걸 알아보고는 “이런 거 할 사람이 아니지 않나. 한 달도 못 버티고 나갈 게 분명하다”며 그에게 설득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쫓아냈다고 한다. 그렇기에 식당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요즘 그는 다시금 일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하찮은 일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게는 참으로 소중한 직업이에요.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있다는 게 행복하고 비록 많진 않지만 제 손으로 돈을 번다는 게 뿌듯해요. 진작 철이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늦게라도 정신 차린 게 다행이겠죠?(웃음)”

빚쟁이들 피하느라 어머니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

80년대 스타 임영규 이혼 후 17년 굴곡진 삶 고백

네 살, 두 살 때 헤어진 두 딸과 만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재기에 성공하고 싶다는 임영규.



그는 아침마다 어머니께 기도를 드리며 일터로 나선다. 어머니는 그가 이혼한 지 2년 만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는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사채를 빌려 쓰고 제때 갚지 못한 바람에 빚쟁이들이 어머니가 누워 계신 병원에까지 들이닥친 것. 그는 자신이 나타나면 더 분란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에 먼 곳에서 바라볼 뿐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서 이런 불효자는 없을 것”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유난히 저를 예뻐하셨거든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애교가 많아서 그랬대요. 평소 어머니한테 전화도 자주 걸고 사랑한다는 표현도 자주 했거든요. 제가 연기자로 잘나갈 때는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분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식사 대접도 하고, 좋은 구경도 시켜드리고 해서 어머니가 뿌듯해하셨어요.”
현재 형제들과의 교류도 끊긴 채 홀로 지내고 있는 그는 “배고픈 것보다 외로운 게 더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2000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여자와 사실혼 관계를 가진 적이 있으나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처음 결혼생활에서와 비슷한 이유로 2년 만에 또다시 혼자가 된 것. 시간이 흐를수록 가장 그리운 사람은 이혼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두 딸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헤어졌기에 아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고.
“이제 와 아빠 노릇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두 딸을 만나 꼭 용서를 구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준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동안 삶의 끈을 놓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죽더라도 딸들에게 떳떳한 아빠의 모습을 보이고 죽자’는 심정으로 참고 또 참았어요.”
그동안 그는 몇 차례 두 딸을 보러 아이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갔지만 매번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보지 않는 게 좋겠다는 전처의 입장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고 해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소망이 있다. 하나는 연기자로 재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 딸의 얼굴을 보는 것. 임영규는 “두 번째 소원은 첫 번째 소원이 이뤄져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염치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새롭게 살고 싶어요. 되돌아보면 제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면서 살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연기를 놓은 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다시 한 번 용기를 내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딸과 함께 따뜻한 밥 한 끼 먹으며 웃고 얘기하고 포옹하고 싶어요. 그날이 언제 올까요.”
딸들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고통과 희망이 교차했다.

여성동아 2010년 8월 5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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