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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 스페셜

착한 아버지 김영철, 우리 시대의 가장을 말하다

글 김명희 기자 사진 지호영 이기욱 기자

입력 2010.07.15 16:13:00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는 막장도 불륜도 아닌데 시청자를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선한 사람들이 만드는 좋은 세상, 그래서 작가는 인생은 아름답다고 했나 보다. 그 착한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는, 그 넉넉한 품에 안기면 아픔도 슬픔도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아버지 김영철을 만났다.
착한 아버지 김영철, 우리 시대의 가장을 말하다


제주도는 예부터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했다. 그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김영철(57)은 돌 같다. 바람 잘 날 없는 대가족의 사이에서, 김수현 작가 특유의 속사포 같은 대사를 쏟아내는 여배우들 틈에서 돌처럼 우직하게 중심을 지킨다.
악의 깊이를 알 수 없었던 ‘아이리스’의 백산은 온데간데 없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앞에 서자 덩달아 마음이 순해진다. 그것조차 연기라면 소름이 돋았겠지만 “김수현 작가가 어리숙한 내 모습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고 하는 걸 보니, 인간 김영철은 백산보다 ‘인생의 아름다워’의 양병태에 훨씬 가까운가보다.

실제로는 친구 같은 아버지
양병태는 한 템포 늦으면서도 집안의 중심을 잡는, 다정다감하고 관대한 가장이다. 80세 넘은 노모를 극진히 모시고, 30년 바람피우다 늙고 병들어 돌아온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재혼한 아내의 딸과 그 남편 그리고 손녀까지 데리고 산다. 결혼 안 한 두 동생도 물론이다. 결정적으론, 맏아들 태섭이 동성애자임을 알았을 때 “달라진 것은 없다”며 감싸안았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보다 그동안 겪었을 괴로움에 먼저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 드라마에서 너그럽고 자상한 아버지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아버지가 드물지 않나요.
“제가 보기엔 다 좋은 아버지들이에요. 다만 표현을 못 할 뿐이죠. 그런 점에선 자식들이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어요. 부모는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는 존재이긴 하지만, 그걸 너무 당연시 생각하지 말고 고마울 땐 ‘고맙다’고 표현을 해주면 좋겠어요. 부모는 자식이 고맙다는 말만 해주면 모든 시름을 잊지만, 자식들이 당연하다고만 여기면 서운하고 서글퍼지거든요.”
▼ 김영철씨는 어떤 아버지인가요.
“연기자라는 직업 때문인지, 아무래도 아이들을 감성적으로 대한 것 같아요. 엄할 땐 엄하다가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고 어떨 땐 제가 동생 같기도 하고…. 계획에 따라 가르치지 못하고 기분에 따라 아이들을 대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 자녀들 소개를 좀 더 해주세요.
“스물아홉, 스물넷 된 아들만 둘인데 큰 녀석은 모범생 스타일이에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 일 딱딱 하는. 지금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죠. 그에 반해 작은 녀석은 규칙적이진 않지만 대신 반짝반짝하는 면이 있어요. 놀기도 잘 하고. 지금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디지털 아트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들만 둘이니 좀 적적한 감도 있죠. 극 중 막내 초롱이처럼 귀엽고 속 깊은 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웃음).”
▼ 아들 태섭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실제 아들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힘들겠죠.
“아내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듣고 처음에는 무서운 표정을 짓습니다. 처음부터 너그럽게 받아들였으면 좋았겠지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니 그러지 못하겠더군요. 하지만 결국 감싸안는 게 가족 아니겠습니까. 대본을 보면, 김수현 선생님이 참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태섭이 심정은 어떻겠어요. 게다가 태섭이가 전처 소생이라서 아내가 마음의 빚이 있어요. 그걸 아버지 입장에서 이해하려 애쓰고 다가가는 과정을 통해 시청자들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 가출했다가 30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받아들인 과정도 그랬죠.
“그렇죠. 젊었을 때 가족을 버리고 쾌락을 찾아 떠났다가 힘 빠지고 날갯죽지 축 처져 가족 품으로 돌아온 아버지, 같은 남자로서 용서할 수 없죠. 하지만 아버지잖아요. 저 같아도 병태와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아버지에 대한 자식 된 도리와 어머니와의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겠지만 결국 오갈 데 없는 아버지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깨진 걸 새걸로 바꾸거나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잘 붙여서 예쁘게 마무리하는 게 인생을 사는 지혜 같습니다.”

맑은 샘물 같은 김수현 작가의 대본, 저절로 존경심 생겨

1973년 민예극단에 입단하면서 연기와 인연을 맺은 그에게는 줄곧 ‘선 굵은 연기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궁예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태조 왕건’, ‘대왕세종’과 최근작 ‘아이리스’, 영화 ‘달콤한 인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단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스스로 변화가 필요함을 감지했다. “이러다간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을까봐 걱정돼” ‘아이리스’를 끝으로 당분간 악역은 맡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차 김수현 작가로부터 러브콜이 왔다. 실제 그 자신도 시골 농부나 목장 주인을 꿈꿀 정도로 소박하다. 연기자 후배인 이문희씨와 82년 결혼했는데, 아내 역시 결혼 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내조에만 전념하고 있다.



착한 아버지 김영철, 우리 시대의 가장을 말하다


▼ 그동안 카리스마 넘치는 역을 많이 맡았는데.
“그런 역할이 주목받아서 그렇지 실제 모습은 어수룩합니다. 극중 병태와 비슷하죠. 그래서 촬영장 가는 마음도 편해요. ‘아이리스’ 땐 몸 관리를 철저히 해서 군살이 하나도 없었는데 요즘은 옆구리 살이 비어져 나와요.”
▼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죠.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아이리스’ 끝나고 아내와 함께 아이가 있는 뉴욕에 가 있는데 정을영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김 선생님이 새 작품의 아버지 역할로 나를 꼭 쓰고 싶다고 했다더라고요. ‘목욕탕집 남자들’ ‘엄마가 뿔났다’ 등을 즐겨 봐서, 꼭 한번 선생님과 일해보고 싶었어요. 극본을 받아보니 ‘아, 이건 그냥 나를 보여주면 되겠구나’ 싶더군요.”
▼ 함께 작업해보니 어떤가요.
“대본을 읽다 보면 맑은 샘물을 마시는 것 같아요.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어, 그걸 음미하노라면 내 안에 쌓인 나쁜 찌꺼기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랄까. 선생님 자체가 너무 맑은 분이세요. 그분을 무섭다고 하는데 잔소리를 많이 하셔서가 아니라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분의 마음은 어떨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자연스럽게 어려워집니다. 존경이죠.”
▼ 배우로선 긴장도 되겠어요.
“긴장이라기보단,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저희가 연기하는 동안 이렇게 좋은 작품을 얼마나 더 만나겠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도 아내 역을 맡은 김해숙씨에게 ‘당신 참 대단한 여자야’라고 칭찬을 해줬어요. 모든 걸 다 쏟아내는 게 느껴지거든요. 한 작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은 모두 동업자예요. 한 사람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각자 맡은 역을 빈틈없이 해내야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을 만나면 고맙죠.”
▼ 매회 넘어지면서 끝나는 엔딩이 재미있습니다.
“엔딩을 받는다는 건 연기자에게 매력 있는 일이죠. 대본을 받아들면 ‘이번에는 누가 어떻게 넘어지나’ 궁금해서 꼭 끝까지 보게 돼요. 그 속에도 선생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나이 든 배우들은 살살 넘어지도록, 젊은 사람들은 세게 넘어지도록 하시거든요.”
▼ 드라마에서 허리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후배 이끄는 것도 신경 쓰일 텐데.
“그렇죠. 다들 자식 같아서 좋은 배우가 되면 좋겠습니다. 제 경우엔 후배들이 연기에 관해 물어보면 핵심적으로 ‘이거다’ 알려주지 않고 ‘이럴 거야’ 라고 에둘러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제대로 스며들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결국 연기에 대한 답은 고민하면서 스스로 찾아가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을 떠다 먹이기보다는 샘을 파는 걸 가르치고 싶어요.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답을 저쪽 구석에 쑤셔놓아도 찾아낼 것이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손에 쥐여줘도 모를 겁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 좀 더 여유 갖고 주변 둘러볼 생각
김영철은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80년대 중반~90년대 초까지 수차례 연기상을 수상했고, 자신감에 탄력이 붙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부터 캐스팅이 잘 안 들어왔다. 항상 뜻하지 않은 사고로 넘어지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엔딩 장면처럼 예기치 않게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운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밉보인 것도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4~5년 슬럼프를 겪으면서 천직으로 여겼던 연기자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었다. 과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진로를 바꿔볼까 고민도 했지만,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드라마 ‘태조 왕건’의 궁예 역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캐스팅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작가가 김영철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고마웠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를 연기자로 우뚝 서게 한 궁예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는 “살다 보면 누구나 대열에서 낙오하는 시기가 온다. 그걸 잘 극복하려면 주변 사람들과의 신뢰를 잘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착한 아버지 김영철, 우리 시대의 가장을 말하다


▼ 연기자로 입문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 다닐 때 친구와 ‘여자나 꼬일까’하고 명동에 나갔는데, 마침 크리스마스 직전이라 캐럴도 흘러나오고 분위기가 들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여자는 못 꼬이고 명동 예술극장에서 이정길 선배가 하는 연극 ‘폭풍의 언덕’을 봤죠.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이걸 해야돼, 죽어도 할래’ 라는 열망이 생겼어요. 처음엔 수업에 빠지고 극단을 드나들다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연극배우로 나섰죠. 심부름하고 포스터 붙이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는데, 선배들이 연습을 마치고 난롯가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게 얼마나 멋지던지…(웃음)”
▼ 지금도 배우라는 직업에 만족하나요.
“물론이죠. 누구에게든지 한 번쯤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희로애락도 희로애락이거니와 세상을 살면서 접목되는 부분이 참 많아요. 목사님이 연기를 배우면 설교를 할 때도 얼마나 드라마틱하겠어요. 정치인이 연설을 할 때도 그렇고요.”
▼ 인생이 연기란 말씀이시군요.
“하하하. 어려서 저희 집이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선생님이 저희 집에서 숙식을 하며 저를 가르쳐주실 정도였죠.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하면서 세상살이가 고달파졌죠. 원래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는데 친구들한테 돈도 뜯고… 중학교 때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도 돈을 뜯었죠. 그 친구 만나러 갈 땐 옷에 흙도 묻히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요. 그럼 안쓰러워 울면서 돈을 주곤 했죠. 그럼 난 점점 더 불쌍한 표정을 짓고….연기가 도움이 되기도 하죠.”
▼ 아내 이문희씨는 결혼 후 은퇴했는데, 혹시 김영철씨가 활동을 만류한 건가요.
“그런 오해가 많은데 100% 아니에요(웃음). 저도 아내가 계속 연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이 일이 안 맞는 것 같다고 해요.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게 더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 같다고. 사람들 머릿속에 이문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게 훼손되는 것도 싫은 것 같고요. 지금은 우리 모두 만족하며 편안하게 살고 있어요”
▼ 배우 생활을 돌아보며 후회가 있다면.
“너무 여유 없이 일에 미쳐 앞만 보고 달려온 게 후회가 됩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쉬기도 하고, 우물가에서 물도 한잔 마시며 왔어야 했는데… 그렇게 쉬엄쉬엄 주변을 돌아보며 왔더라면 외롭고 쓸쓸할 때 함께 소주잔 기울일 수 있는 좋은 선후배, 친구가 더 많이 남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하지만 하느님이 모든 걸 다 주시지는 않는 것 같아요. 10개가 있다면 많이 주는 사람은 6개도 주시지만 대부분은 7개 정도가 모자라죠. 저는 너무 많은 걸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건 아꼈다가 자식들한테 주는 게 아니라 동생이나 후배들 주고 싶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좋은 배우로 남고 싶어요. 10년 정도는 열심히 할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더 보람 있게 끌고 가느냐가 숙제예요.”
▼ 10년이라니, 이순재 선생은 70대 중반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이순재 선배처럼 오래 할 자신이 없어요. 선배는 대단한 자신감이죠. 체력도 그렇고. 이순재 선배와 골프장에 가면 첫 홀부터 마지막 홀 돌 때까지 카트를 한 번도 안 타요. 샷을 날리며 ‘오’ 하고 한 번 쳐다보고는 후다닥 걸어서 다음 홀로 이동하죠. (그는 이순재가 골프채를 휘둘러 ‘오!’하며 ‘샷’을 날리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흉내를 냈다. 연기자는 천생 연기자다. 그 모습이 이순재와 똑같아서 웃음이 난다) 연기 외에 다른 분야에서 개척하고 싶은 일도 있고, 섭렵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사진도 찍고 싶고, 시골에서 상추와 배추 심고 땅이 주는 기쁨, 소소한 일상을 누리면서 한가로이 사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언제 인생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서로 힘을 주고, 그 힘을 받아서 내가 다시 그쪽으로 넘길 때 인생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동아 2010년 7월 5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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