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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작가와의 만남

방송작가 노희경, ‘거짓말’ 2라운드

글 김명희 기자 사진 이기욱 기자

입력 2010.04.16 14:49:00

98년 드라마 ‘거짓말’이 방영될 당시 시청률은 별로 높지 않았다. 하지만 노희경은 지금도 ‘거짓말’의 작가로 기억된다. 드라마 방영 당시 만들어진 동호회는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고 최근 이 드라마 대본집도 발간됐다. 정말 질긴 사랑이다.
방송작가 노희경, ‘거짓말’ 2라운드


“사랑을 하면서 강한 사람은 없어. 사랑을 하면 모두 약자야. 상대에게 연연하게 되니까. 그리워하게 되니까. 혼자서는 도저히 버텨지지 않으니까. 우린, 모두 약자야.”(드라마‘거짓말’ 중)
드라마의 미덕은 거기에 빠져드는 동안만큼은 세상 모든 시름을 잊는 데 있다. 흥미진진한 전개로 다음 회가 기대되는 드라마도 있지만 대부분 그 여운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난 98년 20부작으로 방영된 노희경 작가(44)의 ‘거짓말’은 다른 드라마와 차별화된다. 드라마 속 대사는 지금 들어도 가슴 한쪽이 시려온다. 등장인물 주성우(배종옥) 서준희(이성재) 정은수(유호정) 세미(추상미) 동진(김상경) 장어(김태우)는 지금도 어디선가 뚜벅뚜벅 살아가며 가슴 따뜻한 사랑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거짓말’은 국내 최초의 ‘마니아 드라마’로 기억된다. 당시 ‘거짓말’의 PC통신 동호회가 인터넷 커뮤니티로 발전해 지금까지 12년간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이 드라마 대본집이 최근 발간됐다. 대본집 발간에 맞춰 노희경 작가를 만났다. ‘바보 같은 사랑’ ‘꽃보다 아름다워’ ‘그들이 사는 세상(이하 그사세)’등을 집필한 노 작가는 얼굴과 목소리만으로는 나이와 성별이 가늠되지 않는다. 짧은 커트머리에 굵고 앳된 목소리는 미소년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말투는 딱 그의 드라마에 나오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다. 때로는 담백하고, 때로는 끈적끈적한. 그래서 그의 별명이 ‘애늙은이’다.

‘거짓말’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참회록
‘거짓말’ 집필 당시 그는 서른두 살, 단막극 ‘세리와 수지’ ‘아직은 사랑할 시간’과 4부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내가 사는 이유’ 등을 써낸 데뷔 3년 차 작가였다. “작가로서 출세해야겠다는 욕망과 불안감, 선불을 받았으니 반드시 글을 써야 한다는 부채감까지 겹쳐 글보다 악몽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았던 시절”,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환자용 캔죽을 쌓아놓고 글을 쓰는 사이 몸무게가 32kg까지 줄었다. 그는 지하 방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내가 왜 글을 쓰지?’ ‘글에 몰려 살아가는 나는 행복한가’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이 드라마는 유부남인 준희와 선배 성우의 운명적인 사랑, 이들의 사랑 앞에 좌절하는 준희 아내 은수의 이야기가 중심 축이다. 불륜이지만 운명같은 준희와 성우의 사랑, 남편을 향한 은수의 외사랑… 어느 누구만을 비난할 수도, 애정을 쏟을 수도 없었다. 작가는 여기에 현철과 영희의 노년 사랑, 가진 자 동진의 못 가진 자 세미에 대한 연민까지 곁들여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거짓말’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참회록이에요. 왜 나와, 나와 사랑했던 상대들은 그렇게 모질고 극악하게 이별해야만 했던 것일까. 한번쯤은 ‘미안하다’ ‘잘못했다’라고 말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 ‘거짓말’을 쓰게 한 최초의 힘이에요.”
작가에 따르면 ‘거짓말’은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내가 아름답지 못한 사랑을 했기에 그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다”는 것.
“사람들은 이 드라마가 아프다고 하더군요. 아픔으로 지난 사랑을 참회할 수 있을까. 지금 누군가가 그렇게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그때는 그만한 것이라도 내게는 위안이 됐어요. ‘내가 아프니까 지나간 모든 사랑아 날 용서하렴’ 이라며 치졸하게 매달렸죠.”
- 드라마 방영 12년 만에 대본집이 발간됐는데 소감은.
“드라마 집필 당시 밥을 잘 못 먹어 몸무게가 32kg 정도 나갔어요. 주변 사람들이 죽을 것 같다고 다들 쓰지 말라고 말렸죠. 대본집을 읽는데 그때 생각이 나 마음이 짠했어요. 지금은 37, 38kg 나가는데 이 정도가 딱 좋아요. 개개인의 캐릭터에 빠지다 보니 끈적끈적하며 장면이 넘어가는 속도와 대사 등이 정제되지 않아 창피한 점도 있지만 ‘젊은 날이 아니면 언제 사랑에 미쳐보나’라는 생각이 들어 가끔 그립기도 하고….”
- PC통신 동호회에서 시작한 ‘거짓말 동호회’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처음엔 곧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10년 넘게 지속되는 걸 보니 ‘이 사람들도 나처럼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는 성격이구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요.”

방송작가 노희경, ‘거짓말’ 2라운드


-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썼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캐릭터는.
“예전에 사귄 사람은 더러 잊기도 하는데 작품은 다 기억해요. 좋아했던 연출자·배우도 있고 정이 가는 에피소드도 있고…. 특히 배우들은 고생을 많이 하니까 다 기억이 나요. 그중에서도 ‘거짓말’의 성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인희(나문희), ‘내가 사는 이유’의 숙자(나문희), 젊은 친구들 중에는 ‘그사세’의 송혜교씨가 기억에 남아요. 열심히 해서.”
- 송혜교씨는 ‘그사세’에 함께 출연한 현빈씨와 연인이 됐습니다. ‘화려한 시절’의 공효진·류승범씨도 실제 커플로 발전했는데. 예상했나요.
“예상은 전혀 못했는데 그런 걸 보면 재밌어요. 그들을 따로따로 섭외했으니까. 처음 만나 ‘안녕하세요. 누구누굽니다’하며 인사하는 것을 봤으니 상견례 자리에 함께한 셈이 됐어요. 들리는 풍문에 ‘애인 있는 사람은 노희경 작품에 출연하면 안 된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웃음).”
- 배우들과도 친하게 지내죠.
“친분은 대개 작품에서만으로 그쳐요. 대신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보죠. 배종옥씨 경우는 ‘거짓말’을 찍을 당시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젊었더라고요. 요즘 또 보면 어떨지 모르겠네요(웃음).”
- 실제 배우를 염두에 두고 드라마를 쓴 적이 있나요.
“네. 매번 그래요. 장동건이 캐스팅되든 안 되든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면 편해요. ‘거짓말’의 성우는 배종옥씨를 생각하고 쓴 게 아니었어요. 방영 한 달 앞두고 배종옥씨가 캐스팅되는 바람에 말투를 그에 맞게 다 바꿨죠. 유호정씨는 실제로 말끝을 올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을 고스란히 따가지고 대본을 썼고요.”
- 그럼 성우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쓴 건가요.
“이런 거 말해도 되나?(웃음) 황신혜씨였어요. 그때 인기가 최고였으니까. 황신혜씨가 (캐스팅이) 안 돼서 배종옥씨한테 넘어갔는데 그전까지는 도시적인 커리어우먼만 연기했지, 사랑 연기를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하더라고요. 드라마에서 한 번도 운 적이 없다고, 안약 쓰면 안 되겠냐고 해서 안 된다고 했더니 황망해하더라고요. 나중엔 너무 많이 울어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요.”



각박한 세상, 맑은 된장국처럼 순한 드라마 쓰고 싶어

“(시청률은 별로였지만) 나는 ‘거짓말’로 참 많은 것을 얻었다. 영원한 파트너 표민수를 얻었고 정말 따뜻한 동료 기민수(당시 조연출, 드라마 ‘굿바이 솔로’ PD)를 얻었고 절친 배종옥을 얻었다. 집필부터 방영까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만큼 얻었으면 나는 마음 부자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난 사랑에 대한 참회는 내게 여전히, 숙제다.”(노희경)
노희경 작가는 어릴 때부터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고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원래는 시와 소설을 썼으나 머리가 아팠고 드라마를 쓰고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과 사랑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관통해 흐른다. 그래서 ‘노희경표 드라마’라는, 별칭도 생겼다. 하지만 시청률은 작가의 명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망한 드라마도 없지만 대박을 터뜨린 작품도 드물다. 2008년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를 낼 당시 그는 출판사에 “나는 시청률이 안 나오는 작가다. 책이 안 팔려 출판사에 민폐 끼치기 싫다”면서 초판을 3천 부밖에 못 찍게 했다. 그러나 당시 출판사는 작가 몰래 초판을 5만 부 찍었고 40만 부나 팔려나갔다. 그는 “내 드라마가 마니아 드라마라고 하는데 마니아들은 모두 어디 숨어 있는지 궁금하다”며 웃었다.
- 사람들은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묶어 ‘노희경표 드라마’라고 합니다. ‘노희경표 드라마’가 도대체 뭔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마니아 드라마를 쓸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저도 시청률이 잘 나오면 좋겠어요. 물건을 팔려고 만들어서 내놨는데 안 팔리면 속상하죠. ‘거짓말’ 이후 ‘바보 같은 사랑’을 할 때는 작품이 나빠졌다느니 하는 말을 들을까봐 이름을 바꾸려고 했어요. 노경희나 이경희로(웃음). 그런데 드라마국장이 ‘어차피 파고들면 다 알게 된다’고 말해 실명으로 갔어요. 지금은 뭐라고 하든지 상관 안 해요. ‘노희경표’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계속 새로운 걸 쓰는데 만날 똑같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좋게 들리기도 해요.”

방송작가 노희경, ‘거짓말’ 2라운드

‘거짓말’ 대본집을 다시 보며 고통스럽게 드라마를 집필하던 때가 생각나 마음이 짠했다는 노희경 작가.



- ‘막장’이라 불리는 드라마에 대한 생각은.
“‘막장’이란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참 재미있어요. 옛날에는 머리가 아파 그런 드라마를 안 봤는데 최근 공부 삼아 보니 욕 몇 번 하면 시간이 금방 가서 재미있더라고요. 그런 드라마를 보면 제가 팬서비스가 모자라다는 생각도 들지만 각박한 세상에 맑은 된장국 같은 순한 드라마를 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글 쓸 때 자신을 믿는 편인가요.
“울며불며 가는 거죠. 지난해 처음으로 18km를 걸어봤는데 걷는 동안 내가 여길 왜 왔나. 욕도 했지만 가기로 한 거니까 가게 되더라고요. 사람이 어떻게 시종일관 자신을 믿거나 불신하겠어요. ‘시청률이야 어떻든 나는 엔딩을 쓴다’ 이런 마음으로…(웃음). 직장생활, 사회생활 다 그렇잖아요.”
- 방송작가는 화면을 위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른 아쉬움은 없나요.
“방송대본은 화면으로 봐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만 그것 자체로 작품은 아니죠. 그래서 도리어 배포가 커지는 것 같아요. 내가 쓴 작품을 연출자와 배우가 어떻게 색칠해줄까, 기대도 되고.”
- 소설을 쓸 생각은 없나요?
“전혀 생각이 없다가 요즘은 ‘나이 들어 일거리가 없으면 혼자 앉아서 시나 산문을 쓰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드라마 대본을 쓰는 게 더 재밌어요. 글은 제가 아무리 잘 써도 맛이 잘 안 나는데 어른(배우)이 연기를 하면 향기가 나요. 내가 그들을 위한 바탕을 만들어주는 게 무척 기뻐요.”
- 소설가나 시인에 비해 방송작가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경향이 있었죠. 내가 하는 장르를 남이 업신여긴다면 누구라도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반면 그래서 드라마 작가는 겸손한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나중에 소설로 ‘빵 터진다’고 해도 묘비에는 드라마 작가라고 쓰고 싶어요(웃음).”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어 행복해요”

노희경 작가는 인터뷰 중 “기분 좋다” “재미있다”는 말을 많이 했다. ‘거짓말’로 아픈 상처를 드러낸 후 ‘굿바이 솔로’ ‘그사세’ 등에서 그는 이전보다 조금 밝고 경쾌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 노희경 드라마 특유의, 선한 어른들이 등장하는 가족 드라마를 집필 중인 그는 글 쓰는 틈틈이 국제구호단체 JTS홍보대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번 대본집 발간을 통해 발생하는 인세와 수익도 JTS, 평화재단 등에 기부하기로 했다.
요즘 그의 주요한 일과 중 하나는‘어느 지역에 뭐가 얼마큼 모자라니 뭘 더 보내야 한다’는 걸 계획하고 계산하는 일이다. 숫자놀음은 젬병이라 머리가 아프지만 글쓰기만큼이나 재미있다고 한다.

- 작품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지난번에 내가 어떻게 했나’를 생각하며 극복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얻어요. 주변 사람들이 모니터링하면서 ‘이건 재미없어, 이건 좋아요’하는 데이터들을 흘려듣지 않고 모으는 편이죠.”
- 전작 ‘그사세’로 부터는 어떤 것을 극복하고 싶나요.
“템포감도 빠르고 전문용어가 많아 보는 사람들이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제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은 서민과 어른들 얘기를 좋아하는데 ‘그사세’에선 빠진 부분이기도 하죠. 이번 드라마는 신세대와 구세대가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할아버지·할머니 얘기를 쓸 때면 ‘문씨 아저씨 앉아 있다’ ‘할머니 상추 뜯는다’ 같은 사소한 지문에도 기분이 좋아져요.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쓸 수 있어서 기분 좋고요.”
- 인간 노희경을 가장 닮은 드라마 속 캐릭터는 누군가요.
“많은 캐릭터가 있었고 캐릭터는 작가와 분리될 수 없어요. 그래도 한 캐릭터를 꼽아야 한다면 ‘내가 사는 이유’의 욕쟁이 할머니(김영옥)를 꼽고 싶어요. 입만 열면 독하지만 귀여운(웃음).”

여성동아 2010년 4월 5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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