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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메이커

스피드스케이팅 김관규 감독이 전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타 탄생 뒷얘기

글 박혜림 사진 지호영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0. 04. 16

금메달 3개와 은메달 2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이렇게 놀라운 성적을 거두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1948년 생모리츠 대회 이후 58년간 은메달 1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하는 데 그쳤기 때문. 금메달 3인방 모태범·이상화·이승훈 선수는 인기스타가 됐다. 그들 뒤에는 김관규 감독이 있다.

스피드스케이팅 김관규 감독이 전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타 탄생 뒷얘기


상냥한 말투와 활짝 웃는 얼굴. 평소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을 하는 태릉선수촌 국제스케이트장에서 김관규 감독(43)을 만났을 때 그가 왜 ‘빙상계의 히딩크’ ‘덕장(德將)’이라 불리는지 단번에 감이 왔다. 지인들이 지나가며 축하 인사를 하자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인사를 건넸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도 뛰어난 지도자 없이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어려운 법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3명이나 키워낸 그는 사실 6년 전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고 오랜 시간을 주저했다. 국가대표팀 코치로 합류했다 하차하기를 두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다.
“감독 제의가 왔을 때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싶어 거절하려고 했어요. 94년 대표팀 코치로 발탁돼 98년 나가노올림픽까지 선수들을 지도했다가 하차했고 99년에도 다시 대표팀 코치가 됐다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물러났거든요.”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아 오기 발동”
더구나 당시 대표팀에는 이규혁 선수(32)를 제외하곤 뚜렷하게 눈에 띄는 선수가 없었다. 같은 빙상종목인 쇼트트랙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감독직을 수락했을 때 그의 마음속엔 ‘잘하지 않으면 선수들도 나도 죽는다’라는 비장한 각오가 있었다.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모태범 선수(21)는 언론 인터뷰에서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오기가 발동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감독을 비롯한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마음도 이러했을 것이다. 밴쿠버올림픽 전, 국민들은 빙상 효자 종목 쇼트트랙 선수들과 피겨 여왕 김연아에게 관심을 쏟았다. 김 감독은 “쇼트트랙 팀과 비슷한 시기에 국제대회가 있어 같이 귀국해 공항에 들어왔는데 쇼트트랙만 관심을 받아서 우리 선수들이 속상할 때도 있었다”며 그간 섭섭했던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를 악문 오기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2월14일 이승훈 선수(22)가 5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아시아인 최초 올림픽 장거리 메달 획득’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 모태범 선수가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번째 금메달을 500m에서 따고 그 다음 날에는 이상화 선수(21)도 500m에서 금메달을 땄다. 국민들은 점점 스피드스케이팅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승훈 선수의 10000m 금메달 획득은 이 향연의 화룡점정이었다.
김 감독은 세 선수 모두 금메달을 따리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남녀 선수 모두 500m에서 동메달 이상은 딸 거라고 예상했다. 그만큼 준비를 충실히 해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경쾌하고 다정다감하던 그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스피드스케이팅 김관규 감독이 전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타 탄생 뒷얘기

금메달 3인방 모태범·이상화·이승훈 선수(왼쪽부터).



“토요일 밤에~ 바로 그날에~” 이상화 선수가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무대 위에서 한껏 춰보였다. 모태범 선수는 ‘파이어’를 외치며 막춤을 췄다. 지난해 빙상국가대표 워크숍 무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요즘 유행하는 노래·패션·유행어 등에 대해 자주 묻는다”며 “선수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리더와는 거리가 멀었고 소탈한 이웃집 삼촌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해 스승의 날, 선수들은 그를 위해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SK통신사 광고 노래를 개사해 깜짝 공연을 펼쳤다.
“억지로 연습하라고 윽박지른다고 되지 않아요. 하는 척은 할 수 있지만 결과가 좋을 리가 없잖아요? 스스로 하고 싶어서 목표를 세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선수에 대해 잘 알고 또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거죠. 늘 부드러울 수야 없고 결정적일 때 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스피드스케이팅 김관규 감독이 전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타 탄생 뒷얘기


99년, 대표팀 코치에서 하차해 성신여대와 용인대에서 학생을 가르친 경험은 이번 밴쿠버올림픽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 김 감독은 선수들이 결정적인 부분에서 실수를 하고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아 이를 해결해보고자 ‘체육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2002년부터 한국체대에서 ‘체육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우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의 스트레스 요인과 대처방안’이라는 박사 논문도 썼다.
“잘하던 선수가 중요한 순간에 ‘내가 상대선수에게 지면 어쩌지’ ‘경기에서 지면 코치에게 혼날 텐데’ 하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실수를 하고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요.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이 가장 큰 적이었죠.”
모태범은 “500m 경기가 한 시간 이상 지연되고 경기 도중 캐나다 선수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었지만 결코 기죽지 않았다”고 했다. 김 감독은 “운동에 대한 내적 동기는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극한 상황에서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김 감독은 강압적으로 같은 훈련을 오랫동안 시키기보다 선수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종목에 집중하도록 했다. 체력과 순발력이 좋은 이상화와 이강석 선수는 500m 단거리를, 침착하고 지구력이 강한 이승훈 선수는 10000m에 집중했다.
“훈련스케줄을 짜면서 종이를 몇 번이나 찢었는지 몰라요. 1년 전 스케줄을 가져다놓고 부족한 점은 보완하고, 단체 훈련과 선수 개인 훈련시간을 만들어 조정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운동 종목의 훈련법도 도입했다. 이상화 선수의 ‘금벅지’는 허벅지 근력을 키우기 위해 역도 선수들이 하는 웨이트 트레이닝법을 훈련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스피드스케이팅은 정확한 스타트가 중요하기 때문에 육상 단거리 스타트 훈련법도 도입했다. 특히 외신에서 승리 요인으로 지목한 쇼트트랙 훈련은 최단거리로 코너를 돌기 위한 것이었다.

모태범은 ‘모 형’, 이상화는 ‘뚱탱이’, 이승훈은 ‘선비’라고 불러
김 감독은 금메달 3인방의 올림픽 경기 이야기를 꺼내자 다시 2월의 밴쿠버로 돌아간 듯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밴쿠버에 있을 때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모태범의 500m 금메달이었다.
“태범이의 주 종목이 1000m예요. 우리 선수들한테 동메달 정도를 기대했는데 기대하지 않은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다니 완전히 예상을 깼어요. 태범이가 중장거리 전문이라 힘으로 승부하는 타입인데 경기가 1시간 이상 지연되면서 빙질이 물러져 힘이 좋은 태범이에게 유리한 상황이 됐죠.”
이상화의 500m 경기를 볼 때는 그의 주 종목인데다 최소 동메달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도 늘 함께했기 때문에 김 감독 역시 긴장했다고.
“승훈이는 쇼트트랙에서 종목을 바꾼 지 7개월 정도인데 10000m에서 금메달을 따다니 적응력이 굉장히 뛰어난 거예요. 5위권 안에 들 것이란 확신도 없었는데 대단한 일을 해냈어요. 자신의 기량을 최대치로 발휘했습니다.”
김 감독은 평소 모태범을 ‘모 형’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친근하고 애정이 가는데 특히 자신의 선수시절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저도 선수시절 다른 선수가 20바퀴를 타면 무슨 일이 있어도 21바퀴를 타고 쉬었는데 태범이도 남이 하나를 하면 자신은 두 개를 해야 할 정도로 승부욕이 강한 선수예요.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무대에 올라가면 끼가 넘치죠. 세미나 때 춤추는 걸 보셔야 하는데…(웃음).”
이상화의 별명은 ‘뚱탱이’.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이 잘 발달해서 놀리듯이 부르는 애칭이지만 이상화의 가장 큰 장점인 순발력과 순간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상화는 눈매가 날카로워서 강한 인상을 주지만 누구보다 여리고 착해요. 단 운동에 있어서는 예외인데 다른 사람한테 지면 분에 못 이겨서 울 정도죠. 운다는 이야기는 그다음에 뭔가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뜻이에요. ‘지면 지는 거지’ 하는 선수는 발전이 없거든요.”
김 감독은 이승훈 선수를 보면 ‘선비’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말을 조용히 하는 편이라 귀를 가져다대고 들어야 할 정도지만 그만큼 침착하기 때문이다. 말보다는 몸으로 먼저 실천하고 연습하는 성실한 선수다.

“규혁이의 심정이 다 느껴져 등만 토닥였어요”

스피드스케이팅 김관규 감독이 전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타 탄생 뒷얘기

김관규 감독은 이번 올림픽에서 이규혁, 모태범 등의 제자를 지켜보며 희비가 교차하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인터뷰 중 국제스케이트장에 이규혁 선수가 연습을 하러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갑게 서로를 얼싸안고 등을 토닥였다. 94년부터 대표팀 코치와 선수로 인연을 맺은 후 나가노·토리노·밴쿠버올림픽 모두 함께했으니 두 사람 사이가 각별할 만했다.
“규혁이가 잘하는 선수인데… 올림픽 금메달과는 유독 인연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토리노에서 0.04초 정도 차이로 4등을 해서 이번 밴쿠버올림픽에서는 무조건 3등 안에는 든다고 확신했어요. 경기가 한 시간만 미뤄지지 않았더라도….”
단거리 시합에 유달리 강했던 이규혁·이강석 선수는 경기가 지연되면서 심리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감독은 안타까움에 잠시 뜸을 들였다.
“규혁이는 운동을 할 줄 아는 선수예요. 자기 관리를 잘하거든요. 성격도 좋아 후배들도 잘 따르고요. 다른 팀들이 우리 팀 분위기가 제일 좋다는데 규혁이 덕분이죠. 규혁이가 대표팀에 있었기 때문에 강석이가 있었고, 또 태범이·상화·승훈이가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거죠.”
그는 이규혁 선수의 경기가 끝난 후 ‘잘했다’라는 말도 ‘괜찮다’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얼굴만 한참 바라보다 그 심정이 다 느껴져 등만 토닥였다고 한다.
이강석 선수는 지난해 여름 맹장 수술을 하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김관규 감독은 “맹장 수술을 하고 월드컵 랭킹 1위를 달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력이 굉장히 뛰어나야 한다”며 또 한번 안타까워했다.
다섯 선수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공통점은 내적 동기가 굉장히 강하고 승부 근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밴쿠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이 선전한 후 내 아이도 입문시켜볼까 고민하는 부모가 많다.
“체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승부 근성이 강한 아이가 좋아요. 집중력이 강하고 고집이 센 성격이죠. 나이도 크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경험으로 보자면 초등학교 때부터 타기 시작해 두각을 보인 아이들이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피드스케이팅은 한번 시작하기가 어렵지 발을 담그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재밌는 운동입니다.”
김관규 감독의 딸 민지(10)도 현재 스피드스케이팅을 배우고 있다. 그는 민지가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쯤이면 지금보다 스피드스케이팅이 더 발전해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올림픽의 성과로 스피드스케이팅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정부의 지원은 더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훈련할 수 있는 곳이 태릉국제스케이트장 하나뿐입니다. 전국 초등학교에 스피드스케이팅 팀은 하나도 없고요. 선수들이 열어놓은 길이 끊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묻자 그는 벌써 2014년 소치올림픽을 말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어요. 밴쿠버는 잊고 소치만 생각하며 다시 훈련해야죠. 저는 1년 전에 짰던 계획표와 비교해 보완하는 일부터 하려고요. 각 선수들의 단점을 보완하면 다시 정상에 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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