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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인 아이들의 대모 김현덕

“뿌리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의 뿌리가 돼주고 싶었어요”

글 이영래 기자 | 사진 홍중식 기자

입력 2009.06.17 17:52:00

47년간 스웨덴에서 살아온 정신과 의사 김현덕씨는 1만여 명에 달하는 스웨덴 한국인 입양아의 대모로 통한다. 입양아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살아온 그가 모처럼 모국에 돌아와 지난 30여 년간의 기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제 우리도 해외입양의 결과에 대해 논할 때가 됐노라고.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인 아이들의 대모 김현덕


1958년 윤용만·윤감희 남매는 스웨덴으로 입양됐다. 그들은 각각 여덟 살과 네 살이었으며 목수 아버지와 유치원 교사 어머니를 양부모로 두게 됐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 양부모는 두 아이를 처음 맞이하던 순간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이들은 집 안 구석구석에 음식물 조각을 숨겨놓았다. 피아노 아래에 소시지 조각이 있거나 소파 쿠션 밑에 빵 조각이 뭉쳐 있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누군가 건드리기라도 할라치면 그 자리에서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내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요나스(윤용만)가 손에 감자를 쥔 채 잠이 들었다. 나는 아이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감자를 빼냈다. 자정이 넘어 우리 부부는 아이가 마구 질러대는 소리에 잠을 깼다. … 손에 감자를 쥐어주자마자 아이는 바로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기자가 보고 들은 것이 적은 탓이겠지만 이제껏 해외 양부모가 이렇듯 상세히 당시의 기억과 소회를 피력한 글들을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탓인지 기분이 묘했다. 58년, 그때가 어떤 때일까? 색바랜 낡은 사진이나 ‘그때를 아십니까’류의 흑백 영상에서 본 몇몇 장면들이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히 가늠해내기 쉽지 않다. 다만 부모 없이 버려진 아이들이 당시 한국에서 어떤 식생활을 했을지 대충 짐작되는 바가 있을 뿐이다.
낯선 이국의 땅, 북유럽의 한쪽에 어느 날 던져진 여덟 살배기 소년이 잠자리에서조차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한 것이 고국에 대한 기억, 생모의 손때가 묻었을 작은 장난감 따위가 아니라 감자였다는 사실은 그 탓에 새삼 놀랍지는 않다. 그럼에도 선뜻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여운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은 그 담백한 기록 속에서 당시 그 양부모가 느꼈을 애틋함이 지면 너머까지 번져오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인연’(사람과 책). ‘스웨덴이 기른 우리 아이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을 엮은 이는 김현덕씨(72)다. 정신과 의사인 그는 서울 국립의료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만난 스웨덴 의사와 결혼해 62년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30여 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그는 수많은 한국인 입양아들의 상담역을 맡았고, 또 그들의 역할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양부모들의 수기를 모아 책을 엮은 것이다.

62년 인턴 근무 중 스웨덴 의사 남편 만나 스톡홀름으로 이주
“제가 스웨덴에 갔을 때는 한국 사람이 채 10명도 되지 않았어요. 6·25전쟁 때 부산야전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다 스웨덴 의사와 결혼해 스톡홀름에 와 있던 분들이었죠. 62년이었으니까 제 나이가 스물네 살, 국제 결혼이란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건지도 몰랐어요. 그땐 너무 어려서(웃음).”
5월14일 스웨덴으로 돌아간다는 김현덕씨를 12일 오후에 만났다. 그는 바퀴가 달린 작은 여행가방을 들고 모처럼의 고국나들이의 마지막 일정으로 쇼핑을 즐기던 중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이런 이야기는 밝고 재미나게 써야 한다는 거 아시죠?”하며 다짐받듯 물었다.

“6·25전쟁 안 겪었죠?(웃음) 전쟁 끝나고 참 우리 못살 때였어요.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세 나라가 그때 우리나라에 의료팀을 보내서 세운 게 국립의료원이었어요. 59년에 병원을 지었는데, 의대는 없고 부설간호학과만 있었죠. 그래도 인턴은 뽑아서 공부는 가르쳐줬어요. 60년에 뽑힌 분들이 인턴 1기, 그리고 제가 61년에 인턴 2기로 국립의료원에서 근무를 했죠. 그때 남편을 만났어요.”
국제결혼이란 게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신분 확실한 유럽의 부국(富國) 의사에게 시집가는 그녀를 보는 시각은 부러움 반, 시샘 반이었다고. 60년대 초, 가난의 시대를 겪던 한국의 스물네 살 여인이 무려 3개월간 홍콩, 싱가포르, 파리 등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나라를 거치는 호사스런 신혼여행 끝에 스웨덴으로 가는 길이니 오죽했으랴 싶다.
아시아인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당시의 북유럽, 혹 인종차별을 받지 않았냐고 묻자 그녀는 “모두 잘해줬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치냄새나 마늘냄새를 싫어하지 않더냐고 묻자 그녀는 “훗날 그런 일도 겪었지만, 처음엔 먹고 싶어도 고춧가루는커녕 배추도 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말이 안 통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따로 살기는 했지만 간혹 시집 식구들이 오기도 했고, 남편 직장 동료들이 집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처음엔 스웨덴 말을 못하는 그녀를 위해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채 10여 분도 지나기 전에 왁자지껄 자신들만의 파티에 빠져버리고, 그는 군중 속의 외톨이가 돼 멍하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입양아들에겐 생모에게 ‘왜 나를 버렸냐’고 물어볼 권리 있어요”
슬하에 2남2녀를 둔 그는 62년 큰아들을 낳았고, 이듬해엔 딸을 낳았다.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그렇게 아이를 낳고 세월이 가면서 점차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졌다. 어느 날 문득 그는 다시 의사로 일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한국 국립의료원에서 인턴생활까지 했지만 스웨덴에서 바로 의사로 근무할 수는 없었다. 스웨덴 의사면허를 받을 수 없을까 문의했더니 보건당국은 그에게 부인과·이비인후과·소아과 교수 3명에게 교육수준에 대한 체크를 받아올 것을 요구했다. 각각 한달씩 그녀를 체크한 교수들은 ‘의사자격이 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보건당국은 그에게 내과·외과·정신과에서 각각 6개월씩 1년 6개월 동안 연수를 받도록 요구했다. 그 과정을 다 거친 후인 68년에야 그녀는 의사로 일할 수 있었다.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많은 한국 입양아들과 그 양부모들을 만나게 됐지요. 60년대부터 한국 입양아가 늘기 시작하더니 70~80년대에는 1년에 8백~9백 명씩 입양돼 왔어요. 당시에 해외입양을 허용하던 나라가 인도와 우리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한국 입양아를 스톡홀름 시내에서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당시 농담처럼 요람차 안을 들여다보면 다 한국 아이라고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한 통계에 따르면 소아정신과를 찾는 해외입양아의 비율은 보통 아이들의 4배에 달한다고 한다. 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율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가령 그래요. 저는 스웨덴에서 47년을 살았어요. 그런데도 길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저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요. 당연히 스웨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입양 온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시골 조그만 마을로 입양 온 아이의 경우, 동네 사람들은 다 그 아이가 ‘한국에서 온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큰 도시로 나오면 사람들은 그 아이를 입양아라고 생각지 않고 이민 왔거나 유학 왔다고 생각하죠. 아이덴티티(정체성)의 혼란이 계속되는 거예요.”
‘나는 엄마의 아들일까, 아닐까’ ‘나는 한국 사람일까, 스웨덴 사람일까’ 같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거듭되다 보면 혼란이 생기고, 그 혼란에 떠밀려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했다. 때문에 그는 그런 아이들에게 ‘뿌리를 찾아볼 것’을 권유했다. 한국 역사책, 한국 소설책을 읽을 것을 권하고, 또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생부, 생모를 찾아볼 것을 당부했다.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인 아이들의 대모 김현덕


‘우리는 마르쿠스에게 입양아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이야기해주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건너왔으며, 그래서 머리가 검다는 것도. 세살이 되자 마르쿠스는 아기가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가끔 마르쿠스는 자기가 내 배 속에 들어 있었는지 슬그머니 물어보곤 했다. 내가 무심결에 “응응” 하고 대답하면, 아이는 대뜸 “그렇지 않아요! 난 엄마 배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고요!”라고 말했다.
햇살 좋은 어느 날, 나는 아이와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나의 그림자와 겹치도록 내 뒤에 서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쨘, 드디어 엄마 배 속에 있게 됐네.”
이따금 아이는 한국의 생모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생모도 자신처럼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못 찾아도 상관없어요. 하는 데까지 해야 후회도 안 남고, 정체성의 혼란에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니까요. 한국에서 엄마를 만난 아이들은 달라져요. 아이들은 생모를 만나면 제일 먼저 ‘왜 나를 버렸냐’고 물어요. 아이들에게는 분명 있지요. 물어볼 권리가. 그러면 엄마들은 ‘내가 잘못했다’고 통곡하며 매달려요.
아이들은 자기를 끌어안고 우는 엄마한테 감동을 받아요.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이 희극이 되는 거예요. 한국에서 엄마를 만나고 돌아온 아이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익살스럽게 징그럽다는 제스처를 해요. 어른이 된 나를 엄마가 끌어안고 잔다 이거죠(웃음). 그게 낯설면서도 좋은 거예요.”
물론 상처를 받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아이를 낳은 사실을 속이고 재가(再嫁)한 한 어머니는 남편 돌아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먼 유럽에서 생모를 찾아 한국까지 온 아들을 앞에 두고 계속 시계만 들여다봤다고. 그 아이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나를 만나러 나온 건지 시계를 보러 온 건지 모르겠더라”며 투덜댔다. 하지만 뿌리를 찾는 길이 되건, 또는 상처를 도려내 미련을 버리는 길이 되건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야 새살이 나듯 비로소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그 또한 12세 나이에 전쟁고아 돼 동병상련의 정 느껴
“나는 한국 사람이면서 동시에 스웨덴 사람이라고 느끼면 돼요. 혼란스럽기만 하던 아이덴티티가 융화되면 비로소 삶을 살아갈 힘을 얻어요. 키가 작다고, 얼굴이 까맣다고, 코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낮다고 소학교에서부터 놀림받고 구박받던 아이들이 나는 멀티컬처럴(다문화적)하다고, 나는 두 문화의 장점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물론 모든 입양 스토리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모든 양부모와 입양아가 원만한 가족관계를 꾸리는 것도 아니다. 김현덕씨를 거쳐간 많은 사연 속에는 아픈 사연도 많다. 그리고 그가 엮은 수기집에는 그 고통에 대한 기록도 상당수 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한국 의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찾아온 것인지, 그가 먼저 입양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인지.

“입양아들은 가뜩이나 생긴 걸로 놀림을 받기 일쑤였는데, 70~80년대 TV에 나오는 한국의 이미지는 너무나 어두웠지요. 아이들이 그런 걸로 상처를 받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서 한국 문화와 역사를 가르쳤지요. 자부심을 가지라고, 너희는 열등하지 않다고. 스웨덴 처음 와서 저 또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어요. 그걸 극복했을 때 비로소 내게 힘이 생겼고, 그 힘으로 입양아나 이민 온 다른 외국인들을 도와줄 수 있었죠. 정신과 의사로서 그것이 나의 힘이었어요. 나도 겪었다는 거. 그래서 많이들 절 찾았는지 몰라요.”
더 이야기를 이어가자 결국 그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내려놓는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별로 없는데 사실은 저도 전쟁고아였어요. 6·25가 터졌을 때 전 열두 살이었어요. 아버지는 서울이 점령되자마자 인민군에게 끌려가셨죠. 그 이후론 소식을 몰라요. 그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플루트를 부셨던 이모부도 북으로 끌려갔는데, 어쩌다 이북방송 들으면 이모부 플루트 연주가 나오곤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 소식은 이후로도 전혀 들리지 않았죠.”
중앙청 바로 앞 적선동이 그의 집이었다고 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당했고, 중앙청 앞에 인공기가 내걸렸다. 인공치하에서 그렇게 몇 달, 서울이 국군에 의해 수복되기 직전 이번엔 어머니마저 끌려갔다. 인민군의 소집에 세 살배기 막냇동생만 데리고 나갔던 어머니는 그 이후로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풍문에 당시 끌려간 사람들이 한 창고에 갇혀 있다 참살됐다고 전해들은 게 다다. 아마 그때 동생도 같이 세상을 떴으리라고 그는 추측했다.
“아니면 어디 고아원에선가 자랐겠죠. 자기가 누군지도, 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으니까. 입양아들을 볼 때마다 혹시 살아서 이렇게 어디론가 입양 가지는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확률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없었을 거예요. 세상이 워낙 험하던 때니까 아마 두 분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남은 두 동생을 데리고 전쟁통에서 살아남아야 할 의무는 장녀인 그의 몫이 됐지만 당시 김씨의 나이는 고작 열두 살에 불과했다. 다섯째 이모를 따라 대구로 피란을 내려갔고, 거기서 다시 부산으로 보내졌다. 의사였던 셋째 이모가 부산에 병원을 개업하며, 집안 고아들을 전부 도맡기로 한 덕분이었다.
“외할머니집이 개성이라 이모들이 서울 와서 공부할 때 우리 집에서 살았어요. 그 시절 철없던 제가 셋째 이모를 그렇게 타박했대요. 여기는 우리 집이니까 이모는 너네 집 가라고. 그런데 그 이모가 절 키워주게 된 거였죠(웃음).”
스웨덴으로 시집온 후, 아직 나이 어린 둘째 남동생은 그가 스웨덴으로 불러들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갓 다섯 살에 불과하던 남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웨덴으로 건너왔다.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그 남동생 또한 스웨덴에 적응하는 데 상당히 오래 고생했던 듯싶다.
“(둘째 동생은) 여기서 휴대전화 회사에 다니다가 은퇴해서 지금은 호주 가서 살아요. 호주가 살기 좋다고. 첫째 동생은 한국에서 쭉 살면서 농장을 했고. 날 길러줬던 우리 셋째 이모는 지금 LA에 가 계시고. 우리 집안 최고 어른이시죠. 가끔 가서 한 번씩 봬요. 그렇게 다 한 세월이 지나간 거죠.”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당부를 했다.
“이런 이야기는 밝고 재밌게 써야 해요. 입양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요.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에 아이들이 스웨덴같이 잘사는 나라에 와서 산 건 어떤 의미에선 나름대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을 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스웨덴 사람들은 기독교 사상 덕분인지 기르는 부모들은 양부모건 친부모건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입양을 하죠. 우리는 어떤지 한 번 다 마음을 열어놓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해봐야 해요.”
언제 고국에 또 오게 될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마 또 오게 될 거라고 그는 말했다. 혈연을 나눈 친지들 대다수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터라 핏줄을 찾아올 일은 없다 하더라도 어찌됐건 다시 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47년을 떠나 살았지만 뿌리가 깊어요, 이 땅에”하고 말했다.

여성동아 2009년 6월 5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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