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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진정자 할매 남다른 인생

15년에 걸쳐 5천만원 빚 다 갚은 쪽방촌 또순이

글 이영 기자 ㅣ 사진 지호영 기자

2009. 06. 16

서울시 중구 회현동 쪽방촌. 진정자 할머니는 새벽 6시면 식당 문을 열고 손님을 받는다. 지난 88년, 5천만원의 빚을 지고 상경한 이래 20여 년 동안 단 하루도 쉬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악착같이 벌어 매일 한푼두푼 갚은 덕에 칠순에 이르러서야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그의 인생 이야기.

진정자 할매 남다른 인생


몸 하나 뉘면 꽉 찰, 채 3.3㎡도 되지 않는 공간에 온갖 세간을 층층이 쌓아 탑을 만들고 그 아래, 머리를 뉘어 잠만 자는 곳을 쪽방이라고 한다. 서울역이 마주 보이는 남대문경찰서 뒤편, 비탈길을 100m 정도 올라가면 회현동 쪽방촌이 골목 안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옛 소설 한 대목에서, 또는 신문기사에서 그 존재에 대해 읽어본 기억은 있지만 서울역 앞을 수없이 지나다녔음에도 한 번 들러본 적이 없던 곳이다. 마치 장롱 밑에 버려진 옛 신분증처럼 기억 어딘가에는 있되 새삼 꺼내들지는 않는 존재로 쪽방촌은 서울 한복판에 그렇게 남아 있다.
방 10여 개에 화장실 하나, 샤워시설도 변변히 없고 세탁조차 불편하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라면 등을 끓여먹기는 하지만 제대로 취사를 할 수 없는 여건이다. 때문에 이렇듯 빈한한 풍경 속에서도 여지없이 그 한 가운데 식당이 하나 있다. 테이블 3개가 오롯이 놓인 구멍가게 같은 식당. 간판도 따로 없고 오로지 ‘가정식 백반’이라고 쓰인 빨간색 글자가 다다. 그 위에 누군가가 굵은 매직펜으로 ‘삼천오백원’이라고 가격을 적어놓았다.
이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쪽방촌 식구들이다. 어느 해인가 서울대 차석 합격자가 이 쪽방촌에서 나왔고, 또 이곳에서 살던 어느 집 아들은 검사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은 이 식당에서 허기를 비우고 천원짜리 몇 장, 백원짜리 동전 몇 닢을 세어 값을 치른다. 식당 규모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별스럽지 않아보일지 모르지만 찬수만 여덟 개, 어느 한정식집 못지않은 맛이다. ‘시골밥상 할머니’로 통하는 진정자 할머니는 이 근처에서 벌써 20여 년간 장사를 해온 터줏대감이다.
“88년 올림픽 하던 해 봄에 상경을 했어요. 군산에서 어패류 양식장을 하다가 빚만 5천만원을 지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어. 나는 서울 가락시장에 친구가 있어서 거기서 좌판을 같이했지. 봄에 와서 추석 넘어서까지 했응께 한 다섯 달 남짓 했을 거여. 큰아들은 김공장에서 일을 하고, 둘째는 군대 가고, 셋째는 의정부 벽돌공장으로 가고 다 그렇게 흩어졌어.”
남편과 막내아들만 고향에 남고 가족들은 그렇게 하나둘 일자리를 찾아 대처로 나왔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송금을 해야 했고, 주변 친지 및 동네 사람들에게 진 빚을 한푼이라도 갚아야 했다. 그러나 그 큰 빚을 갚아가며 생계를 여미기엔 좌판 수익이란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진 할머니는 처음 쪽방촌과 인연을 맺었다. 89년 처음 그가 연 가게는 지금 가게보다도 작았다고 했다. 테이블 2개로 꽉 차는 규모였다고. 라면이 5백원, 백반이 1천원. 그마저도 돈을 제대로 받기 힘들었다.
“떼인 외상값이 한 해 50만원씩은 됐을 거요. 외상이면 괜찮게? 밥 먹고 그냥 가도 잡지도 못혀. 흉악스레 생긴 놈들이 토끼장(경찰서) 갔다왔다, 큰집(교도소) 갔다왔다 하면서 드나들었으니까. 밥 먹고 그냥 나가도 돈 달란 소리도 못했어. 그래도 그렇게 여기서 번 돈으로 영감하고 나하고 20년 산 거여.”
무엇보다 5천만원의 빚이 큰 문제였다. 각지로 흩어진 다섯 남매가 힘을 다해 돈을 보탰지만 당시 5천만원이란
돈은 그들이 갚기엔 너무나 엄청난 돈이었다. 빚은 도저히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형틀이 돼 그들을 옥죄었다.
“우리처럼 어수룩한 사람들은 남의 빚 떼먹지도 못해요. 빚 갚는 재미로 산다 하고 말은 했지만 희망 같은 걸 생각하면서 살면 그리 못 살지. 그냥 산다 하고 살았어. 그냥 목숨이 있응께 산다 하고. 아따, 다 잊고 사는 걸 뭐 하러 물어본다나? 잊고 사니까 사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살지도 못하는 겨.”
허공에 시선을 두고 지난 세월을 더듬던 그는 버럭 역정을 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덕담 삼아 이야기 좀 더 해달라’는 실랑이가 몇 번이나 이어진 후 그는 “조금 어렵다고 죽고, 자살하고 그러면 안 돼. 죽을 용기 있으면 그 용기 가지고 살아야지” 하고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진정자 할매 남다른 인생

“남은 빚은 자식들에게 진 빚인데 그건 저승 가서라도 갚아야지”


“92년부터는 쪽방에 방 두 개를 얻어서 그래도 우리 식구 다 모여 살 수 있었지. 다시 모여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더라고. 중학교밖에 못 가르쳤던 우리 셋째도 신문배달을 하면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이 나이 되도록 우리 집 하나 못 가지고 사는 처지지만 어찌 그리 살았네. 그라도 이제 그 빚은 다 갚았응께.”
죽을 때까지 도무지 벗어날 수 없을 듯했던 5천만원의 빚을 다 갚은 것은 지난 2003년. 그간 온 가족이 한푼두푼 벌어 갚아온데다 천행으로 새만금개발사업으로 어패류 양식장을 하던 땅이 보상을 받으면서 15년간 이어져온 채무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덧 70을 바라보던 나이, 자식들은 장성했고 빚은 갚았지만 생계의 무게는 여전했다. 무엇보다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를 보내지 못한 셋째와 막내 아들에 대한 마음의 채무는 더욱 커져갈 뿐이었다.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그 무게를 덜고자 그는 다시 돈을 빌렸다. 서울역 쪽방촌에서 빈민봉사운동을 펼치는 ‘나사로의 집’ 김흥용 목사(72)를 통해 ‘밑천 나눔 공동체’(현재는 서울 중구의 ‘높은뜻 숭의교회’가 운영하는 ‘열매나눔재단’에 흡수됨)를 소개받은 그는 그 단체에서 3백만원을 빌렸다. 신용도 재산도 없어서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담보 없이 장사 밑천 수백만원을 저리로 빌려주고 자활을 돕는, 이른바 ‘마이크로 크레딧’ 대출이었다.
그 3백만원을 종자돈으로 그는 지금 이 가게를 열었다. 역시 작기는 매한가지지만 이른바 ‘확장 오픈’을 단행, 지금은 테이블 3개의 식당을 운영 중이다. 그는 이 식당을 하며 돈이 생기는 대로 매일 5천원씩 채무를 갚아나갔다. 돈이 수중에 있으면 쓰게 되니까 단돈 얼마라도 매일 갚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드디어 지난 2006년 1월, 돈을 빌린 지 2년 만에 그 돈을 다 갚고 그는 이제 아무런 빚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자는 후암동에 지하방을 얻어서 영감하고 같이 살어. 이 동네 헐리면 이제 나이도 있으니까 고만할지 또 어디 딴 데 가서 식당을 할지는 봐야 알겄지. 이렇게 얼굴에 풍까지 왔는데 몸이 어떨까 싶어. 힘들든 뭐 하든 그냥 살면 사는 거여. 그냥 살면 사는 거지. 남에게 진 빚은 없지만 자식들에게 진 빚이 제일 가슴 아퍼. 그건 저승 가서라도 갚아야지.”
인터뷰 내내 그는 한손으로 얼굴 반쪽을 가렸다. 사흘 전인가,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얼굴 근육이 마비됐다고 했다. 침을 맞으러 다니는데 다행히 조금씩 차도가 있어 큰 걱정은 안 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빚 때문에 마음고생은 안 하니까 몸은 좀 아파도 사는 것은 좀 수월하다고. 조만간 재개발로 쪽방촌이 헐린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어떻게든 살게 돼 있다는 것이 그가 70 인생 동안 깨달은 삶의 깊고 깊은 뜻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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