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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떠나보낸 서갑숙 가슴 아픈 심경 고백

글 강은아 ‘자유기고가’ | 사진 조영철 기자

2009. 05. 22

연기자 서갑숙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지난 3월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어머니를 여읜 것. 그가 두 딸을 데리고 이혼을 했을 때도, 성 체험서를 펴내 사회적 논란에 휩싸였을 때도 언제나 그의 편을 들던 어머니였다. 자신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어머니에게 투정도 부렸지만 그는 지금은 그 잔소리마저도 가슴에 그리움으로 박힌다고 한다.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떠나보낸 서갑숙 가슴 아픈 심경 고백

“나이 오십이 다 된 딸 끝까지 보살펴준 어머니, 평생 잊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이 세상에서 나를 무조건 믿고 따라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을 살아갈 충분한 힘이 돼요. 어머니는 세상의 오해와 비난에 지쳐 돌아오는 나에게 늘 다시 일어날 힘을 주는 생명의 원천이었죠.”
서갑숙(48)은 결혼생활 10년을 빼고 늘 어머니와 함께했다. 이혼 전에도 주말이면 으레 아이들과 함께 어머니를 찾았다고 한다. 모녀지간이 다 그러려니 싶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어머니 이상의 정신적 지주와 같았다. 그런 어머니가 지난 3월30일 지병인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어머니는 서너 달 전 감기 증세로 병원을 찾았다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고인의 장례식은 경기도 인근 한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스님의 불경 외는 소리가 잔잔히 울려퍼지는 공간에서 서갑숙은 하얀 소복을 입고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극단의 슬픔을 담은 처연함이 서려 있었다.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른 건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 때문. 서갑숙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과거 어머니를 통해 불교에 입문해 출가한 한 스님을 우연히 만나 그에게 장례 절차를 부탁했다고 한다. 서갑숙은 “어머니는 그분을 부처님께로 가는 길을 안내했고, 그분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줬다”고 말했다.

돌아가시기 전 함께 여행 많이 못 다닌 게 못내 아쉬워
서갑숙은 자신의 어머니를 ‘붓꽃’ 같다고 말했다. 붓꽃은 꽃봉오리가 먹물을 머금은 붓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서양에서는 잎이 칼을 닮았다 해 용감한 기사를 상징하기도 한다. 평생 마르지 않는 사랑으로 자식들을 위해 세상 모든 난관 앞에서 칼을 높이 세웠던 어머니야말로 용감한 기사와 같았다는 것.
“어머니는 제가 뭐를 해도 다 잘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연극영화과를 가겠다, 방송국 시험을 치겠다, 누구와 결혼하겠다’고 할 때마다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셨죠. 결혼 전까지도 여자가 집안일 잘하면 일복 생긴다면서 집안일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셨어요.”
어머니를 여의고 가장 아쉬운 건 최근 몇 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여행다운 여행을 가지 못한 것.
“어머니가 인천 소래포구를 좋아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다녀왔으면 좋았을 텐데…,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안 갔나 몰라요. 소래포구에서 싱싱한 게를 사다가 간장게장 담그시는 걸 참 좋아하셨거든요. 병원 침대 위에서 점점 생명이 꺼져갈 때도 오로지 자식들 고생한다며 걱정이 많으셨어요. 만약 저라면 남겨진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자식들에게 꼼짝 말고 옆에 붙어 있으라고 엄포를 놓았을 텐데 말이죠.”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떠나보낸 서갑숙 가슴 아픈 심경 고백

임종을 앞둔 병실에서는 호흡과 맥박수가 현저하게 줄어들면 환자를 간호사실 옆에 있는 처치실로 옮긴다. 그곳에 들어가면 환자 대부분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는 밤 12시쯤 처치실에 들어가셔서 그 다음 날 아침 9시쯤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두 시간 전부터는 동공이 풀리고 가느다란 숨 줄기로 어렵게 호흡을 하셨죠. 잠깐 숨을 몰아쉬시더니 그대로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편안하게 이 세상을 떠나시더라고요. 피를 토하며 힘들게 돌아가셨던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참으로 온유하고 평화로웠어요.”
서갑숙은 어머니의 시신을 붙들고 “엄마,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극락세계 가셔야 하니 어디선가 밝은 빛이 보이면 그 빛을 따라 편히 가세요” 하고 울며 말했다고 한다. 화장 후에는 유골을 산이나 바다에 뿌리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모셔왔다고. 집착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지금은 그렇게라도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며 눈물을 보였다.
“죽음이 두려운 건 잊힌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이 퇴색되고 그러다 결국은 잊게 되니까요. 그리고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없고, 마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픈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떠나시던 날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드렸어요.”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떠나보낸 서갑숙 가슴 아픈 심경 고백

손녀딸들에게 요리 가르쳐주며 천천히 떠날 채비 하신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혼수상태에 빠졌던 어머니는 잠시 건강이 좋아졌을 때 병원을 나와 한동안 집에 머물며 차분히 여생을 정리했다고 한다. 그동안 소원했던 친구, 친인척을 만나 평생 마음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고. 따로 유언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떠나고 난 뒤를 생각하며 보이지 않게 천천히 떠날 채비를 했다고 한다.
“제가 요리를 잘 못해서 저 대신 손녀딸들에게 요리를 가르쳐주셨어요. ‘닭찜은 이렇게 해야 네 엄마가 잘 먹는다’ 하면서요. 그러면 우리 딸들은 ‘설마 할머니 딸 굶길까봐요?’하면서도 ‘어때요? 할머니 맛이랑 비슷하죠?’하며 열심히 배웠어요. 저는 어머니한테 ‘광수(서갑숙의 남동생)한테 누나 말 좀 잘 들으라고 얘기해줘요’ 하고 부탁했고요.”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걱정했다고 한다. 나이 오십이 다 돼가는 딸이 뭐 그리 불안했던 걸까. 식사 때만 되면 어머니는 “오른손으로 숟가락 잡고, 밥 뜨고, 김치 얹어서 꼭꼭 씹어 삼켜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내가 아기예요?” 하고 투덜대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떠난 지금은 잔소리마저도 그리움으로 가슴에 박힌다고.
“어머니는 살아생전 손녀딸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셨어요. 제가 늘 ‘너희들을 이해한다. 너희가 알아서 해라’ 하고 한발 물러나 있으니까 어머니가 직접 나서서 아이들의 기강을 잡으신 거죠.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요.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가 돌아가신 것 같다고 할 정도죠.”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떠나보낸 서갑숙 가슴 아픈 심경 고백

평생 요리와는 담을 쌓고 지냈던 그가 요즘에는 어머니를 대신해 부엌에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그나마 자신 있는 요리는 된장찌개와 소고기국. 과거 어머니 옆에서 슬쩍 보았던 맛내기 비법을 따라 해보지만 역시 똑같은 맛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이제는 먹기 싫을 땐 내 맘대로 안 먹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도 잠시, 어머니가 제게 하셨던 것처럼 어느새 제가 딸들을 위해 요리도 하고 아이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도 내리게 되더라고요. 어머니 자리가 사라진 게 아니라 제가 그 자리로 ‘취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현재 애니메이션고등학교 영상연출과 3학년인 둘째 딸은 지난해 그와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영화 ‘숨은 작은 숨’을 제작해 SBS 영상대전 청소년부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야기는 만삭의 한 여인이 투명한 아기를 낳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인은 두려운 마음에 아이를 상자에 담아 버리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하고, 그때 여인의 어머니가 나타나 그와 아이를 돌봐준다. 그동안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여인은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손길을 보며 새삼 사랑을 깨닫고, 투명해서 보이지 않던 아이도 점점 예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서갑숙 모녀 3대가 일궈낸 역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 서갑숙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 중인 큰딸도 조만간 모녀합작품을 내놓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며 미소 지었다.
남자친구 대신 오랜 벗들과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게 더 즐거워
그는 지난 99년 서울을 떠나 경기도 남양주시로 거처를 옮겼다. 전남편 노영국과 이혼한 뒤 공기 좋은 곳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몸과 마음을 쉬겠다는 생각이었다. 그해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성 체험을 담은 책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펴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는 사회적 논란의 주범으로 방송국에서 퇴출까지 당했다. 2002년 고깃집을 열면서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갑상선 항진증에 걸려 고생도 했다.
“지금까지 음식점 하는 걸 보면 이쪽 일을 할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성격이 이기적이다 보니 지금까지 모든 일을 제 뜻대로 해왔거든요. 하지만 음식점은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는 기회죠. 물론 돈을 받고 팔긴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차리는 건 일종의 ‘보시’라고 생각해요. 손님들의 거친 행동이나 기분 나쁜 소리에도 이제는 화내거나 겁내지 않아요(웃음).”
어머니를 여의고 한동안 마음 추스르기에 바빴던 그는 얼마 전부터 잠시 중단했던 등산을 다시 시작했다. 보통 아침 10시부터 정오까지 산을 오르는데, 땅의 기운을 느끼고 자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다고 한다. 그는 “청설모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청설모가 자기가 힘들게 따서 모아놓은 도토리를 왜 사람들이 주워가느냐고 난리”라며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의 편견, 나이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그이지만, 요즘 들어 그는 머릿속으로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자주 떠올린다고 한다. 두 딸의 엄마로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누나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많다고.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결국 그는 ‘연기’라는 종착역에 도착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선스럽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기회가 찾아오길 바란다”는 그는 “오랫동안 한적한 교외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하다 보니 생각도 담백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03년 펴낸 두 번째 책 ‘서갑숙의 추파’에 소개된 남자친구 M과는 오래전에 헤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 그는 신기하리만큼 이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대신 오랜 벗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을 더욱 즐기게 됐다. 소소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러다가도 누군가 사그라진 열정에 불을 놓으면 금세 돈키호테처럼 저돌적으로 돌변할 거라고 해요(웃음). 하지만 지금은 숨고르기 중이라 생각해요. 사실 몇 년째 숨고르기만 하고 있는데, 이러다 숨넘어가겠어요(웃음).”
서갑숙은 “시원한 눈매에 따뜻한 턱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 ‘해바라기’(비트리오 데 시카 감독, 1970)의 여주인공 소피아 로렌을 닮고 싶은 배우로 꼽았다. “대지를 감싸안을 수 있는 모성이 느껴지는 배우이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서갑숙을 하루빨리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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