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갈 생각을 하면 걱정보다 기대가 커요. 제가 원래 자립심이 좀 강해서요. 하하. 하고 싶은 거요? 다양한 공부도 하고 싶고, 대학 신문사 활동도 하고 싶고, 연극 동아리도…. 좀 많죠?”
올해 2월 한국외대부속외고를 졸업한 김푸른샘양(19). 하버드, 예일, 다트머스, UC버클리, UCLA, 옥스퍼드, 런던정경대…. 그가 합격통보를 받은 대학들이다. 김양의 SAT 점수는 2400점 만점. 하버드와 예일대에 마음이 똑같이 기울어 진로를 고민 중이다. 이런 딸을 둔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국어교사인 정미영씨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 담담한 반응이다.
“사람들은 푸른샘이 방에서 공부만 한 줄 알아요. 하지만 그 반대예요. 어릴 때는 책을 읽고 놀러 다니느라 바빴고, 중고등학교 때도 봉사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어요.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인권활동도 했죠. 그런 점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습니다.”
혼자 떠난 영국 유학, 자립심과 공부의 즐거움을 배우다
외국대학에 도전하려면 영어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 김양은 영국에서 유학했기에 영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아는 친척 하나 없이 혼자 홈스테이를 하며 생활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단신으로 유학 갈 생각을 했냐”는 질문에 정씨와 김양이 동시에 비슷한 답을 내놓는다.
“첫째 아이인 푸른샘 오빠는 고지식하게 키웠어요. 완벽하게 국어교육을 한 뒤에야 영어를 가르쳤고, 학교에서 월반을 권해도 순서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한 귀로 듣고 흘렸죠. 그런데 큰아이를 키우다 보니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차 푸른샘이 영국 유학에 관심을 보였는데,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솔깃했죠. 물론 걱정도 됐지만 어릴 때부터 자기 일은 알아서 하는 편이라 아이에 대한 신뢰가 있었어요. 맞벌이 부부라 다섯 살부터 혼자 머리 감고 엄마 일을 옆에서 도왔거든요.”(정씨)
“그냥 영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유학 이야기를 꺼냈는데 정말로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처음에는 말도 안 통하고 어리둥절했죠. 하지만 두렵기보다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일단 말이 필요 없는 남자 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몸으로 친해진 뒤 차차 여자친구들도 사귀기 시작했죠(웃음).”(김양)
유학생활은 대만족이었다. 강요 없이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할 수 있었고, 사소한 것부터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까지 학우들과 토론하며 외연을 넓혔다.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 월반도 두 번이나 했다. 정씨는 “한국에 들어오고 싶다던 딸아이에게 ‘비행기 표가 없다’며 독하게 굴었지만, 혼자서 잘해준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저는 푸른샘에게 ‘엄마아빠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데 최선을 다해서 너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독려했어요. 어리지만 아이한테 진솔하게 속을 터놓은 거죠. 아이도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더 열심히 해줬고요. 유학시절 내내 이렇게 솔직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냈어요.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아서 그런지 중요한 시기에 떨어져 지냈지만 심리적 거리는 가까웠어요. 아이가 새벽에 아파서 전화를 걸어왔을 땐 저도 같이 울었지만, 서로 믿었기에 유학생활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죠.”
공부의 초석은 독서와 기록하는 습관!
정씨의 유학 결정에는 푸른샘양의 적성을 살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김양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 과학실험교실에서 선생님이 “여기서 왜 연기가 나느냐”고 물으면 “팝콘 같다”고 답했다. 과학적 물음도 문학적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유치원생 때 끼적인 글들은 또래에 비해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정씨는 “어린 시절 별명이 ‘꼬마 시인’이었는데, 문학을 공부하는 데도 영어는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엄마들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의 진로예요. 저는 아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도록 내버려뒀어요. 스케이트, 농구, 수영, 테니스 등 안 해본 게 없죠. 기회를 주고 체험을 하게 되면 차츰 적성의 범위를 좁힐 수 있으니까요. 제가 국어교사다 보니 푸른샘이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본인도 그게 가장 즐겁다고 하더군요.
엄마 정씨는 “독서와 다양한 문화 활동, 그리고 기록하는 습관으로 아이의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고 말한다.
아이의 행복을 생각하면 그게 무엇이든 아이가 즐거워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돕는 게 좋죠. 예컨대, 남자아이가 인형을 좋아하면 혼낼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관심과 소질을 키워주는 거죠. 두드러지는 적성이 없다면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분야를 선택해야죠.”
타고난 감성과 소질도 있었지만, 김양의 문학적 능력을 키운 8할은 독서였다. 김양은 국문학을 전공한 부모와 독서왕이던 오빠 덕분에 책을 끼고 살았다. 거실과 방은 물론 화장실부터 현관까지 집은 그 자체로 도서관이었다. 학교 공부의 밑거름 역시 독서였다.
“저는 독서가 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문자해독과 독서는 달라요. 부모는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필히 독서에 흥미를 느끼도록 신경을 써야 해요. 아이가 TV, 컴퓨터에 길들여지기 전에 책부터 접하게 해야 자율적인 독서가 가능하니까요. 함께 책을 읽고 질문으로 이해도를 확인한 뒤 사고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골라줘야죠. 유아 때부터 수준에 맞춰 차분히 독서를 해나가면 기초 이해력이 높아집니다.”(정씨)
“독서를 하다 보면 정보 소화 능력이 빨라지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떤 과목을 공부해도 시간 대비 집중력이 좋더라고요. 책을 통해 여러 방면을 접하니 공부도 즐거웠고요. 영국에 있을 때는 시험 스트레스가 없고 주변에 도서관도 많아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죠.”(김양)
정씨는 독서와 함께 글쓰기 습관도 강조한다. 소소한 일상이나 그에 대한 단상을 적다 보면 생각도 그만큼 자란다는 것. 김양 남매는 유치원 때부터 일기뿐 아니라 여행, 공연, 영화 등에 대한 감상을 토론하고 얘기했다. 정씨는 “경험은 일회성으로 넘길 것이 아니라, 자녀와 함께 그에 대한 생각을 나눠야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고 강조한다. 푸른샘이 썼다는 기록장에는 간단한 감상과 함께 영화 ‘포카혼타스’‘미녀와 야수’‘프리윌리2’ 등의 입장권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바람직하거나 배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독려
귀국한 뒤 김양의 생활은 봉사활동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중학교 2학년부터 5년간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고등학교 3년 동안 장애우권익연구소에서 인턴을 했다. 대충 흉내만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직접 수준별 수업을 계획하고 발품 팔아 현장조사를 하며 열정을 다했다.
이런 노력으로 국가인권위 실천사례 최우수상 및 인권논문상, 대한민국인재상, 중고생 자원봉사대회 친선대사상 등의 인권·봉사 관련 상을 받았다. 보통 중·고등학교 시절은 입시를 향해 내달리기 마련. 김양이 대외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정씨의 영향이 컸다.
“공부를 너무 일찍 시작하면 지칠 것 같아 초등학교까지는 독서와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했어요. 불안하기도 했지만, 책을 읽으며 쌓은 내공이 분명 발휘될 거라 믿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아이들 둘 다 다행히 공부는 잘했고요. 공부방 활동도 아이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제가 권했어요. 제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푸른샘은 영국에 다녀왔으니 영어를 가르치면 좋겠다 싶었죠. 동생들이 열심히 따라 하는 모습이 좋았는지 직접 수업계획표를 짜며 열심이더군요.”
고1 여름방학부터는 장애우권익연구소에서 일했다. 장애인 인권 침해사례가 필요해 연구소에 방문했다가, 관심이 생겨 인턴으로 활동하게 됐다. 지하철·백화점 등 공공기관의 장애인 편의시설을 조사한 뒤 개선해야 할 부분을 진정했다. 김양은 “당시 연구소의 조병찬 선생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며 “어머니도 ‘바람직한 일이니까 열심히 하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활동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부분은 장애인이라는 개념은 사람 몸이 아닌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거예요. 환경이 그 사람 위주라면 장애인이 아닐 테니까요. 부당한 부분을 찾아 진정활동을 많이 했어요. 한번은 남자화장실 깊숙이 자리한 장애인 화장실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부모님께 보여드렸는데, ‘이건 장애인과 여성의 이중 차별’이라며 열심히 하라고 독려해 주셨어요.”
김양은 한국외대부속외고 유학반에서 입시를 준비해왔다. 영국에서 귀국할 때는 국내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 가니 영국과 시스템이 너무 달랐다. 적응을 하긴 했지만, 다른 활동 없이 암기와 시험의 반복인 수업방식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외국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SAT 준비는 고1 말부터 준비했어요. 2주에 한 번씩 학원 주말반에서 공부했고, 영문법은 체계적으로 공부를 안 해서 그런지 힘들어 따로 한 달 동안 지도를 받았고요. 인문·사회 쪽 과목은 다 좋아해서 관련 책을 읽으며 공부하니 재미있었죠.”
김양의 꿈은 작가, 변호사, 기자, 활동가 등. 김양은 최근 공익변호사 모임인 공감에서 인턴으로 일한다. 인권에 관심이 많아 관련자료를 찾고 번역을 하며 변호사들을 돕는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친구들과 독서토론을 한다. 8월 출국 전까지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김양의 신조는 “후회 없이 살자”. 이런 김양의 미래에 대한 정씨의 바람은 “사회학을 통해 세상을 공부한 뒤 문학으로 그것을 담아내 누군가에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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