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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conomy Special/Self-Employed ①

연 15억원 매출 올리는 이기남 할머니

고추장 만들어 팔아

입력 2009.05.14 16:11:00

1인 창조기업의 모델로 거명되는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기남 할머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순창 고추장의 전통을 지켜온 그는 집에서 담근 고추장과 장아찌를 팔아 20여 명의 일손을 거느린 어엿한 기업을 일궜다
연 15억원 매출 올리는 이기남 할머니

88고속도로에서 순창IC로 나오자 아직 아무것도 심어지지 않아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토색 벌판이 펼쳐졌다. 전화를 걸자 “큰 느티나무 옆으로 난 샛길로 들어오면 금방이요” 하고 일러준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잎은 다 지고 마른 가지만이 앙상한 나무들뿐이라 수종 구분에 설은 도회 총각이 길을 헤아릴 방도가 없다. 결국 주소를 불러달라고 해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나자 화살표가 바로 뒤편 마을을 가리킨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좁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자 스무 채 남짓한 집들이 소담스럽게 들어찬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이기남 할머니 댁은 그 마을 가장 안쪽, 권씨 집안에 하사된 충효문 바로 너머에 있었다. 옛 시절, 순창에 터를 닦은 안동 권문의 일가들이 모여 살던 곳인 듯 근년에 새로 지은 듯한 양옥부터 이제는 폐가로 방치돼 문짝마저 부서져나가 안마당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는 집까지, 충효문을 끼고 들어선 집들의 문패에는 모두 권씨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충효문 옆으로 난 샛길 안쪽, 기와 처마가 물결을 이루는 고저택이 바로 이기남 할머니 자택이다. 굳이 설명을 붙여주지 않아도 기백년은 묵은 듯한 아름드리 통나무 기둥과 수십 간 풍채가 이 집이 바로 종갓집임을, 옛 영화의 중심지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앞 마당에는 청솔이, 뒷마당에는 대숲이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옛 대가집, 그 너른 뜰에는 한가득 장독이 들어차 있다.
“이 집이 옛날 양반집이여, 양반집. 권부자댁이라고 하면 이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저거 산 보이지? 저거이 마편 잡던 사람들 있던 곳이여. 저거 끝에서 저거 끝까지, 저 너머 금과까지 다 이집 땅이었어. 만석꾼 집안이었응께. 시아버지대에는 저거이 다 이 집 땅이었는데 이승만 정부 시절에 토지개혁한다고 다 남의 거 돼야부렸어. 가작(家作·소작을 주지 않고 손수 농사를 짓는 것) 일곱 마지기 남겨두고 3백석이 다 소작에게 가부렸어.”
안채 마루에 앉자 너른 벌판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이기남 할머니(88)는 아득한 시선으로 벌판의 끝에서 끝까지를 가리키며 연신 ‘저거서 저거까지, 저 끝에서 저거 끝까지’가 모두 당신네 땅이었던 옛 대의 영화를 자랑했다.

만석꾼 재산 현대사 굴곡 속에 다 잃고 홀로 일곱 남매 키워
“첨 시집을 와가지곤 이 집 일꾼들 밥 해주는 게 일과였어. 농번기엔 이 마당에 앉아 밥 먹는 사람만 칠십은 됐어. 밥만 짓는 걸로다가 보리쌀 한 가마가 들어가. 참거리까지 해대려면 하루 종일 밥만 혀. 이 집이 그런 집이었어.”
그런 만석꾼 부잣집이다 보니 음식 하나 먹는 것도 남들과는 달랐다. 보통은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이야기하지만 이기남 할머니가 겪은 시집살이는 시아버지 때문이었다. 미식가였던 시아버지 입맛을 맞추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던 탓이다.
“시어머니는 잘해주셨어. 시아버지가 무서웠지. 꼬막, 시아버지가 꼬막을 잘 자셨어. 요러쿠롬 보자기에 싸서 구워서 내는데 조금만 더 익혀도 금방 불호령이 떨어져. 너거 집 가서 다시 배워 오너라, 하고 혼이 났어. 얼마나 무신지 몰라. 더도 덜도 말고 입에 까서 넣을 때 피가 톡하고 튈 정도가 젤 맛나다고 거기 맞추라는 데 그기 여간 힘든 일이 아녀. 그 꼬막이란 게 잘 까지지도 않응께.”
고된 시집살이였지만 다정한 남편 덕에 행복한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 광복 후 귀국,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해 광주일고에서 교편을 잡았던 교육자였다고 한다. 여름이면 여수 오동도에 데려가 시원한 바닷바람에 더위를 식히게 해줬고, 멀리 서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곳저곳 남도 나들이를 함께 다녔던 할아버지. 그러나 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지난 70년대 초, 40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만석꾼 재산은 농지개혁으로 이미 흔적도 없었고, 남편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당장 생계가 막막해졌다. 손이 귀했던 집안이라 시어머니가 셋, 게다가 일곱 남매까지 건사해야 했다. 부잣집 망해도 삼대는 간다지만 장남이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무렵이었고 줄줄이 아래 동생들까지 공부시킬 생각을 하면 앞이 막막할 뿐이었다고 했다.
일곱 마지기에 배추를 심고, 무를 심어 수확이 나오는 대로 머리에 이고 가서 시장에 팔았다. 그래도 자식들 키우고 그 큰 집 살림을 유지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시아저씨가 고추장을 팔아보라고 일러주었다.
“그전부터 집에 온 손님들이 우리 집 고추장이 맛있다고 얻어가곤 그랬어. 그냥 가져가기 그렇다고 돈을 주고 가기도 했고. 그래서 고추장을 가져다가 장에 팔았지.”

연 15억원 매출 올리는 이기남 할머니

이기남 할머니는 전통고추장보존협의회 14명 중 유일하게 고추장과 함께 전통 장아찌 전수자이기도 하다. 자녀들이 가업을 승계한 터라 이기남 할머니 고추장은 대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알음알음 지인들을 통해 팔던 고추장은 지난 84년, 집 옆으로 88고속도로가 개통되자 순창의 토속상품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살림이 펴기 시작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기남 할머니의 고추장 제조는 사업화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는 장성한 아들들이 가전의 비법으로 담근 이 고추장의 사업성을 발견하고 ‘이기남 할머니 고추장’이라고 고추장을 브랜드화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판로를 개척했던 것. 한창 토속상품전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전통고추장보존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여기저기 행사장을 찾아 본격적으로 고추장을 팔기 시작했다.
“차에 실어가지고 서울에 가서 파는 데 하루에 8백만원어치를 판 적도 있어. 현대백화점인가 어딘가 하는 데서 행사한다고 해서 나도 거기 가 앉아 있는데 참 희한혀. 깎자는 소리 한 마디를 안 하고 달라는 대로 사가. 아마 시골 할맘이 설마 속이겠나 싶어서 그랬겄제.”
지금까지도 할머니는 당시 겪었던 서울 구매자들이 이해가 안 가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끔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물건을 사면서 깎자는 소리 한마디 없이 사는 사람들. 도대체 그 속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희한한 짓을 하며’ 열심히 사갔다고 한다.
일회성 기획전으로 팔았던 고추장이 워낙 인기가 좋자 백화점이나 마트 측에서 상설 판매코너를 내줬고, 할머니의 고추장 사업은 나날이 번창을 거듭, 사업화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서울 상설매장 판매직원은 별도로 치더라도 현재 고추장 담그는 일을 도와주는 일손만 10여 명에 이른다. 자녀들 중 넷이나 이 고추장 사업에 관여하고 있는데다 서울 매장 판매사원까지 합치면 무려 20여 명의 종사자를 둔 어엿한 기업의 오너인 셈. 요즘에는 주로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주문을 받아 택배로 판매하는데, 이날도 밀려드는 주문에 모두들 포장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아버지 때 재산을 거진 다 찾았어. 옛날 시아버지 때처럼 일손들을 많이 쓰지는 못하더라도 동네 아짐들 열 명이나 우리 집 일을 혀. 돈을 많이 주던 못혀도 할맘들이 앉아 놀면 뭐하겄서? 옛날처럼 권부잣집 소리는 못 듣더라도 마을 사람들 먹고살 일거리도 만들고, 내 할 도리는 했다 싶어.”
세상 누구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만석꾼 집안에 시집와 집안의 부침을 그 작은 한 몸으로 다 겪어내야 했던 할머니지만, 대가집 며느리의 책임감 때문인 듯 살림을 되찾은 것보다 마을 사람들 일자리를 만들어낸 것이 그녀에겐 더 큰 의미였던 듯싶다.

여성동아 2009년 5월 5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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