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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해피토크

남자들이여, 겨울잠에서 깨어나라

입력 2009.04.09 17:22:00

남자들이여, 겨울잠에서 깨어나라

박현웅 _ 피크닉 _ 30×43 _ 혼합재료 _ 2008


요즘 안방극장에는 멋진 남자들이 줄지어 나와 가뜩이나 TV를 좋아하는 나를 화면 앞으로 끌어당긴다. 최근 선풍적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만 해도 그렇다.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기고, 여자에게 선물도 잘 하는 구준표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묵묵히 도와주는 윤지후 같은 남자들은 그저 눈요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또 이게 트렌드에 민감한 건지, 주책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엔 별 관심 없던 아이돌 스타들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다. 데뷔 초기에만 해도 마냥 어려 보이던 동방신기와 SS501 멤버들이 훈남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해한다. 약간의 위안이자 변명거리를 든다면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 박완서 선생님, 곧 팔순을 앞둔 노작가님마저 어느 인터뷰에서 “구준표가 멋져 보인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거다. 내가 나이 들었다고 굳이 이순재, 신구 선생님만 사모하라는 법은 없다는 면죄부를 주신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여성화, 아줌마화된 중년 남성들
그런데 정작 TV 속 남자들은 날 행복하게 만드는데 TV 밖 남자들은 너무 실망스럽다. 꽃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남성적인 매력은 유지하길 바라는데, 나이가 들수록 주변 남성들이 여성화, 심지어 아줌마화되는 것이다. 특히 드라마를 즐겨 보던 아줌마들을 경멸하던 그들이 드라마에 푹 빠져드는 특징이 있다. 물론 내 주변의 남자라고 해봤자 40대 이상 아저씨들인데 독신, 돌아온 싱글, 유부남 가릴 것 없이 드라마에 열광한다. 그것도 사극이나 사회성 짙은 드라마가 아니라 멜로드라마, 또 막장드라마라고 폄하하는 드라마에.
얼마 전 한 모임에서 40~50대 남성들은 부끄러움 없이(?) 자신들의 드라마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남자가 봐도 김현중이는 참 잘생겼더라. 남들은 구준표가 좋다는데 난 윤지후가 더 마음에 들어. 그 자식 웃을 때 보면 꼭 나 어릴 때 같다니까 하하하.”
“넌 아이들도 아닌데 유치하게 ‘꽃보다 남자’를 보냐? 난 요즘 ‘미워도 다시 한 번’ 보는 재미에 산다. 대본도 탄탄하고 다들 연기는 왜 그렇게 잘하는지. 얼마 전에 최명길이랑 전인화랑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 봤어? 죽였어. 역시 관록은 무시 못한다니까.”
“그래도 역시 최강의 드라마는 ‘아내의 유혹’이야. 어쩌다 일찍 들어간 날 마누라가 보기에 한번 봤는데 정말 어이없긴 한데 아슬아슬해서 꼭 다시 보게 되더라고. 한 회에 그렇게 긴박한 구성을 담을 수 있는 드라마는 절대 막장드라마가 아냐. 요즘은 퇴근이 늦어지면 그 시간에 TV 틀어놓은 식당에 가서 밥 먹으며 그 드라마를 본다니까.”
“난 기러기아빠로 살다가 지난해 말부터 어머니랑 살잖아. 지난번에 내 방에서 주말극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데 우리 어머니가 과일 갖고 방에 들어오셨다가 날 보더니 한숨을 푹푹 쉬시고 가시더라. 왜 자꾸 눈물이 많아지나 몰라.”
왜 대한민국 중년 남자들은 드라마에 열광할까. 성 정체성에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한국 드라마가 정말 재미있어서? 아니면 중년이 돼 여성호르몬이 듬뿍 나오기 때문에? 드라마 외엔 흥미로운 일이 없어서?
남자들이여, 겨울잠에서 깨어나라

박현웅 _ 폴의고백 _ 43×30 _ 혼합재료 _ 2008


감원 바람, 데면데면한 가족, 기댈 곳은 드라마뿐
하긴 최신 유머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웃기지 않는 개그 프로그램이나, 젊은 아이들이 나와 춤추는 가요 프로그램, 리얼 버라이어티 쇼만 가득한 쇼 프로그램 중에서 그래도 무난하게 볼 수 있는 게 드라마다. 또 곰곰 생각해보니 요즘 중년 남성들이 다른 문화를 즐길 정신적·경제적 여유가 없는 삭막한 환경도 한 이유인 것 같다.
여유가 있을 때는 골프도 자주 치고 해외여행도 가고 와인바에 가서 “내가 로마네콩티는 못 마셔봤지만 말이야, 무통 로칠드는…”이라며 허풍떨던 그들이 지금은 너무 초라해졌다. 경기가 좋던 시절에 투자한 펀드는 황당하게 날아갔고 주식시장은 억장이 무너지고 직장에선 감원열풍, 연봉삭감 대상이 돼 언제 잘릴지 모르는 형편이다. 게다가 외국 유학 보낸 자식들에게 송금을 할라치면 달러건 유로건 천장에 솟구쳐 있으니….
또 열심히 경제정세를 분석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사문제에 일희일비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스트레스와 피로감뿐이다. 마누라와 자식들이 기대하는 것은 그의 두둑한 지갑뿐, 건강은 알아서 지키길 기대하고 모처럼 살뜰한 대화를 시도해도 거부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보는 동안이나마 일상의 시름과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남의 남자, 집 밖 남자들까지는 참고 견디겠다. 바로 내 남자, 집 안의 남자가 어느 순간부터 열렬한 드라마광으로 변해갈 땐 참 기분이 묘하다. 전에는 내가 드라마를 보면 그렇게 비난하고, 리모컨을 움켜 쥔 채 야구나 축구 경기를 보거나 케이블 TV에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던 남편이 요즘은 일일극, 주말극을 빠짐없이 챙겨본다.
“이제 채널권 전쟁을 할 필요가 없으니 좋겠구먼. 둘이 정겹게 드라마를 보면 될 거 아냐?”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옆에 앉아 드라마에 몰두하는 남편의 옆모습을 지켜보면 동호인(?)이 생겼다는 기쁨보다 안쓰러운 마음이다. 물론 항상 변명은 그럴듯하다. ‘꽃보다 남자’는 한국 드라마가 얼마나 화려할 수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아내의 유혹’은 추리 기법이 신선해서, ‘야망의 세월’은 송승헌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확인하려고 등등. 어쩌다 내가 늦게 들어온 날, 남편은 마치 내가 굉장히 받고 싶은 선물이라도 준비한 듯한 표정으로 막 방영이 끝난 드라마의 줄거리와 주인공들의 열연을 전한다.
“재방송을 꼭 보라고. 오늘 아주 재미있었어. 대사가 압권이었다니까.”
남편이 이러다가 내가 즐겨 보는 여성지에 탐닉하거나, 여성전용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고민의 글을 올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면 약간 섬뜩해지기도 한다. 나훈아나 최민수같은 마초까지 바라지 않고, 매일 정치논쟁을 하거나 11명의 남자가 죽기 살기로 공 하나에 매달리는 축구 얘기만 하는 것도 재미없지만, 제발 “사나이가 말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남자들이 그립다. 봄은 벌써 왔는데 동물이건 인간이건 수컷들은 다 겨울잠에서 깨어나질 못한 것 같다.




남자들이여, 겨울잠에서 깨어나라

▼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에서 선임기자로 일하며 인터뷰 섹션을 맡아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직장 여성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웃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실수담이나 실패담을 담을 예정이다. 그의 홈페이지(www. sooda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여성동아 2009년 4월 5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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