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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Life

연모양 가족 안타까운 사연

강호순에게 살해된 여대생

글 이영래 기자 |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9. 03. 23

지난 2007년 1월7일, 여대생 연모양은 헌금할 돈 1만원을 들고 성가대 연습을 위해 성당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오후 5시쯤, 버스정류장에서 “사당행 버스가 벌써 떠났냐?”고 물은 것을 마지막으로 아무도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2년 후, 그녀는 차가운 주검으로 가족 앞에 돌아왔다.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지난 1월30일 경찰은 연모양의 시신을 발굴, 수원중앙병원 장례식장으로 후송할 것을 가족에게 권했지만, 아버지 연씨는 장례비가 없다며 자택에서 장례를 치르겠다고 고집했다.
“교사 월급으로 딸 셋을 키우며 살아왔으니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런데 딸을 찾겠다고 2년이나 사방팔방 플래카드를 달고 전단지를 들고 쫓아다녔으니 그 살림이 남아났겠습니까? 얼마 전 복직은 했지만 빚 때문에 월급은 차압되는 형편이었고, 어머니가 아기 돌보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림을 꾸렸던 걸로 알아요.”

장례 치를 돈도 없을 정도로 가계 피폐해져
고교 교사인 아버지 연모씨는 딸이 사라진 후 휴직 했다. 당사자인 본인이 입을 열지 않으니 자세한 내막은 모를지라도, 장례비가 없을 정도로 가계가 피폐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간 그의 행적은 미루어 짐작할 만했다.
그런 사연이 알음알음 알려지자 지역출신 차희상 도의원 등이 나서서 경기도립의료원 수원병원에서 전액 무료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성당 신우와 연모양의 옛 학우 등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주변 친지는 물론 다른 조문객조차 길게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물론 쉽게 입을 열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피해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침묵은 너무나 무거웠다.
연모양의 가족은 딸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서둘러 이사를 떠났다. 장례미사 때도 연모양의 부모는 넋이 빠진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조문객을 제외한 취재진의 출입은 거절했다. 처음 시신이 발견됐을 때 우르르 몰려든 보도진 앞에서 단 한 번, “우리 딸은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자의 차에 올라탈 아이가 아니다. 죽었다고 우리 아이를 멋대로 모독하지 마라!”는 절규가 아버지 연모씨가 기자들에게 던진 유일한 말이었다.
이사한 곳을 수소문하기 위해 그가 살던 곳을 찾았을 때, 한동네 사람으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전해듣고 나서야 그 무거운 침묵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아파트 단지가 작은 단지는 아니죠. 큰 평수 아파트들도 있고, 생각하는 게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어요. (연모씨가) 딸을 찾겠다고, 방송을 하고 단지 앞 여기저기에 플래카드를 내걸었어요. 플래카드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현상금 액수는 나날이 올라갔죠. 근데 나중엔 아파트 주민 사이에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딸 찾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게 붙어 있으면 주변 집값이 떨어지잖아요. 세를 주려고 해도 쉽지 않았어요. 그런 플래카드를 보고 선뜻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었겠어요?”
주민과 아버지 연모씨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플래카드는 사라졌다고 한다.
아버지 연씨는 그동안 수원 일대는 물론 인근 안산, 안양, 화성까지 뒤지고 뒤지며 버스정류장마다 집집 담벼락마다 전단을 붙였다고 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터라 각 성당 주보, 천주교 매체에 끊임없이 목격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방송, 신문 인터뷰에 응해 ‘딸을 찾아달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의 집 앞에 수십 대의 방송국과 신문사 보도 차량이 늘어선 것은 딸의 시신이 발견된 뒤였다.
‘생사조차도 알 수 없는 날들이 하루, 이틀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 가족은 그렇게 하루 하루 절박한 고통을 참아내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오늘도 우리 가족은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고 너를 위해 기도한다. 간절히, 간절히… 돌아올 수 있기를….’

딸이 실종된 지 1년 후쯤, 아버지는 딸의 미니홈피에 이런 글을 남겼다. 경기도 서남부 부녀자 연쇄 실종사건이라는 말까지 나온 뒤였지만, 그렇게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몸이 약해 유난히도 애태우며 키운 딸, 결국 시신으로 돌아와
기록을 뒤지던 끝에 연모양의 수배 전단을 찾을 수 있었다. 수배 전단 속, 실종 당시 그녀의 사진은 너무나 해맑고 앳된 모습이었다.
몸이 약해 무던히도 애태우며 키웠던 딸이라고 했다. 네 살 때 처음 쓰러진 후 오래도록 아파 수술까지 받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온 아이였다고 했다. 그렇게 어린 딸이, 그렇게 몸 약했던 딸이 끔찍한 주검이 돼 돌아왔을 때, 그가 더 이상 어떤 말을 이을 수 있었을까?
“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강호순의 차에 올라탔으니까 그리 된 거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그 버스정류장이 단지에서 5분 정도 떨어져 있지만 그 주변이 다 논밭이잖아요? 인적도 드물고 그러니까 납치된 것일 수도 있고, 마지막 본 사람 말대로라면 버스 지나갔냐고 물었다니까 그 어린아이가 그냥 친절한 아저씨가 차 태워준다고 생각해 탔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그 아이 영혼을 모독하니까 아버지 입장에서는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겠습니까?”
인터뷰를 수차례 요청했지만, 연모씨의 태도는 완강했다. 기자가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살지 생각해봤느냐?”는 반문뿐이었다. 그에게는 아직 어린 두 딸이 있고, 아이들이 이제는 그 상처에서 벗어나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38)에게 살해된 피해자 유가족들이 강호순을 상대로 10억3천여 만원을 배상하라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연씨는 이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연씨는 “그 더러운 돈 받기 싫다”며 소송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연씨는 마지막으로 딸의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끝내 가고야 말았어.
살아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느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수난처럼
그렇게 처참하게 데려가셨을까?



너를 지켜주지 못해 한이 되는구나.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다 알아.
네가 짊어진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노력하고
기도할게.
이승에서 못다 한 너의 꿈, 억울함, 가족들의
한까지도 이제 모두 거두어가.
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힘드니까.
하늘나라 그곳에서 우리 가족이 못다 해준 모든 것 다 누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그동안 우리 아이가 생각날 때마다 이곳에 와서 울고,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죽을 힘을 다해 고통을 견디었는데….
저의 아이를 위해 글을 올려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은 저의 가족은 재산 가압류 신청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이의 죽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깨우쳐주신 거라고 생각되기에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자 합니다.

루시아! 하늘나라에서는 부르고 싶은 노래도 많이 부르고 영원히 행복해~ 사랑해 루시아~

강호순이 잡힌 후, 한 명 한 명 그의 손에 죽어간 죄없는 영혼들의 시신이 발굴될 때마다 사람들은 살인마 강호순의 엽기적인 행각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CCTV 등을 토대로 바닥부터 추적해 그를 검거한 경찰의 뚝심에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가 마지막까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사이코패스의 엽기적인 행각이나 영웅적인 경찰 이야기보다 피해자 가족들의 피눈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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