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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 용기 있는 선택

교수직 버리고 화가로 변신한 이준성 김효성 부부 아름다운 동행

글 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 조영철 기자

2009. 01. 19

이준성 동국대 법대 교수는 왜 다른 이들이 선망하는 일을 그만두고 그림에 매달리게 됐을까. 이 교수와 그가 새로운 인생을 선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아내 김효성씨의 삶 속으로 들어가봤다.

교수직 버리고 화가로 변신한 이준성 김효성 부부 아름다운 동행

22년 동안 대학에서 민법을 가르쳐온 이준성 교수(53). 정년을 12년이나 더 남긴 그가 지난해 10월 돌연 ‘테뉴어(정년 보장)’까지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 이유가 더욱 놀랍다. 전업화가가 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늘 변화를 꿈꾸지만, 한편으로는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런데 이 교수는 달랐다. “오랫동안 교수로 살았으니 앞으로는 화가로 살고 싶다”는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방배동 집을 찾았다.
정갈한 모습의 이 교수는 아직까지 화가보다는 ‘교수님스러웠다’. 그는 인터뷰를 마친 후 논문심사를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학교를 완전히 떠나는 건 학사 일정이 모두 마감되는 2월 말부터라고.
동료 교수와 제자들은 그의 선택에 격려를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아들과 딸은 아직 ‘화가 아버지’를 낯설어한다고. 특히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의 아쉬움이 크다고 한다.
“딸아이는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그러니 보장된 12년을 뿌리치고 나오는 저를 이해하기 힘든가봐요. 한번은 딸아이가 ‘그동안은 아빠 직업을 말하는 게 당당했는데 이젠 뭐라고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화가라 그래라(웃음).”

“어디 한번 그려봐!” “그려봐?”
이 교수가 새로운 인생을 선택한 데는 아내이자 서예가인 김효성씨(52)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김씨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했다. 지난 84년 결혼 후 시간강사였던 이 교수의 월급으론 생활이 빠듯하자 미술학원을 열었다가 87년 남편이 전임교수가 된 후 학원을 정리했다.
“학원을 그만두고 여유가 생기니까 다시 작업을 하고 싶어졌지만, 뒤늦게 다시 흙을 만지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고민하다 서예를 시작했죠.”
그때부터 이 교수는 아내의 먹을 갈아주는 ‘먹커’(이 교수의 지인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 노릇을 했다고. 사실, 이 교수는 그림보다 서예와 먼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서예를 하는 아내 곁에서 함께 글씨를 쓰며 말동무가 돼줬던 것.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여신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그에게 손짓을 했다.
교수직 버리고 화가로 변신한 이준성 김효성 부부 아름다운 동행

“아내와 한 전시회에 갔는데 불독 그림이 걸려 있었어요. 아무리 봐도 제 눈엔 곰처럼 보이기에 ‘저게 곰이지 어디 불독이냐’고 중얼거렸더니 아내가 ‘그럼 당신이 어디 한번 그려봐’ 그러더라고요.”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 때문에 비판만 하는 남편이 얄미웠어요. 그런데 남편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했나봐요. ‘정말 그려봐?’ 그러더니, 연필로 볼펜과 필통 등을 정밀묘사해서 가져왔더라고요. 그런데 입체감이며 빛 처리 등이 정확했어요. 심상치 않았죠.”
김씨가 미술학원을 하던 시절, 이 교수가 오가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조언을 해주곤 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김씨는 남편이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고. 계속 새로운 과제를 내주었고, 그러면 이 교수는 그림을 그려와 검사를 받곤 했다고 한다.
“아내가 ‘잘했다’고 하니까 자꾸 더 잘하고 싶더라고요. 숙제 검사를 받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아내의 칭찬 때문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 같아요(웃음).”

교수직 버리고 화가로 변신한 이준성 김효성 부부 아름다운 동행

이 교수는 소묘에 이어 인물화, 산수화 등으로 영역을 넓혀갔고, 최근에는 비구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씨는 화첩을 사서 남편의 그림들을 차곡차곡 소중하게 모아두었다.
“지금 그리는 비구상 그림들은 모두 제 머릿속에서 비롯된 것이죠. 단순한 원이나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지만 그 안에는 구도와 논리가 있어요.”
요즘 그가 그리는 그림의 화두는 ‘균형’이다. 논리적인 학문인 법학을 공부한 흔적이 그림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이 교수는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학교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구상에 흠뻑 빠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교수직을 그만둔 이유는 자신에게 정직해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비구상은 하루 종일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생각한 것이 형상으로 나오면 재밌고 신기하죠. 제 머릿속이 그림으로 꽉 차 있고 또한 그림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여름방학 동안 3백50점이나 되는 그림을 미친 듯이 그리다가 개강한 이후에는 하나도 그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죠. 마치 제 삶이 단절되어버린 듯했어요.”
그림과 강의 양쪽 모두 소홀해질 바에야 차라리 어느 하나에만 전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림을 선택했다.
“지난해 9월 코엑스에서 열린 키아프(KIAF·Korea International Art Fair)를 둘러봤는데, 제 그림과 비슷한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더라고요. ‘독창성이 있구나’ 싶어 자부심이 생겼죠(웃음). 그때 학교는 정년까지 못 가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 학기만 더 강의하자고 마음을 정했어요.”
그런데 또 한 번 운명의 여신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이 교수는 우연히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MoMA)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여인을 그린 커다란 그림 하나를 보았다고 한다. 그림을 보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나는 뭐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저런 그림을 그리려면 사다리를 올라가야 할 텐데, 나이가 더 들면 못 그리겠구나’ 싶었어요(웃음). 시간강사까지 합해서 26년을 강단에 섰어요. 교수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 학기 더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더군요. 평균 수명을 고려할 때 제가 교수로 살아온 만큼 또 다른 길이 가능하겠더라고요. 그게 바로 화가라는 길인데 망설일 게 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날 저녁 혼자 집 앞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 주가 은퇴 신청 마감이었다. 그는 집에 전화를 해서 “나 자유롭고 싶다”고 외쳤다. 김씨는 남편의 뜻에 흔쾌히 따랐다.
“시기가 좀 당겨졌을 뿐,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어요. 연금을 받으니까 입에 풀칠할 일은 없겠죠. 또 저는 많이 먹지 않고 조금 먹으니까 괜찮아요(웃음). 그저 앞으로 남편이 화가의 길을 가면서 행복하기를, 더불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요.”
이 교수는 이런 김씨가 한없이 고맙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부부는 한몸이기에 고맙단 말이 필요 없다”며 웃을 뿐이다.
교수직 버리고 화가로 변신한 이준성 김효성 부부 아름다운 동행

이준성 교수는 비구상 그림에 흠뻑 빠져 대학 교수직까지 그만두었다. 요즘 그의 그림의 최대 화두는 균형. 단순한 선이나 면으로 논리·질서를 표현하고 싶다고.


은혼식 기념해 부부 공동전시회 열어
지난 12월 이 교수 부부는 공동전시회를 열었다. 그동안 김씨의 전시회에 이 교수가 간혹 작품 한두 점씩 출품한 적은 있지만, 중관(中觀)과 목원(木原)이란 자신들의 아호를 걸고 전시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회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1월8일, 은혼식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 78년 봄. 당시 이 교수는 법대 대학원생, 김씨는 미대 4학년생이었다고 한다. 데이트를 하는 친구들 들러리로 불려나와 창경궁에서 벚꽃놀이를 하며 밤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법학도와 미대생,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둘다 새로운 것을 좋아했기 때문인 듯하다고.
“저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사람은 또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더라고요. 그땐 정치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그래서 정치 얘기며 사회 돌아가는 얘기며 신나게 했죠. 그랬더니 아내는 제가 꽤 어른스러워 보였다는군요.”
“똑똑하고 말을 재밌게 잘하는 사람을 좋아했는데, 남편이 그랬죠(웃음).”
이 부부는 부부이면서 이제 든든한 예술적 동지가 되었다. 부부는 닮아간다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이 교수는 이제 ‘그림 그리는 이준성’이라고 새긴 명함을 만들 생각이라고 한다.
“요즘은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온통 ‘어떻게 그릴까’ 그 생각뿐이에요. 어떤 이들은 저를 보고 철이 없다고 할지 모르죠.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지금 이 순간 저는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이 교수는 앞으로 동양화와 유화를 한 화면에 담아 해외 미술전에 출품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안정’보다는 ‘도전’을 선택한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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