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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기자의 키워드 토크

바위 틈에 뿌리 내리는 꽃 처럼 질긴 배우 윤석화

글·김수정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8.12.23 10:38:00

“예쁜 외계인” “철학이 있는 조폭 언니” “배우라는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버리기도 하는 여자”. 지인들의 눈에 비친 윤석화의 모습이다. 30여 년간 ‘개근’한 연극무대에서 내려와 스스로 원했던 안식년 1년에 학력위조파문으로 본의 아니게 1년을 더 쉰 그가 이제 삶 같은 무대에서 연극 같은 삶을 다시 펼치려 한다.
바위 틈에 뿌리 내리는 꽃 처럼 질긴 배우 윤석화

윤석화(52)가 아들 수민이(5)를 위해 쓴 편지 ‘작은 평화’의 일부분이다. 이 편지에는 “진정한 사랑을 위해 믿음이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촛불처럼 자신을 태웠던”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이 녹아 있다. 어릴 적 “노래 잘하는 계집아이”였던 윤석화는 우연한 기회에 연극무대에 올랐고, 미국 유학시절 “생활고에 지쳐 아파트 담벼락에서 울던 동양인”이었지만 연극에 대한 믿음과 열정만큼은 남달랐다. ‘신의 아그네스’ 대본을 어렵게 손에 넣어 귀국한 뒤 이 연극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뒤늦게 두 아이를 입양하면서 배우뿐 아니라 여자로서의 행복도 누렸지만 지난해 학력위조 사실을 고백한 후 인생 최대의 위기를 안고 무대를 떠났다.
그로부터 1년 만인 지난 11월 중순, 서울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에게는 25년 전 그때처럼 ‘신의 아그네스’ 극본이, 기자에게는 ‘작은 평화’에서 따온 ‘좁은 문’ ‘촛불’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들려 있었다.

바위 틈에 뿌리 내리는 꽃 처럼 질긴 배우 윤석화

▼ First keyword ; 좁은 문
“견딜 수 없었던 고통, 절망과 아픔의 시간…”
갓 낳은 아기를 목 졸라 죽인 수녀 아그네스를 두 차례 연기했던 그는 이번에는 아그네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냉철한 의사 리빙스턴 역을 맡았다. 무대에 서는 건 ‘어메이징 그레이스’ 이후 2년 만이다. 그는 하루 6시간 이상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연습하고 있다.
“지금껏 배역을 욕심낸 적이 없는데, 유일하게 리빙스턴만큼은 초연 때부터 맡고 싶었어요. 컴백을 결심하면서 ‘지금쯤이라면 대중이 나를 받아줄 것이다’ 같은 계산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신의 아그네스’라면 연극만 바라보고 열망하던 그때를 리마인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용기를 냈죠.”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지난해 학력위조 사실을 고백하며 홈페이지에 직접 사죄의 글을 올렸던 자신의 모습과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도망치듯 홍콩으로 떠났던 일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상처는 남았지만 마음은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털어놓았다.
“평생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잘못한 부분에 대해 돌 맞을 각오를 하면서도 ‘왜 이토록 상처를 곪게 놔뒀을까’라며 자책했죠.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은 저를 사랑했던 사람들, 저를 믿었던 선후배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비로소 낮아졌습니다’ 하고 인사하기 위해서예요. 30여 년간 끊임없이, 혹은 때때로 저를 응원해주던 사람들에게 진 빚을 연극으로 갚고 싶었어요.”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는 그는 “용서하면 모든 잘못이 다 잊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가 두려운 것이다. 용서를 해도 상처는 남는 것이고, 상처는 또 다른 관계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서 비로소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나이에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도,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는 걸 괴로워하면서도 계속 연극을 붙드는 것도 모두 믿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그에게 믿음은 언제나 ‘화려한 문’이 아닌 ‘좁은 문’이었다. 열아홉 살에 CM송 가수로 데뷔해 지난 75년 연극배우로 전향한 그는 이후 연극계에서 스타가 됐지만 가난을 해결하진 못했다. 미국 뉴욕에서 공연학을 공부하다가 중도에 포기해야 했고, 차비가 없어서 외출하지 못했고, 단칸방 가스비가 석 달 연체돼 라면을 끓이지 못한 날도 있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세무서에서는 “유명한 배우인데 어째서 수입이 없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고 한다.
“15년간 그런 생활이 이어졌어요. 그때마다 엄마는 ‘그놈의 연극 때려치우라’고 했고, 그러면 저도 모르게 ‘I like it, I love it, Finally I choose it!’ 하고 외쳤어요. 우연히 이 길에 들어섰지만 어느 순간 연극은 제 삶이 돼버린 거죠. 저는 늘 천국과 지옥을 오가요. 자아도취돼 있다가도 끊임없이 ‘왜 하나님은 내 능력 이상의 고통을 주실까’ ‘이렇게 해서도 안 된다면 이제 그만둬야 하나’ 하면서 저 자신을 심문해요. 그러다가 슬럼프가 오고, 조울증에 빠지기도 해요.”
그는 관객의 사랑을 받는 배우였지만 평론가들은 그에게 인색했다. ‘신의 아그네스’는 성공을 거둔 뒤 상업주의로 매도됐고, “발성이 나쁘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다. 윤석화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많은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하면 제작진은 ‘스타니까 잘난 척 하겠지’ 하고 따가운 눈총을 보냈고, 심지어 동료배우들 앞에서 그를 모욕하기도 했다. 자살을 생각한 것만 세 번. 그가 좌절할 때마다 함께 ‘좁은 문’에 들어간 건 손숙, 박정자, 윤소정, 조영남이었다고 한다. 지난해 학력위조 사실을 고백하던 날엔 박정자가 그의 손을 잡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땐 조영남이 처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신의 아그네스’로 무대에 다시 오를 땐 손숙이 가장 먼저 반겨줬다.
“언니, 오빠인 동시에 선생님같이 섬기는 분들이에요. 들판에 홀로 선 듯한 기분이 들 때마다 바람막이, 울타리가 돼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죠. 저도 언니, 오빠들처럼 이따금씩 후배들에게 말해요. ‘이 길이 얼마나 외로운 길인지 알게 될 때, 해가 뉘엿뉘엿 져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 내가 너희들의 친구가 돼줄게’라고….”
때마침 그에게 한 후배가 찾아와 음악공연을 함께 보러 가자고 졸랐다. 그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래! 그날은 연습 미루고 꼭 갈게. 나 그날 드레스 입고 갈까? 하하하. 내가 맛있는 와인 사줄게~”라고 대답했다.
“만일 믿음을 체로 거른다면 상처라는 자갈과 배신이라는 조약돌이 나올 거예요. 당장은 가슴이 좀 아프겠지만 제가 좀 더 맑아질 거라고 확신하기에 체를 거두지 않을 거예요.”

바위 틈에 뿌리 내리는 꽃 처럼 질긴 배우 윤석화

▼ Second keyword ; 촛불
“제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연극배우’뿐이면 좋겠어요”
그는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운다. 1시간여 동안 무대 위에서 일곱 대의 담배를 피워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평소보다 양을 늘린 것이다. 2003년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점핑댄스를 추는 20대 여성 아네트를 소화하기 위해 담배를 끊었던 그는 요즘 “여기서 담배를 비벼 끄는 게 좋을까, 훅 뿜어내는 게 좋을까” 하며 리빙스턴의 심리를 철저하게 계산한다.
“집중력이 강한 편이에요. 무대 위에서 저는 윤석화가 아닌 작품 속 캐릭터로 완전히 변신해야 하니까요. ‘내가 아는 사람이 공연을 보러 왔을까, 관객이 몇 명이나 왔을까’ 따윈 생각하지 않아요. 가장 만족스러운 공연은 아무런 느낌 없이 끝난 공연이에요. 간혹 막이 오르면 저도 모르게 ‘오늘은 관객이 많이 왔구나’ 하고 기뻐할 때가 있는데, 그날은 관객이 기립박수를 보내도 ‘나는 아직 멀었구나. 윤석화는 똥배우구나’ 하고 괴로워해요.”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열정이 넘친다. ‘신의 아그네스’ 초연 시 아파트 부녀회관을 빌려 연습하다가 주민들의 항의를 받고 쫓겨났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무대 위에서 칼춤을 추다가 칼에 손가락을 심하게 베여 바닥에 피가 흥건한 상태에서도 손을 감싸지 않았고, 죽음을 앞둔 난소암 환자 역을 위해 삭발하기도 했다.
바위 틈에 뿌리 내리는 꽃 처럼 질긴 배우 윤석화

“삭발이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요? 아이들이 놀라긴 하겠지만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를 ‘독종’이라고 부르는 게 이해가 안 갔어요. 오히려 남들보다 느슨하게 산다고 생각했거든요. 돌이켜보면 어려운 캐릭터를 맡아 앞뒤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뛴 것 같아요. 지금도 힘들 때는 ‘어유~ 징그럽게 오래 했네’ 하고 포기하다가도 만족스러울 때는 ‘눈 깜짝할 사이였어’ 하고 중얼거리죠.”
33년 동안 무대를 지키면서 외부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작품은 세 작품뿐이었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것만 할 순 없지만 최대한 ‘연극배우 윤석화다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경인방송 주철환 사장은 이런 그에게 “제대로 몸값, 이름값 하는 여자다. 무생명(돌)에 생명(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사인 ‘윤石♧’ 역시 그런 뜻을 품고 있다.
“종종 제 이름의 뜻이 확대재해석되다 보니 지금은 괜히 그렇게 지었나 후회하기도 해요(웃음). ‘石花’는 호고, 본래 이름은 ‘錫和’예요. 중학생 시절 동양화를 배웠는데, 낙관을 만들 때 아버지께서 ‘너는 바위에도 난을 잘 치니까 호를 石花로 하렴’ 하며 처음 그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배우가 된 뒤에는 예명으로 쓰는데, 사인을 할 때 성은 한국인의 뿌리라는 생각에 한글로 쓰고, 석은 누구나 아는 쉬운 한자를 사용하고, 꽃은 배우의 이미지를 상징하기 위해 그림으로 표현하죠.”
경영자로서의 그는 ‘열정’보다는 ‘희생’에 가까운 편이다. 그리 여유롭지 못한 상황임에도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지난 99년 공연전문지 ‘객석’을 인수했고, 2002년에는 ‘설치극장 정미소’의 주인이 됐다. 쌀 방앗간을 가리키는 정미소(精米所)와는 가운데 ‘미(美)’자가 다르다. 쌀을 정성스럽게 도정하듯 ‘예술을 생산하는 장소’라는 뜻에서 그가 직접 지은 것. 정미소 건물 4층엔 ‘객석’이 있다. 그는 회의를 하고 공연을 기획하고, 때론 낮잠을 즐기는 이곳이 집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허덕이면서도 CF를 찍고, 뮤지컬을 제작해 번 돈으로 이곳의 적자부터 메운 건 연극에 대한 사랑과 집념 때문이었다.
“‘5년을 버티자, 5년 후엔 아무리 좋아도 떠나자’고 결심했는데, 5년이 지나자 저를 믿고 따라온 사람들의 꿈을 모른 척할 수 없더라고요. 또 저는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기에 무엇 하나 포기하기가 쉽지 않고요. 평소 슈퍼마켓에 갈 땐 화장을 안 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약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아줌마로서의 권리가 있지만 연극인으로서의 윤석화는 사람들이 기뻐하겠지, 실망하겠지 하며 늘 긴장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대표’가 아닌 ‘연극배우’ 하나면 좋겠다고 한다. “촛불처럼 타오르다가 조용히 은퇴하고, 사망하면 신문 부고란에 작게나마 게재되는 게 소망”이라는 그는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바위 틈에 뿌리 내리는 꽃 처럼 질긴 배우 윤석화

▼ Third keyword ; 사랑
“평범하지 않은 매력 지닌 남편, 두 번의 인공수정 실패 후 얻은 보석 같은 두 아이”
배우로서 강인한 윤석화는 엄마로서는 조금 유약한 편이다. 야단칠 때는 어김없이 매를 들지만 아이들이 “엄마,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고 노래할 때면 감격에 겨워 “자랑스럽다. 고맙다”고 말한다.
“수민이는 아빠와 홍콩에 머물면서 예비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힘도 세고 공부도 잘해요. 만일 수민이가 엄마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이와 떨어져 지내는 지금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겠죠. 아이가 좀 더 클 때까지 일을 포기해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고마운 건 남편이 저 대신 수민이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이죠.”
두 살배기 수화는 서울 삼청동 한옥집에서 그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마친다. 수민이에게 그랬듯, 그는 수화에게도 매일 아침 커피를 가져다달라고 부탁한다.
“아침잠이 많은데다 요즘은 늦게까지 연습을 해야 해 잘 못 일어나요. ‘10분만 더 잘게’ 하다가 어느 날 그게 굉장한 자괴감으로 변하더라고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엄마도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아이에게 알리고 싶어 커피를 부탁하기 시작했죠. 수화가 ‘낭낭낭(똑똑똑), 딜리버리~’ 하면서 커피를 가져오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커피를 마신 뒤 수화와 이불놀이를 하고, 여유가 생기면 삼청공원에 가 함께 뛰어놀아요.”
서른여덟 살에 결혼한 그의 아내로서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남편이 사업을 하면서 고난을 겪을 때마다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그로 인해 갈등도 겪은 것. 다행히도 어려운 세월을 슬기롭게 극복했다는 그는 남편을 “평범하지 않은 매력을 지닌 사람, 나와 함께 앞으로 더 처절하게 노력해야 할 사람, 천재 아니면 천치”라고 표현한다.
엄마로서의 삶 또한 고비가 많았다. 상상임신을 했고, 두 번이나 인공수정에 실패하는 아픔을 겪은 것. 미혼모 복지시설인 동방사회복지회에 일일 엄마가 돼주러 갔다가 2003년 수민이를 입양한 데 이어 지난해 수화를 입양한 그는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을 겪었지만 그것이 곧 가장 큰 기쁨이 됐다”고 말한다.
“두 아이를 잃고, 두 아이를 얻었다는 게 참 묘하죠. 사실 아이를 하나 더 입양하고 싶었는데 인연이 아닌지 잘 안되더라고요. 마음으로는 더 많은 아이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고 싶지만 육체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과욕을 부리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두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대해 묻자 그는 “수민이가 감수성이 예민해 수화를 입양할 때 엄마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할까봐 걱정했다. 그래서 수민이에게는 ‘수화는 너의 유일한 동생이니까 잘 지켜줘야 한다’고 강조했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둘이 있을 때는 수민이를 먼저 알은척하라’고 부탁했다”고 대답했다. 그 때문인지 수민이는 수화를 끔찍하게 아끼고 수화는 울다가도 오빠 얘기만 하면 그친다고 한다.
“사람들이 ‘입양 얘기를 아이들에게 털어놓을 생각이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딸인지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근원적으로 고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고요. 물론 아이들 곁에는 늘 저와 남편이 있을 거예요.”
수민이는 그가 배우라는 걸 안다고 한다. 호기심이 많아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꼬치꼬치 캐묻기를 좋아하는 수민이는 얼마 전 ‘맘마미아’의 뮤지컬 넘버를 모두 외워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그는 두 아이 중 누구라도 배우가 되겠다고 하면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이가 어리다 보니 제 사고방식도 젊어지는 것 같아요. 얼마 전부터는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고요해지고 싶고 연기 이외의 살아 있는 기쁨을 느끼고 싶었거든요. 50대는 여자로서도, 배우로서도 값진 나이라고 생각해요. 어떠한 고통도 녹여낼 수 있는 미덕을 갖춘 나이니까요. 빨리 60대가 되면 좋겠다 싶다가도 아이들이 어려 ‘아차, 안 되지’ 해요(웃음).”
그는 연극을 사랑하는 방법도 점차 바꾸고 있다. 앞으로는 주인공으로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생각이라고. 이를 위해 그는 ‘정미소 창작지원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잠시 쉬자”며 낡은 재봉틀이 있는 책걸상에 앉아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나온 세월의 반을 갓 넘긴 기자에게 “아등바등 살 이유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꼭 해야 하는 이유는 없지만 굳이 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

여성동아 2008년 12월 5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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