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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계수미 전문기자의 파워 인터뷰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사진·조영철 기자, 준초이 제공

입력 2008.10.21 11:41:00

준초이의 광고사진은 뉴스위크·포천 등 외국 유명 잡지의 뒷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화려한 광고업계에서 가장 비싼 촬영비로 이름난 상업작가. 그는 의외로 세련되기보다 소탈하다.
자신의 ‘성공담’보다 ‘고생담’을 털어놓는 데 시간을 들이는 진솔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9시간에 걸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성공 사례로 인터뷰하는 것은 싫습니다. 저를 성공해서 행복한 사람으로 다루지 말아주십시오.”
준초이(56·본명 최명준)가 내건 인터뷰 조건이다. 그는 예상외로 자신의 모습이 화려하게 ‘포장’될까 우선 신경을 썼다.
“요즘 샴페인을 마시면서 성공했어요, 행복해요 하는 식의 인터뷰 기사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독자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 같아요. 전 물밑에서 파닥파닥 허덕거리면서, 밖에서는 우아하게 보이는 백조 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요.”
그는 “아직까지도 갈 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가리켰다. 어쨌든, 과장 없이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는 뜻을 밝히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준초이 빌딩 앞. 흰 털이 바랜 작은 개 한 마리가 서 있다. 건물 안 스튜디오로 따라들어온 개는 기자와 인사를 나누는 준초이를 쳐다보며 바로 앞에 앉는다.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눈빛이다.
“얘가 요즘 외로워요. 같이 놀던 옆집 개가 어디 가서….”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던 그가 “저기 쭉 올라가 형한테 가서 놀아” 하며 계단을 가리키자 신기하게도 말귀를 척 알아듣고 그대로 따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떠도는 개였는데, 4년 전부터 길렀어요. 처음엔 못된 짓 해서 많이 맞았죠.”
비싼 개를 예쁘게 꾸며 데리고 다니는 세상에 우연히 찾아든 집 잃은 개를 맡아 기르고 매를 때려 훈련시켰다는 게 남다르게 보인다.
“맞습니다. 제가 ‘옛날식’이에요. 88년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보니, 아이들은 부모에게 반말하며 이것저것 버리고 다니고 부모는 아이에게 존댓말하며 줍고 다니더군요. 안 좋게 보였지요. 전 아들 둘 다 매를 때려가며 키웠어요.”
그의 큰아들은 얼마 전 해병대에 입대해 훈련받는 중이라고 한다. 중학생인 둘째 아들은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 합숙훈련 중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강인함’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다. 젊어 고생은 꼭 해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실제 그에게선 오랜 기간 고생을 경험한 사람의 냄새가 묻어난다. 선뜻 이런 말도 한다.
“‘그렇게 살기 힘들면 이곳으로 들어오라!’ 이렇게 건물 앞에 써붙이고 싶어요. 그런 때가 제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고교 중퇴, 일본 대학에선 우등생으로 이름 날려
준초이의 고생담은 길고도 길다. 성장기 때 그는 밝지 않았다.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시골 큰집에 양자로 갔다가 일곱 살 때 천식에 걸려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따뜻한 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조용히 사춘기를 지냈지만 마음속 방황이 컸다.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다.
“학교 다니기가 싫었어요. 집도 싫었죠. 모든 게 귀찮고 시시해 보였어요. 성적이 뚝 떨어지더니 전교생 3백73명 중에서 꼴찌를 한 적도 있어요. 결국 고2 때 자퇴를 했죠.”
장사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에게 어느 날 학창시절 단짝 친구가 찾아왔다. 명문대 배지를 단 모습을 보고 자존심이 상해 그날로 가게 문을 닫고 드러누웠다. 오로지 그 친구를 따라잡을 생각만 하다가 유학을 결심하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입학한 해 중앙대학교에 흡수된 서라벌예술대학에 들어갔다. 사진을 전공했다.
유학이 쉽지 않던 70년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떠났다. 신이 났다. 처음엔 돈만 내면 다닐 수 있는 전문학교에 다니면서 불고기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학비를 벌었다. 1년 6개월 만에 자신이 목표로 했던 일본대 예술학부에 들어가는 행운을 잡았다.
“대학 성적이 나빠 입학이 불가능했죠. 그래도 학교에 끈질기게 들락거렸어요. 마침 일본에 출장 오신 모교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추천하며 도움을 주셨어요. 조건부 입학을 하게 됐죠. 성적이 안 좋으면 언제든 입학을 취소하겠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어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우등생, 아니 최우등생이 되어 장학금을 받으리라 굳은 결심을 했다. ‘열등의식에 싸여 있던 내가 내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머리를 쳐드는 의구심을 눌러버렸다. 매일 죽기살기로 학업에 매달렸다. 입학한 첫해 그는 전교 2등을 차지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졸업하던 해 모교인 중앙대 사진과에서 교수 임용 제의가 들어왔다. 탄탄대로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행을 고집했다.
“낙제생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우등생이 돼 칭찬을 들으니 감격스러웠죠. 유명 사진가들의 작품집을 보며 나도 할 수 있다, 생각했어요. 내친김에 미국에 가서 깃발을 꽂으리라 의지를 불태웠죠.”

뉴욕에서 밑바닥 조수생활, 스트레스로 토하는 증상에 시달려
그는 뉴욕으로 갔다. 밑바닥 조수생활부터 시작해 최고의 사진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얼마 안 돼 일본에서 웃어른 소개로 맞선을 본 한국 여자가 그를 찾아 날아왔다.
“처음 봤을 때 아내는 평소 제가 그리던 이상형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고생 따윈 개의치 않는다고 저를 안심시키는 당찬 여자였죠. 영어 잘하고, 못나지 않았고, 이 정도 열정을 가진 사람이면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지 않고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며칠 후 뉴욕의 한국식 절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양가 부모님께 알렸지요.”
아내는 증권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조수로 일하기 위해 유명 사진가들을 찾아다녔다. 힘들게 만났건만 그들은 A+로 도배된 그의 자랑스런 일본대 성적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의 포트폴리오만 훑어보다 “학생 수준”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의사 소통을 하는 데 턱없이 부족한 영어 실력도 문제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한 사진가가 갑자기 스튜디오가 불타버려 잡일할 사람을 찾던 중 월급 액수에 연연하지 않는 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뉴욕에서 그는 낮엔 조수, 밤엔 레스토랑 웨이터로 일했다. 사진작가의 조수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촬영장비를 설치하다 사고를 당하는가 하면, 언어·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어느 금요일 오후, 패션 촬영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해발 1200m 정도 되는 고산에서 그는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더니, 하얗게 쌓인 눈 위에 먹은 것을 토하고 말았다. 그를 고용한 사진작가는 촬영에 차질이 생겼다며 노발대발했다.

“모델, 디자이너를 포함한 스태프가 모두 모여 있던 곳에서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그때 겪은 일이 두고두고 후유증으로 남았어요. 그 후 미국에 있는 내내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속이 메슥거리다가 토하는 증상에 시달렸습니다. 한국에 귀국해 김치도 실컷 먹고, 하고 싶은 소리 다 하고, 욕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았지요.”
2년 만에 조수생활을 끝내고 뉴욕 중심가 맨해튼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렸다. 그는 광고업계에서 ‘모스맨(Moss Man·이끼 인간)’이란 별명을 얻었다. 바위와 꽃이 있는 작은 이끼 낀 동산을 세트로 만들어 명품 액세서리·구두 등을 촬영한 그의 포트폴리오가 좋은 반응을 끌어낸 것이다. 그 후 종종 일거리가 들어왔다. 하지만 4년여간 그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놓는다. 하루는 사진가로 대성할 것 같다가도 또 다음 날은 좌절을 맛봤다.
그를 조수로 고용했던 독일계 사진작가 제랄드 자네티가 그에게 여러 차례 귀국을 권했다. “넌 뉴욕에서 할 만큼 했어. 뉴욕은 세계에서 몰려드는 실력가들로 더욱 치열한 전쟁터가 될 거다. 이쯤에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내가 뉴욕에서 누리는 영광 이상으로 넌 한국에서 사진가로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거다.”



국내 최고 촬영비 받는 상업 사진작가로 자리매김
결국 그는 미국에서 사진가로 대성하겠다는 꿈을 접었다.
“분하고 슬펐죠. 하지만 뉴욕에서 쟁쟁한 실력가들을 수없이 경험한 터라 자만심이 많이 꺾인 상태였어요. 아이의 아빠가 됐다는 책임감도 있었죠.”
대학교수 자리까지 박차고 떠난 미국행이었지만 돌아올 때 금의환향은 아니었다. 88년 귀국했을 때 13년간 외국생활을 한 그에게 한국은 낯선 곳이었다. 한 친구가 충무로의 사진 시세를 분석하며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바위와 꽃이 있는 작은 이끼 낀 동상을 세트로 만들어 명품 액세서리를 촬영한 그는 뉴욕에서 ‘모스맨(Moss Man)’이란 별명을 얻었다. (좌) 준초이의 광고사진(우)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준초이의 광고사진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아이씨! 그냥 찍어요! 내가 하는 대로! 이래라 저래라 시키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양동근. 그는 타고난 연기인이다. 나는 그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좌) 장동건을 만난 나는 그의 잘생긴 얼굴과 아름다운 인간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나의 이기적인 발상이 그에게 작용했다.멋있는 남자는 강인해야 한다! 그리고 고독해야 한다!(우)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청년시절의 나는 조영남씨의 재능과 그의 목소리를 꽤나 흠모하고 있었다. 어른이 된 나는 그에게 아쉬움을 느꼈다. 조영남씨는 그의 타고난 끼와 예술성을 본인이 잘 다듬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나는 그를 사랑한다. 애당초 나의 사는 방식에 그를 함유시키려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그는 자유인이다.(좌) 윤석화씨와 수민이의 만남은 예약된 시나리오와 같았다. 입양문제로 시설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윤석화씨가 시설에 방문했을 때 수민이는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한다. 울음을 달래려 다가간 윤석화씨를 본 수민은 울음을 그치고 방긋이 웃었다 한다. 시설을 떠나오는 윤석화씨의 가슴에는 이미 수민이의 잔상이 찍혀 있었다 한다. 나는 두 사람의 만남을 ‘포대기’로 묶었다. (우) - 준초이 글과 사진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촬영 전에 박범신 선생의 소설 ‘촐라체’를 읽었다. 그를 알고 싶었다.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의 촐라체 정상을 향하던 형제가 계곡으로 추락한다.그때의 비명소리가 깊고 길게 계곡에서 계곡으로 메아리 쳐 끝없이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는 박범신 선생의 몸속에 웅크리고 있는 야수의 포효였다.(상) 이해인 수녀님을 뵙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이분을 오늘은 즐겁고 행복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됐다. 촬영한다는 행위는 그다음이었다. 조그만 통통배 한 척을 빌렸다. 어부 아저씨에게 낚싯배를 있는 힘을 다해 갈지자로 달리게 했다. 비명을 지르시던 수녀님은 어느새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청순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내 카메라는 이때를 기다렸다.(하)


“어중간해서는 사진으로 생활이 안된다고 하더군요. ‘아예 사진공장을 차리든지 고귀한 사진가가 되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애매하게 하지 말고 큰 바퀴를 돌려라. 그러려면 3~ 4년은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 말이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리더라고요(웃음).”
당시 광고사진계는 상황이 열악했다. 사진 값이 턱없이 낮게 매겨져 있었을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어렵거나 규모가 큰 촬영은 전부 외국 사진가들을 초빙해 촬영하던 시대였다. 그는 촬영 외에 준비작업과 뒷마무리 등 자신의 작업시간과 제반 경비를 따져 ‘준초이식 촬영비’를 계산했다. 당시 통용되던 기본 비용의 7배가 넘는 돈이었다.
“웃기는 놈이라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져온 포트폴리오를 보고 광고업계에 입소문은 나 있었지만 누구 하나 선뜻 일을 맡기려 하지는 않았죠.”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친구의 말대로 궁핍한 나날이 이어졌다. 불안하고 우울한 현실에 며칠씩 불면증에 시달리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자 그에게 서서히 빛이 날아들었다. 어느 날 기존 광고사진과 전혀 다른 광고로 바꿔보라는 기업 오너의 지시를 받은 담당자가 그에게 일을 의뢰해왔다. 광고전이 치열한 업체들에서 경쟁적으로 일을 맡기기도 했다. 명품시계, 호텔 인테리어 사진 등 외국 사진가를 부르던 일들도 하나둘 그의 몫이 됐다. 촬영에 한 번 실패한 일까지 도맡게 되자, 그에게 ‘광고업계의 해결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람들은 제가 외국에서 대단한 하이테크를 배워온 줄 알지만,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새로운 일을 맡을 때마다 힘에 겨웠어요. 밤잠을 설치며 끙끙댔죠.”
직접 그쪽 분야의 전문 사진작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세이코 시계를 평생 찍은 사토 히로시가 일본의 한 허름한 필름가게를 단골로 이용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수소문해 찾아가서 만났다. “여기서 막힙니다.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매달리는 그에게 대가는 인색하지 않았다.
“호텔 사진은 이름난 외국 작가들의 사진을 보고 실제 그곳에 가서 연구했어요. 빛의 흐름을 보면서 어느 시간대에 촬영을 했구나, 조명은 어디에 숨겨놓았구나, 눈으로 확인하며 짐작해보곤 했죠.”
최고로 비싼 사진 값을 받는 상업작가. 그 이름이 붙은 지 5~6년이 돼서야 그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었다고 말한다.

일할 땐 독재자 되는 준초이, 톱 탤런트와 마찰 빚고 촬영 중단도
준초이는 “일한 땐 독재자가 돼버린다”고 말한다. 광고사진 촬영에 앞서 분업화된 일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일일이 체크해 자신의 마음에 들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한번은 광고 촬영 때 모델로 선 톱 탤런트의 메이크업 톤을 바꾸려다 마찰을 빚고 촬영을 그만둔 일도 있다고.
“몇 번 촬영하면서 보니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변신이 가능하겠더라고요. 그런데 모델이 예뻐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개성 있게 메이크업 톤을 바꾸려 했는데, 완강하게 싫다고 하더군요. 결국 촬영을 중단했죠. 광고대행사 측에 그날 손해가 난 최소 경비는 제가 지불하겠다고 했는데, 이해해주며 돈을 받지 않았어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상업사진을 찍으면서도 그에겐 늘 인물사진을 찍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고 한다. 95년 그에게 첫 번째 기회가 왔다. 공연기획사 CMI가 기획한 ‘한국을 빛낸 14인의 음악인’이란 제목의 사진집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정트리오 조수미 신영옥 백건우 등 내로라하는 음악인을 세계 곳곳에 가서 만나고 그 모습을 담아왔다.
“하루 이틀 그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공통점 중 하나는 철저한 프로 근성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단 하루도 연습을 거르지 않았어요.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이 사회를 잘 모른다는 거예요. 항상 누군가 보호해줘야 하는 천진난만한 아기와 같았죠. 때문에 항상 매니저가 뒤에 따라다니고, 때로는 아내가, 남편이, 심지어는 늙으신 어머니가 그 위대한 음악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그들의 걸음마를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어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조수미. 그녀는 열정적이다. 그녀는 억척스럽다.그녀는 쉬지 않고 사랑한다.이것이 Roma에서 만난 그녀였다. - 준초이 글과 사진


음악인들의 사진은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인물 사진가로 영역을 넓히게 된 것이다. 잡지의 연예인 표지 사진을 찍었고, 유명 인사들의 사진도 찍었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엔 청와대에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촬영 장소가 일방적으로 정해져 있어 정중히 사진찍기를 거절하고 나왔다고.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전 당선자 시절, 그의 스튜디오를 직접 찾아와 촬영을 하고 갔다. 그는 인물사진의 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보따리를 안고 있잖아요? 그걸 끄집어내 담는 게 흥미진진하죠. 한 사람의 얼굴에서 희로애락이 전부 묻어나요. 제 나이가 인물사진을 찍기 좋은 나이예요. 경험이 쌓여 이제 눈빛만 봐도 여러 단어를 나열하게 되니까요.”
그는 무엇보다 “사람의 체온을 담는 데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물사진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는 ‘포장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전시하는 일을 즐긴다. 전남 순창에 사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촬영한 ‘비녀 꽂은 할머니 시리즈’를 선보이는가 하면, 바람이 느껴지는 ‘제주도 해녀전’도 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정경화씨는 ‘물기가 촉촉한 여린 아스파라거스 순’을 톡 꺾을 때의 느낌이었다.그녀에겐 어떤 세상사도 느끼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청순함이 있었다. - 준초이 글과 사진


사람의 ‘체온’ 담는 인물사진으로 영역 넓혀
“한 잡지에 ‘사람이 아름답다’란 제목으로 사진 칼럼을 연재했어요. 그때 장애아들이 모인 가브리엘의 집에서 일곱 살 다니엘을 만났죠. 성장이 더디고 눈이 불거져나오는 병을 앓았는데,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해 더욱 안타까웠어요.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겠다 생각하고 벚꽃을 함께 넣었어요. 다행히 사진이 큰 반향을 얻어 후원을 많이 받았죠. 사진으로 무언가 할 수 있구나, 그 힘을 깨닫게 됐습니다.”
영상의 호소력을 절감한 그는 “이제 사진 자체보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얼마 전 화제를 모은 전시회 ‘백제의 미(美)’도 그에게 이런 가능성을 열어준 작업이다. 백제유물 41점의 사진을 찍는 데 꼬박 1년이란 시간이 들었지만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한 차원 높은 ‘세계적인 미소’를 알리게 된 것”을 큰 소득으로 꼽는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하 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에 대한 얘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잠깐 상상만 해보고도 끔찍해서 몸서리를 치고 말다. 행여나 윤정희씨가 없는 백건우씨를, 백건우씨가 없는 윤정희씨……Oh. NO! 이 부부는 잠자는 시간은 못 보았지만, 눈 뜨고 활동하는 동안은 하루 내내 손잡고, 가슴에 품고 산다. 그리고, 티격태격 어린 소년 소녀들이나 할 사랑 싸움을 아마 지금도 계속하고 할 것이다. 보고 싶다. - 준초이 글과 사진


“모나리자의 미소가 인간의 미소라면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숭고한 미소죠. 버릴 것을 다 버리고 사심이 없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미소예요. 세계적인 미소가 한국에 있다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우리나라를 알리는 ‘문화외교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백제유물전은 지난 여름 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에서 열렸고, 조만간 일본 규슈 국립박물관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백제유물 사진 촬영은 시작부터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지만 역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반가사유상 촬영 때 얘기다. 금도금이 벗겨지고 깨진 부분이 있는 옛 유물들은 사진 촬영이 쉽지 않다. 그는 간신히 허가를 얻어 찍은 첫 번째 작업이 실패로 끝났다고 털어놓는다.
“박물관 담당 미술부장이 제가 실패할 거라 생각했다 하더군요.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어 ‘어려움을 모르는구나’ 했다는 거죠. 그래서 제 등 뒤에 대고 ‘두 번 다시 찍지 않게 잘 찍으라’ 했는데 기억 안 나느냐고 묻더라고요. 어쨌든 한 달 만에 두 번째 허가를 얻어 촬영을 하게 됐으니,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첫 촬영 실패 후 그는 2톤 이상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쇠받침대를 제작했다고 한다. 반가사유상을 올려놓고 천천히 돌릴 수 있는 것이었다. 촬영 당일 오전 9시부터 조명을 약하게 한 채 천천히 돌리며 관찰을 했다고. 한순간 눈썹에서 코선으로 이어지는 날렵한 선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오후 4시였다. 조명은 미리 연습해두었던 터라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오후 5시30분. 사정사정해서 30분을 연장해 촬영을 마쳤다. “시간을 더 준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한 번 찍으면 더 걸작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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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나를 꽤나 힘들게 했다.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예상을 깨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었다. 어디에서 어떤 돌발사건이 생길지 나를 긴장시켰다. 고(故) 백남준 선생을 촬영한 날, 나는 기진맥진하여 쭉 뻗어버렸다. - 준초이 글과 사진


준초이는 매주 토요일 오전 6시부터 3시간씩 대학원 강의를 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비를 머금은 찬바람이 옷과 살갗에 닿을 때의 느낌을 담은 이미지 사진 열장을 만들어와라.”
그는 ‘형태미’를 아는 데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젠 교수가 가르칠 게 줄어든 ‘독학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터넷으로 정보가 공개되고 하루가 다르게 바쁘게 돌아가는 디지털 세상이기에 자신도 책 읽고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며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아직도 고민에 차 있다”고 젊은이처럼 말하는 준초이. 늘 편안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나아가느라 삶이 참 고단했을 듯싶다. 더욱이 스스로 선택한 고생길이 긴 터널처럼 이어졌으니, 후회는 없었을까? 안정된 교수직을 마다하고 미국에 간 뒤 후회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는 “후회했다”고 답한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평생의 ‘은인’ 도시코 아주머니에게 배운 사랑

“힘든 고갯길을 지나 평탄한 길에 접어들었을 때 브레이크를 잡아 다시 날 떨어뜨렸죠.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그는 일본 유학시절 그의 삶에 큰 획을 그어준 평생의 ‘은인’을 만났다고 한다. 거친 운송업을 이끌던 ‘여장부’ 오사와 도시코 아주머니다. “무섭기로 소문이 나서 아주머니의 불호령 한마디에 직원들이 부들부들 떨었지만 인간에 대한 애착이 그처럼 강한 분이 없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도시코 아주머니는 한국인·중국인 유학생 30여 명을 돌봐주었다. 남매를 두었지만 그들이 시샘할 만큼 준초이를 아꼈다. 유학시절 내내 살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여행도 데리고 다녔다. 예절에 어긋날 때는 호되게 야단도 쳤다.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거물급 인사들과 교류했지만 젊은이처럼 ‘객기’를 부리는 여유도 있었다.
“역에서 기차 출발시간 5분을 남겨놓고는 달걀과 어묵을 넣은 우동을 사오라고 제게 시키는 겁니다. 서둘러 다녀오는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막 뛰다 보니 우동 국물도 넘치고 달걀, 어묵도 쏟아졌죠. 그때 아주머니가 사람 안 탔다고 소리쳐 기차를 세웠어요. 눈이 쌓인 온천지에서는
준초이가 미국으로 떠났을 때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고생할 때도 도시코 아주머니는 늘 힘이 돼주었다. 11년 전 아주머니가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일본에 가서 아주머니의 생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그 사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정 사진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사진작가 준초이

성장이 더디고 눈이 불거져나오는 병을 앓고 있는 다니엘. 벚꽃을 넣은 이 사진을 촬영한 뒤 후원이 많아져 사진의 힘을 깨닫게 됐다. 귀여운 동자승들. 지산 스님이 보호하는, 다양한 사연의 주인공들이다. 준초이가 ‘백제의 미(美)’ 전에 전시한 ‘자연과 귀걸이’, ‘금동미륵반가사유상’(왼쪽부터).



“아주머니는 베푸는 게 습관이 된 분이었어요. 제가 광고계에 이름을 알린 후 아주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어요. 이렇게 많은 도움을 주신 당신께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느냐고. 그때 웃으면서 말씀하셨죠. 나한테 받은 것이 있다고 생각돼 무언가 돌려주고 싶으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거라, 이 세상에서 널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게 나한테 갚은 거다, 라고.”
도시코 아주머니와 소중한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30년이 흐른 지금, 준초이는 그 또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전에 국내 최고의 사진가가 되는 게 목표였다면, 이젠 남에게 무언가 줄 수 있는 사진가가 되는 게 새로운 꿈이 됐습니다.”

여성동아 2008년 10월 5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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