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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단독 인터뷰

‘시대의 지성’ 이어령 내면 고백

글·송화선 기자 /사진·김형우 기자

2008. 09. 17

지난해 기독교 세례를 받아 화제를 모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최근 종교적 체험과 그동안 감춰온 섬세한 감성을 담은 시집을 냈다. 지금까지 날카로운 이성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를 만나 일흔이 넘은 나이에 찾아온 삶의 좌절을 딛고 새롭게 시작한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내면 고백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에 있느냐고/ 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2’ 중에서

오랜 방황 끝에 절대자 앞에 선 한 인간의 목소리가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신앙 고백의 주인공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74). 지난 1956년 문학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50여 년간 언론인, 수필가, 작가, 문화행정가 등으로 활동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성이다. 그가 최근 첫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펴내며 그동안 감춰왔던 내밀한 속살을 드러내 화제다. 스스로 “딱정벌레의 껍질 아래 숨어 있는 말랑말랑한 흉부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 섬세한 감수성과 영성이 시집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이 전 장관은 약관의 나이에 김동리·서정주·염상섭 같은 대작가를 실명으로 비판하고, 모든 ‘우상’을 파괴하자며 목소리를 높여 우리 지성계에 큰 충격을 던진 인물. 70년대에는 ‘신과 인간’ ‘영성과 이성’ 등의 주제를 놓고 기독교계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종교는 인간의 약점을 가리기 위한 메커니즘 혹은 문화일 뿐”이라고 했고,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구약성서의 노아에 대해서도 “그에게 진짜 사랑이 있었다면 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젊은 시절 내 별명이 ‘붓깡패’였어요. 새파랗게 젊은 놈이 붓 한 자루 들고 깡패처럼 문단을 휘젓고 다닌다고 선배들이 붙여준 거죠. 그렇게 거침없이, 내 이성과 지성에만 의지한 채 70년을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실은 내가 너무 나약한 거요. 내 한계와 외로움을 깨달은 순간,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만난 건 지난 2004년, 일흔의 나이로 혼자 유학을 떠났을 때라고 한다. 이 전 장관은 1년간 일본 교토에 머물며 “찾아갈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절대 고독을 경험했다. 일본 주부들과 더불어 장을 보고, 홀로 끼니를 준비해 식탁에 앉으며 생활인으로서의 일상도 살았다. 너무 일찍 최고의 자리에 올라 한평생 두려울 것 없이 살아온 그에게 이 삶이 가르쳐준 건 “나도 한계 많은 인간이구나”라는 자각이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 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 ‘정말 그럴 때가’ 중에서

이 전 장관이 교토에서 쓴 시에는 당시 그를 짓누르던 외로움과 아픔의 감정이 생생히 담겨 있다. 그는 “이번에 발표한 시들은 마치 기침처럼 내 안에서 쏟아져나온 것들”이라며 “지금껏 많은 글을 써왔지만 독자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 감정에만 충실하게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나는 오랜 시간 무신론자로 살아왔고, 나 자신을 성찰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깜깜한 밤 사원처럼 고요한 내 방에 앉아 있으니 비로소 내가 보이는 거요. 내 평생 처음으로 나를 코너에 몰아넣고 철저하게 해체시키면서 빈약한 삶의 모습을 직면한 거죠.”

실명 위기에 놓인 딸의 아픔 함께 겪으며 신앙의 세계에 발 디뎌
2006년 또 한 번 그를 무너뜨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딸 민아씨(47)에게 병마가 닥친 것. 고교 시절 전국 1, 2등을 다투던 민아씨는 대학 졸업 뒤 미국 유학을 떠나 현지에서 검사가 됐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 갑자기 딸의 망막이 손상되면서 실명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사실 민아씨는 지난 92년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한 뒤 96년과 99년 두 차례 암이 재발해 큰 고통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이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 장애) 진단까지 받아 일을 그만두고 아이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이주한 상태였다. 딸에게 연이어 닥치는 불행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비로서, 이 전 장관은 다시 한 번 자신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아이가 걱정돼 아내와 함께 하와이에 갔는데, 앞이 안 보여 혼자 설거지조차 못 하는 상태더군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이미 망막이 거의 다 떨어져나가 치료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계속 더 나빠지다가 종국엔 실명하게 될 거라고 하는데, 내 지식도 명성도 딸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전 장관은 그날 하와이의 한 교회에서 난생처음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하느님을 부르며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내 남은 생은 당신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빌고 또 빈 것이다.
“평생 교회 문턱에도 가기 싫어했는데 저절로 기도가 나왔어요. ‘내가 말하는 재주와 글 쓰는 재주는 다른 사람보다 좀 있는 편이니 분명 쓰일 데가 있을 겁니다. 나를 쓰십시오. 대신 내 딸은 앞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내 멋대로 신과 계약을 맺었죠.”
그러고는 다른 치료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왔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무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딸의 시력이 돌아왔고, 검사 결과 다 떨어져나갔다고 하던 망막이 손상 없이 제자리에 있다는 진단이 나온 것이다. 이 전 장관은 “미국 의사가 오진을 한 건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치유’라는 기적이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딸의 눈은 그렇게 거짓말처럼 제 상태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제는 그가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이 전 장관은 이듬해 7월, 목사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 ‘이 아무개도 별 수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사람이 많다는 걸 잘 알아요. ‘그동안 지성이네 이성이네 떠들어대더니 고작 딸에게 나타난 기적에 감동해 예수를 믿느냐’고요. 하지만 딸의 치유는 내가 종교를 갖는 데 ‘근인(近因)’이 됐을 뿐입니다. 그보다 더 큰 원인이 된 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였어요. 나는 딸을 통해 나 자신이 빛을 잃고 암으로 쓰러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 아이를 통해 내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거예요. 일본에서 느낀 내 한계, 딸의 고통을 보며 새롭게 깨달은 죽음의 문제, 그리고 하와이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 내 약속까지, 모든 게 하나로 모여 신앙의 세계를 찾게 한 겁니다.”
이 전 장관은 “돌아보면 내 글 쓰기의 모티프는 늘 ‘메멘토 모리’였다”고 말했다. 그는 여섯 살배기 꼬마 시절, 친구들이 미꾸라지와 참새를 잡으러 달려가는 걸 뒤로한 채 혼자 보리밭으로 향하던 날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고요한 그곳에서 그는 혼자 굴렁쇠를 굴리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울어버렸다고 한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 나를 울린 건 외로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메멘토 모리’였습니다. 어린 시절 주무시는 어머니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며 숨소리를 엿들었던 것도, 깊은 밤 불현듯 잠에서 깨면 작은 손으로 어머니를 움켜쥐며 울음을 터뜨렸던 것도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어요. 모든 인간은 기저귀를 차고 나오듯 죽음을 차고 나옵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을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함께 있죠. 어른이 되면 일상에 쫓겨 본능적인 두려움을 잊고 살지만, 내 안에는 어린 시절 나를 울리던 그 정서가 늘 남아 있었어요. 그 메멘토 모리가 나를 신앙으로 이끈 겁니다.”



나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보리밭 길// 여섯 살배기 아이의 뺨에 무슨 연유로/ 눈물이 흘렀는가./ 너무 대낮이 눈부셨는가./ 너무 조용해 귀가 멍멍했는가.// 굴렁쇠를 굴리다 흐르던 눈물/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 ‘메멘토 모리’ 중에서

딸의 고통을 보며 느끼게 된 ‘인간적 사랑의 한계’도 그를 신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전 장관은 오래전 수필 ‘이마를 짚는 손’에서 어린 시절 깨달은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간극에 대해 진솔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가 심한 열병에 걸려 신음할 때 어머니가 이마를 짚어주며 마음 아파하던 체험을 소재로 한 글이다.
“어머니는 내 모습을 보고 아픈 나보다 더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셨어요. 밖의 찬바람을 묻힌 서늘한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주셨죠.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알아버린 겁니다. 어머니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걸요. 펄펄 끓는 내 이마와 그 위를 짚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 사이에 있는 엷은 막, 영원히 깨뜨릴 수 없는 그 간극에서 처음으로 ‘타자’라는 개념을 느꼈어요. 인간이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에 대해,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죽도록 사랑해도, 끝내 너는 너고 나는 나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내가 딸의 아픔을 통해 내 아픔을 느낄 수는 있어도, 그 아픔 자체를 내것으로 가져올 수는 없어요. 그 뼈저린 한계 앞에서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찾고,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도 종교를 원하게 됐다. 이성의 힘을 믿었고, 지성을 삶의 동력으로 삼아 70 평생 달려온 한 인간이 뒤늦게 영성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크리스천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신앙의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고 말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내면 고백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저술 및 시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세례를 받았다는 게 알려지면서 이미 내가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처럼 아는 사람이 많아요. 이번에 이렇게 시까지 발표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세례받을 때 나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성과 영성 사이의 문지방 앞에서 내가 영성으로 향하는 문을 만나게 될지, 아니면 단단한 벽에 부딪히게 될지 나 자신도 모른다고요. 세례를 받고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문지방 앞에 서 있습니다. 문지방 위에 한 다리를 올린 채 다른 한 다리를 마저 올렸다 다시 내렸다 하며 휘청이고 있다는 게 정확한 고백일 겁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내게 기독교인이냐고 물으면 나는 ‘예’라고 답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가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예’라고 답하고 싶은 순간에도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건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이렇게 조금씩 믿음이 시작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의 한계’ 깨달은 뒤 한층 풍요롭고 자유로워진 삶
“하와이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날, 나는 딸이 나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약속했어요. 아직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위해 내가 가진 말과 글을 바치겠다는 약속은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시를 썼고, 기독교와 관련된 강연도 하고 있어요. 어쩌면 이번에 발표한 시집은 하나님을 향해 ‘그동안 교회 몇 번 나갔나 묻지 마시고 이걸로 좀 봐주십시오’하고 드리는 제 부탁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 시집이 모두 신앙 고백으로 채워져 있는 건 아니다. 이 전 장관은 섬세한 감성의 연애시 ‘연시-김소월을 흉내낸’부터, 닭을 학대하는 양계장 실태를 고발하는 실험시 ‘양계장 보고서’까지 ‘정말 이 시들을 이어령이 쓴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만드는 다양한 형식의 시를 고루 실었다. 평소 평론과 칼럼에서 보이던 현학적이고 정련된 문장과 달리 그의 시어는 소박하기만 하다.
‘당신이 찾을 때에는 나는 없어요/ 나는 소설책 주인공이 되어/ 남들은 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만/ 당신은 내 말을 들을 수 없어요’(연시-김소월을 흉내낸)라고 노래하는 이어령에게선 더 이상 기존의 ‘석학’ 이미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시집을 읽으며 화를 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이런 걸 기대하고 이어령의 시를 읽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다만 시의 형식을 통해 내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지금까지는 독자를 위한 ‘서비스업’으로서 문학을 해왔다면, 그래서 시적 아포리즘(경구)이나 메타포(비유) 속에 나를 숨겨왔다면, 이번엔 철저하게 나의 즐거움만을 생각하며 글을 썼어요.”
이 전 장관은 이번 책을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새롭게 태어난 덕분에 저지를 수 있었던 ‘유쾌한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다음번에는 독자들이 “이게 시냐?”고 물을 법한, 세상을 뒤흔들 파격적인 시를 쓸 생각이라고도 했다. 그가 마치 선문답처럼 공개한 시의 콘셉트는 “다다이스트 이상의 시보다 더 재미있는, 음계를 벗어난 음악 같은, 우리 언어에 바치는 헌사 같은” 시. 그는 이미 이런 시를 여러 편 써두었고, 앞으로 최소한 50~60편 정도는 더 완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작품들을 생전에는 발표하지 않을 겁니다. 너무 실험적이라 내 명성에는 타격을 주고, 독자들에게는 노여움을, 출판사에는 가난함만 주게 될 테니까요(웃음). 나는 평생 말로 먹고살아왔지만, 돌아보면 형편없는 기수였어요. 지금 새로운 형식의 시를 쓰는 건, 이제라도 내가 가진 언어의 기동력을 최대한 발휘해 우리 말을 훌륭하게 조련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때 나는 죽어도 내 언어는 남아 불멸하기를 바라는 허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무겁고 조심스러웠어요. 하지만 이제는 인간이 만든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내가 남길 시가 우리 언어에 충격과 자극이 돼 한국어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혀주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겁니다.”
지성과 영성의 문턱에서 헤매고 있다고 말했지만,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그 너머를 향한 열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의 눈빛은 행복해보였다.

내가 지금 방황하는 까닭은/ 사랑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헤매고 있는 까닭은/ 진실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 ‘탕자의 노래’ 중에서

일흔이 넘은 지금도 그는 여전히 삶의 진실을 찾아 치열하게 방황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석학’이나 ‘신 앞에 선 신앙인’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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