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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지구촌 화제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에 도전하는 버락 오바마

글·정혜연 기자/사진제공·REX

2008. 07. 17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에 도전하는 버락 오바마

지난 6월 초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한발짝 다가선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 케냐 출신 유학생의 아들로 태어나 인종차별과 부모의 이혼, 청소년기의 방황을 극복하고 변화를 모토로 내세워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의 인생 스토리를 소개한다.

“흑인의 아메리카도, 백인의 아메리카도, 라틴계의 아메리카도, 아시아계의 아메리카도 없습니다. 오로지 미합중국만 있을 뿐입니다. … 우리는 하나입니다.”
지난 2004년 여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무명에 가까운 한 흑인 정치인이 연설을 마치자 대회장 곳곳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그의 연설에 크게 감동했고 이후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바로 버락 오바마(47·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다. 오바마는 이러한 인기를 발판으로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때만 해도 아무도 그가 힐러리 클린턴 등 쟁쟁한 정치인들을 물리치고 후보로 확정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냈고 이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향한 본격적인 대장정에 올랐다.
사실 오바마는 서른셋의 나이에 자서전을 썼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케냐 출신 유학생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의 이혼을 겪고 인종차별을 경험했으며 술과 마약에 탐닉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역사회를 살리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 후 술과 마약을 끊고 컬럼비아대·하버드 법대 등에서 공부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했다.
케냐 빈농 출신인 오바마의 아버지는 스물세 살 때 케네디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하와이대에서 유학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열여덟 살이던 백인 여성 앤 던햄과 사랑에 빠져 1960년 결혼했고 이듬해 오바마를 낳았다. 당시 미국 전체 주 가운데 절반이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금하고 있었다. 오바마는 자신의 부모가 결혼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하와이가 인종문제에 관대했으며 어머니가 흑인에 대한 편견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두 살 때 아버지는 하버드대에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 이들 모자 곁을 떠났고 이후 그는 줄곧 어머니 손에 컸다. 훗날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케냐에 돌아가 초대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얼마 후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축출돼 비참한 삶을 살다 8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과 재혼한 그의 어머니는 66년 인도네시아로 이주, 그곳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빈민여성을 위한 소액대출사업에 몸담았다. 오바마는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인도네시아에 거주했는데 그는 “내가 가진 좋은 점들은 모두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할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오바마는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학교와 가톨릭학교를 다녔다. 이 무렵 그의 어머니는 새벽 4시에 오바마를 깨워 영어를 가르치고,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을 읽히며 흑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했다. 그가 인도네시아 아이들에게 흑인이라며 멸시를 당할 때도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를 감내할 만큼 강인하기 때문에 부여된 특별한 운명”이라고 가르쳤다고.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에 도전하는 버락 오바마

깊은 울림을 남기는 연설로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버락 오바마.


혼혈 출신에 다양한 경험 지녀 인종·종교·계층 아우르는 폭넓은 리더십 발휘
하지만 그의 사춘기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71년 어머니가 또다시 이혼하자 하와이로 돌아와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자신을 ‘검둥이(negro)’라 부르는 말에 상처받았고, 백인도 흑인도 아닌 자신의 모습에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술과 마약에 손을 대기도 했다고.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고 LA 옥시덴탈칼리지에 입학한 오바마는 ‘새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로 술과 마약을 끊고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81년 미국 동부의 명문인 컬럼비아대에 편입했다. 대학에서 정치학과 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점차 사회 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컨설팅회사에 취직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결국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시카고 남부에서 지역활동가로 일하며 주민 교육과 생활 환경 개선에 힘썼다. 시카고에서의 3년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는 “실패와 한계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조금씩 변화·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연설을 할 때마다 당시를 회상하며 “의미 있는 변화는 항상 일반 대중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대중들이 엄청난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말한다.
오바마는 미국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법과 정치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88년 뒤늦게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다. 유명 로펌에 취직한 오바마는 그곳의 유일한 흑인 변호사 미셸(44)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는 종종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축복은 바로 가족이다. 미셸이라는 훌륭한 아내가 있고, 사랑스러운 두 딸을 얻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며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다. 안정된 가정을 꾸린 그는 인권변호사, 시카고대 로스쿨 교수를 거친 뒤 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고 저소득층 노동자의 조세부담 경감과 복지향상, 정치윤리 개혁에 초점을 맞춘 입법활동을 해왔다.
그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내세운 모토는 ‘변화’다. 낡은 관행을 떨쳐버리고 젊고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자는 오바마의 정치적인 지향과 연설 스타일 등은 케네디 전 대통령과 흡사하다. 덕분에 그는 ‘검은 케네디’라는 별명을 얻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인 캐롤라인 케네디도 “내 아버지처럼 국민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대통령을 보지 못했는데 미국의 새로운 시대를 위해 아버지 같은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을 이제 찾았다”며 오바마를 지지했다. 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꼽히는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도 “킹 목사는 꿈이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오바마를 통해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며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지난 6월 초 결국 오바마의 유력한 경쟁자로 꼽혔던 힐러리 클린턴은 후보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수를 확보하지 못해 대선 포기를 선언했고,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결정됐다. 오바마는 오는 11월 공화당 대선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의 결전을 앞두고 있다. 경선기간 내내 ‘당신이 믿을 수 있는 변화(Change You Can Believe In)’라는 선거 구호로 유례없는 인기를 얻었던 오바마. 그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돼 미국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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