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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Art&Culture | 작가의 공간

신철의 수류산방

자연 소재로 ‘착한’ 그림 그리는 화가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2008. 07. 11

‘기억풀이’ 연작 시리즈를 통해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행복을 그려온 화가 신철의 작업실은 경기도 양평에 있다. 낮에는 눈부신 여름 햇살, 밤에는 청명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곁을 지키는 그의 작업실 ‘수류산방’을 찾았다.

신철의 수류산방

신철씨는 ‘기억풀이’라고 이름 붙인 그림(왼쪽)에 대해 “달빛 아래 꽃을 보니 어떤 꽃은 솔방울처럼 보이고 어떤 꽃은 별처럼 보였다. 하얗게 빛나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달빛을 머금고 고인 물이었다”고 설명했다. 오른쪽은 그의 작업실에서 그림과 함께 누운 신씨.


서양화가 신철(55)의 작업실 책상 옆 벽면에는 짧은 메모가 적힌 노란 메모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여행 장소에서, 산책길에서, 또는 마당 텃밭을 가꾸다 만난 꽃과 풀, 벌레와 돌멩이에 대한 메모다. 그는 일상에서 짧지만 강한 느낌을 받을 때면 스케치를 하는 대신 메모지에 적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글을 보면서 그림을 구상한다. 화가로서 신씨의 명성을 널리 알린 ‘기억풀이’ 연작도 이렇게 탄생했다. 이 작품은 모두 자연과의 만남에서 떠오른 머릿속 기억을 상념 속에 굴리고 반죽해 화폭에 옮긴 것. 언젠가 또 다른 얼굴과 표정으로 세상에 태어날 단상들을 슬쩍 들여다봤다.
“꽃이 만발하다. 너그러운 봄날. 시리디시린 그리움. 만나지 못한 시간, 산책, 여행…”
“꽃인 줄 알았더니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의 숲을 조심스레 걷고 있다. 그들이 다쳐서는 안 된다.”
신철의 수류산방

이 글들이 탄생한 곳은 신씨의 작업실 ‘수류산방(樹流山房)’이 있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이다. 어린 시절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할 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전라남도 청산도에서 자란 화가는 3년 전 “울퉁불퉁 재미있으면서도 사람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산세가 고향과 닮은 것 같아”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거진 녹음과 바람, 한여름 햇살만 가득한 숲 안에 직접 설계한 작업실을 지은 뒤 텃밭도 만들었다. 밭에서는 무공해 야채가 쑥쑥 자라고 뒷산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이 아늑한 수류산방은 신씨의 보물 1호. 그는 “이 집에 살게 된 것이 마냥 좋다”고 흐뭇해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는 자연에 미안하기도 하다”고 했다. 가재와 도롱뇽이 어울려 살던 개울가, 고라니와 다람쥐가 뛰놀던 산기슭에 굳이 사람 사는 공간을 만든 것이 죄스럽다는 뜻이다. 그의 이런 조심스런 마음은 지난해 연 개인전의 제목을 ‘감히, 숲을 엿보다’로 붙인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신철의 수류산방

밝은 색을 사용해 편안하고 경쾌한 느낌을 풍기는 작품 ‘기억풀이’ 연작을 그리는 신철씨의 작업실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따뜻하고 평화롭다.


자연이 주는 축복을 더 많은 이와 공유하는 게 ‘수류산방’의 꿈
신씨의 작품은 그의 이런 품성처럼 ‘착하다’. 화가가 자연에서 만난 꽃과 열매, 풀잎들이 그의 마음속 기나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복잡하고 섬세한 디테일을 다 떨군 채 간략하고 함축적인 모양새가 돼 화폭에 담기는 것. 얼핏 초등학생 아이의 낙서를 연상시킬 만큼 단순하고 소박한 그림 덕분에 생긴 에피소드도 있다.
“몇 년 전 개인전을 할 때인데 한 아주머니가 전시장에 들어오다가 멈칫하더니 ‘여기는 아이들 그림이네!’ 하면서 그냥 나가더라고요. 그 순간에는 좀 언짢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좋은 이야기였어요. 화가라고 하면 흔히 테크니컬하고 어려운 그림만 그릴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그도 대학시절까지는 당시 유행하던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화풍에 따라 어렵고 기술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잘 그린 그림보다 “유치하고 촌스럽지만 재미있는, 그래서 편안하게 다가오는” 그림을 그리는 게 목표가 됐다고. 천장이 높은 그의 작업실 벽에 붙어 있는 작품들도 모두 분홍·노랑 등 밝은 색을 사용해 편안하고 경쾌한 느낌을 풍긴다. 신씨는 “화가 자신은 오래 생각하고 무겁게 명상해서 그리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웃음이 절로 나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나 후배들은 제 걱정을 좀 하죠. 그렇게 ‘누구나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을 그리면 인기는 얻어도 잘 안 팔린다고요. 하하하.”
하지만 그가 지금 원하는 건 ‘좋은 작품’이기 때문에 이런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학 졸업 뒤 20년 동안 미술교사로 일하며 아내와 두 자녀를 부양한 뒤 비로소 전업작가로 나선 그는 “오랜 세월 배우고 방황하고 느끼고 축적한 것들을 바탕으로 이제 열매를 맺을 시간”이라고 말했다.
“현대인은 일상에 쫓기느라 자연이 주는 희열과 행복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살잖아요. 자연이 주는 축복을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공유하는 게 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착해지려고 한다. “삶의 희열을 전달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내 마음 밑바닥에 착한 심성이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신철의 수류산방

신철씨의 ‘기억풀이’ 연작. 왼쪽부터 축복받은 젊음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젊은 여인, 섬이지만 어촌보다 산촌에 가까웠던 고향 청산도, 활짝 꽃이 핀 어느날의 외출 풍경 등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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