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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상상력으로 유머러스한 작품세계 보여주는 화가 황주리

기획·김동희 기자 / 글·박경아‘자유기고가’ / 사진·성종윤‘프리랜서’ || ■ 자료제공·갤러리현대

입력 2008.02.13 11:39:00

화가 황주리씨가 화력(畵歷) 30년이 되는 해를 맞아 개인전을 연다. 회화작품 외에도 돌·안경·엽서 등을 이용한 오브제 작품까지 그의 예술인생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1백여 점을 선보인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유머러스한 작품세계 보여주는 화가 황주리

And Life Goes On…, 2003, 캔버스에 아크릴릭, 184×244cm(좌) 고독하고 상처받은 인간상, 진정한 소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통해 역설적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


“처음 전시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해부터 따져보니 올해가 딱 화력(畵歷) 30년이 되는 해예요. 제 작품 가운데 ‘액기스’만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어요.”
화려한 원색과 흑백의 대조, 풍요로운 상상력과 유머러스한 그림언어를 구사해 작품마다 마치 옴니버스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심어놓는 화가 황주리씨(51)가 1월23일부터 2월13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 ‘황주리 1980-2008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And Life Goes On…)’를 연다.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주자인 황씨의 이번 개인전은 8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모든 시기의 작품을 조망할 수 있는 회고전. 회화작품 외에도 돌·안경·엽서 등을 이용한 오브제 작품까지 1백여 점이 전시된다.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어른들은 ‘아, 저 시절에 나도 있었지’ 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주면 좋겠어요. 작가인 내가 말하고, 관객은 내가 말한 대로만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볼 때마다 다른 작품,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작품이 되면 좋겠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 번 더 오고 싶은 재미있는 전시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 한복판 종로구 세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이화여대 서양화과,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한 뒤 타고난 도시의 감성을 화려한 원색으로 풀어내며 국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87년 미국으로 날아가 뉴욕대학원에서 세라믹 조각을 공부하면서 과묵한 흑백 톤의 붓질로 인간 내면의 표정을 파고드는 진지한 성찰 작업을 보여주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 속 행복의 소중함 느끼게 하는 작품들 선보여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전 제 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에요. 지금까지 작업한 게 3천 점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 약 1천 점은 제가 소장하고 있어요. 제 그림이 대작이 많은 이유도 있지만 제 그림을 다른 이에게 보내는 것은 마치 자식을 입양 보내는 것 같아서….”
하나하나 자식 같다는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소소한 일상 속 행복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고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선재미술관, 호암미술관, 일본 후쿠오카 시립미술관 등에 전시돼 있다.
“유독 애착이 가는 작품들은 주로 흑백그림이에요. 색에 취하지 않고 마음의 뼈대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어서 좀 더 진솔한 작품들이 많거든요.”

풍부한 상상력으로 유머러스한 작품세계 보여주는 화가 황주리

본래는 화려한 색을 좋아하는 그지만 화려한 원색에 둘러싸여 채색을 하다 보면 색의 유혹에 빠져들어 원래 그리고자 했던 것을 놓치는 일이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의 주제는 사람이었다. 같은 주제지만 시대별로 ‘바리에이션(변주)’을 보인다.
“80년대는 갇힌 사회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그림 속에 담겨 있어 우울한 시대의 자화상이 많았어요. 90년대 들어서는 모든 걸 다 해도 되는 세상이 됐지만 개인의 행복이 중시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자리찾기, 행복찾기에 고통이 따랐죠.”
그래서 그의 주제 역시 일상으로 돌아가 탄생이나 죽음 같은 ‘삶의 축제’를 옴니버스 스타일로 그려내게 됐다.
“2000년대 역시 주제는 인간 세상의 오만군상이지만 캔버스 위주의 작업에서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한 작업으로 변해갔죠. 내 주위 모든 것이 캔버스 같아 갈수록 재미있어요.”
어쩌면 그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암울했던 시절에서부터 인생과 행복을 갈구하는 시대를 거쳐 마침내 캔버스로부터도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추억이 서린 낡은 안경들, 지나간 시간을 말해주는 시계들, 오랫동안 간직해온 엽서들, 장구한 세월을 함축한 돌덩어리들에서 그의 붓은 이제 자유의 날개를 달았다.
출판사를 운영하던 부친, 문학도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그가 왜 이렇게 사람이란 주제에 천착하여 인간의 소소하고 잡다한 외면에서부터 깊숙한 내면 세계에까지 들어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일까.
“저는 화가가 안 됐으면 정신과 의사가 됐을 것 같아요. 사람이 어떻게 상처받고 치유받는지, 사람에 대한 관심은 타고난 것 같거든요. 누군가가 오늘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면 내 그림을 보고 다시 살고 싶은 기분이 들기를, 내 작품이 누군가에게 치유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학적인’ 부모 슬하에서 성장한 그는 그림뿐 아니라 글 솜씨도 수준급이다. 그는 이번 전시회를 앞두고 새 산문집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생각의 나무)도 출간했다. 벌써 네 번째 산문집이다.
“‘삶은 이런 것이다’ 하는 짧은 사색들을 간추렸어요. 삶의 의욕이 없거나 우울한 사람들,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이 될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이 누군가에게는 투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 ‘그림계’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미술품 투자 붐이 불게 되자 뉴욕에서 인정받고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도 전시회를 통해 명성을 쌓아온 그에게 그림을 사겠다는 전화가 쇄도했다고 한다.
“그림을 주식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제 그림이 주식이나 돈처럼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서글픈 기분도 들죠. 당장 먹고살기 곤란한 게 아니라면 예술가 입장에서는 돈이 다가 아니에요.”
그는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수준 높은 미술품 애호가 문화 탄생을 위한 진통의 단계라며, 그리 나쁜 현상만은 아니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림을 구입하고 싶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구입하세요. 지금 시점에서 투자를 한다는 것은 어차피 모험이거든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택해 먼저 정서적인 만족감부터 얻는 것이 좋아요. 여기에다 약간의 객관성을 더하자면 권위 있는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도 방법이고요.”
서울 구파발 인근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빨간색이 포인트로 들어 있는 검정 안경을 꼈다. 전체적으로 나이보다 생기 있고 건강한 분위기다.
“전 회사에 출근하듯 규칙적으로 작업을 해요. 오전에는 생각을 가다듬고, 자료를 뒤지다가 점심식사 후부터 새벽 2시까지 작업을 합니다. 저녁 먹은 다음에는 꼭 1시간씩 산책을 하고요.”
그는 가끔 인터넷을 뒤져 자신의 그림이나 글에 대한 감상문을 읽는다.
“내 그림도 보고 책도 읽어주는 분들의 글을 접하면 고마워요. 내가 이렇게 사람들과 소통하고 호흡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거든요.”
가슴속에 켜켜 쌓인 쓸쓸함과 따뜻함을 그림과 글로 반추하며 결국은 휴머니즘을 말하는 화가 황주리. 이번 전시회 일정에 맞춰 전체 작품을 시기별로 조망하는 화집 ‘And Life Goes On’(생각의 나무)도 출간한다.
전시기간 ~2월13일 오전 10시~오후 6시, 월요일 휴관 장소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 문의 02-734-6111~3 www.galleryhyundai.com

여성동아 2008년 2월 5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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