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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긍정의 힘

두 까까머리 소년의 아름다운 우정

글·고승철‘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2008. 02. 13

A군과 B군은 중학생 시절 처음 만났다. 중2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친해졌다.
“야, 깜상, 이리 와!”
유난히 얼굴이 새카만 A군을 급우들은 이렇게 부르며 놀렸다. A군을 악동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B군은 나름대로 애썼다. 악동들을 꾸짖기도 하고 도넛 등 군것질거리를 사주며 달래기도 했다. A군은 농촌 출신이었고 B군은 지방도시 중산층 집에서 자랐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라 A군은 도시 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A군은 총명했다. 성적도 최상위권이었다. 그러나 도시 아이들처럼 깔끔한 외모가 아니라는 이유로 교사들에게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급우들은 A군이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지조차 잘 몰랐다.
지적 호기심이 많은 A군은 일본어를 혼자서 익혔다. 공책에 히라가나 글씨를 쓰며 단어를 외웠다. 쉬는 시간에 그 모습을 본 악동 하나가 A군을 괴롭혔다. 일본어를 공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야, 쪽발이 ××!”
악동은 A군의 목을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A군은 당황해했다.
B군이 나섰다.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어를 알아야지. 친구에게 이 무슨 행패야?”
B군의 종용으로 악동은 A군에게 사과했다.
B군은 그날 A군을 위로하려고 자기 집에 데려갔다. B군의 어머니가 과일과 빵을 내놓으며 A군을 기쁘게 맞았다. 그 후 A군은 B군 집에 무시로 드나들었다.
고교에 진학할 때가 왔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A군은 인문계 고교에 지원하지 못하고 상업학교에 갔다. 인문계 고교에 진학한 B군은 A군의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A군과 자주 만날 궁리를 하다가 둘이 함께 주산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상고 학생은 주판을 능숙하게 다뤄야 하던 시절이었다. B군은 주산학원에서 유일한 인문계 고교생이었다. 그래서 B군의 교복 색깔이 여러 수강생 가운데서 튀었다. 고1 때 그렇게 서너 달을 학원에 다녔다. 덕분에 B군의 주산 실력은 3급이 됐다.
고2 여름방학이 왔다. 인문계 고교생들은 벌써 입시 준비로 긴장할 때다. 방학인데도 보충수업을 받기 위해 등교해야 했다.
B군은 ‘작은 반란’을 시도한다. 수업을 통째로 빼먹고 A군과 함께 여행을 가기로…. 둘이서 낯선 곳으로 떠났다. A군은 B군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잠은 어디서 자나? 여관에서?”
B군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걱정 말아. 어디에 가든 학교가 있을 것 아닌가? 학교엔 숙직실이 있겠지? 숙직 선생님께 부탁해서 하룻밤 신세지면 되는 거야.”
당시엔 교사들이 돌아가며 매일 밤 숙직 근무를 했다. B군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순천, 여수, 광주를 돌며 학교 숙직실에서 잤다. 어떤 선생님은 막걸리를 사 와서 함께 마시자고 했다. 기차·배·버스 등을 타고 낯선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해방감을 만끽했다.
B군은 A군에게 “호연지기를 가지면 세상살이에 무엇이 두려우랴”며 용기를 부추겼다.
A군은 상업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지방 신문에 수석졸업자 얼굴 사진이 보도됐다. 그 사진을 발견한 B군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A군은 실무자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야간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퇴근하자마자 학교로 달려가고 심야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한 B군은 A군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갔다. 방학 때면 B군의 고향 집에서 만나 회포를 풀곤 했다.

오랜 세월 끌어주고 밀어준 두 친구
세월이 흘러 20대 후반이 된 A씨는 대학 졸업 후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머물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자신감을 갖는 게 급선무였다. B씨는 A씨의 사기를 북돋웠다.
“여기 명문대 출신자들에게 겁먹을 필고요 없어. 촌놈의 뚝심을 보여주라고!”
A씨는 힘을 얻어 책에 파묻힌 끝에 합격했다. 사법고시 합격자가 1천 명인 요즘과는 달리 소수만 뽑는 시절이어서 A씨의 합격은 대단한 쾌거였다.
A씨는 검사로 근무했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국 여러 지방을 돌았다. 전근을 갈 때마다 B씨에게 “놀러오라”고 연락했지만 B씨는 바쁜 직장일 때문에 응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A씨 근무지로 출장 갈 때가 있으면 만나는 정도였다.
A씨는 B씨의 어머니를 가끔 찾아가 B씨 대신 아들 노릇을 했다. B씨는 고향에 거의 가지 못할 만큼 업무량이 많은 회사에 다녔다.
세월이 흘러 A씨, B씨도 중년이 됐다.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활동하는 A씨가 어느 날 B씨 사무실로 찾아왔다.
“나, 변호사 사무실, 문 닫았어.”
“왜?”
A씨의 눈가에 갑자기 물기가 감돌았다. 병 때문이라고 했다. B씨는 그동안 A씨에 대해 너무 무심했던 과오를 뉘우쳤다.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의 안부를 묻지 않았으니….
“이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네. 작별 인사하러 왔어.”
“뭐?”
“변호사 사무실도 잘되고, 아이들도 명문대학 들어가고…. 이제 살 만하니까 이런 재앙이….”
“허, 무슨 소리야?”
B씨는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허탈감을 느꼈다. 그때 A씨는 호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B씨에게 건넸다.
“어릴 때 자네 어머니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문안드리러 갈 처지가 못 되네. 대신 자네가 이 돈으로 노모께 과일이라도 사드려.”
B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돈 봉투를 받았다. B씨는 A씨를 위로하기 위해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의학이 워낙 발달했지 않아? 치료 제대로 받고 섭생 잘하면 꼭 완치될 거야. ‘일병 장수’란 말, 못 들어봤어? 병 하나를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잘 다스리면 오히려 더 오래 산다는 거야. 무병 장수자보다 수명이 길다고 하지.”
A씨는 B씨에게 사진을 함께 찍자고 제의했다. 둘은 오랜만에 손을 잡고 포즈를 취했다.
A씨는 요양생활을 시작했다. 건강이 회복되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몇 달 후 B씨는 A씨의 전화를 받고 반색했다.
“덕분에 요즘 건강이 상당히 좋아졌어. 가끔 동료 변호사 사무실에 소일 삼아 나갈 정도가 됐지.”
“다행이군. 지금 당장 얼굴 한번 봄세.”
“아니, 조금 더 있다가…. 그리고…, 어젯밤 꿈에서 자네 어머니를 봤네. 요즘 잘 계신가?”
“병원에 누워 계시는데 팔순 넘은 노인이니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일전에 자네가 준 돈으로 어머니께 홍삼 세트 사드렸어.”
“어머니를 잘 모셔.”
“알았네. 자네 목소리가 쾌활하니 듣기 좋군.”
“일병 장수 아닌가, 하하하….”
B씨는 노모가 병상에 누운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B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폴더를 여는 순간, B씨 누나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어머니 돌아가셨다.”
묘했다. A씨의 꿈에 B씨 어머니가 나타난 것과 별세 소식은 우연의 일치겠지만….
B씨는 장례를 마치고 상경할 때 고속버스를 탔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잠을 청했다. 비몽사몽 중에 A씨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A씨는 환히 웃으면 말했다.
“내 병세에 대해 비관했다가 자네 격려 덕분에 낙관하게 됐어. 자네는 늘 불가능보다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잖아? 고맙네.”
꿈이었다. B씨는 기지개를 켜며 A씨가 얼른 낫기를 기원했다. ‘긍정의 힘’을 믿는 B씨는 A씨가 완쾌하면 고교 시절 여행을 다녔던 곳에 다시 함께 갈 작정이다.

고승철씨는… 부산·통영·마산 등 항구도시에서 바다 너머 세계를 동경하며 자랐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경향신문에 입사,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파리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이국 문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 애썼다. 동아일보 경제부장·출판국장 등을 거쳐 현재는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제1회 디지털 작가상 공모전에서 장편 역사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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