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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시련을 딛고

‘그녀들 비탈에 서다’ 저자 시인 이기와

“내가 술집 여종업원들에게 바치는 시를 쓰는 이유”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2008. 01. 23

최근 ‘그녀들 비탈에 서다’라는 시집을 낸 시인 이기와씨는 오랜 세월 ‘비탈에 선 채’ 살아왔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살아남기 위해 공장노동자, 술집 마담 등을 전전하며 돈을 벌어야 했던 것. 허무와 고통에 방황하던 어느 날 시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를 만났다.

‘그녀들 비탈에 서다’ 저자 시인 이기와

“어린 시절 제 꿈은 구멍가게 주인이 되는 거였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찐빵 하나를 훔쳐 먹다가 가게 주인에게 정강이에 피가 나도록 두들겨 맞은 뒤 생긴 소망이죠. 어른이 되면 구멍가게 주인이 돼 무엇이든 배 터지게 먹고 싶었어요.”
최근 ‘그녀들 비탈에 서다’라는 시집을 펴낸 시인 이기와씨(40)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에겐 행복한 유년기의 기억이 거의 없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서대문의 무허가 판자촌.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일하다 당한 사고 후유증으로 하루 종일 누워 있었고,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생계를 꾸리느라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막일을 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씨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가족은 오빠는 부잣집 양자로, 언니는 식모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씨는 지난 2005년 펴낸 산문집에서 신경림 시인의 시 ‘산1번지’ 배경이 된 홍은동 산1번지를 다녀온 뒤 “신경림 시인은 여기서 4년을 살았다고 하는데, 난 이런 곳에서 18년을 살았다. 서대문 굴레방다리 아래 움막집에서 4년, 성산동 판자촌에서 4년, 양평동 판자촌에서 2년, 목동 판자촌에서 3년, 신월동 달동네에서 3년, 그리고 뚜렷하지 않은 2년은 철거기간 동안 군용 천막을 리어카에 싣고 정착할 곳을 찾아 이동하다 보낸 기간이다.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치게 살았던 내 고향 빈민굴”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 삶이었다. 판자촌에서 또 다른 판자촌으로, 가난에서 더 심한 가난으로 흘러가는 삶. 막내인 이씨는 그나마 엄마 곁에 살 수 있었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가방공장, 봉제공장을 다니며 돈을 벌어야 했다고 한다.
“엄마는 부지런히 일을 했지만 뭘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몰랐던 것 같아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몸으로 쉼 없이 고된 노동을 다녔는데도 살림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죠. 그런 엄마가 불쌍해 잠든 엄마 등에 얼굴을 묻고 남몰래 운 적도 많았어요.”
먹고살기 위해 모진 애를 쓰면서, 엄마는 한편으로 남자도 만났다. 어린 딸을 혼자 집에 두고 다닐 수 없어 남자들과의 술자리에 딸도 데려갔고,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이 지나면 바로 단칸방에서 동거가 시작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누구도 엄마와 저를 가난의 늪에서 건져주지 않았죠. 오히려 초등학생인 저한테조차 돈을 벌어오라며 때리고, 성희롱하기 일쑤였어요. 술만 마시면 저를 발가벗겨 사람 많은 공터로 내보내던 사람도 있었죠.”

극심한 가난과 부모의 죽음 겪은 뒤 행복한 가정 꿈꿨지만 남편 노름빚으로 이혼
이씨가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끔찍한 ‘새아버지들’과의 인연을 끝낼 수 있었다. 이씨는 “한때는 엄마를 미워하고, 왜 내게 이런 최악의 경험을 하게 했을까 원망한 적도 있지만, 그때 이후로는 그저 연민만 남았다”며 “어쩌면 끝내 단 한순간도 좋은 세월을 살아보지 못한 건 우리 엄마니까…”라고 말을 흐렸다.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뒤 제겐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현모양처가 되는 거였죠. 엄마처럼 불행하게 살지는 않겠다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는 반드시 행복한 가정의 사랑받는 아내, 훌륭한 엄마가 되고야 말겠노라고 결심했어요.”

‘그녀들 비탈에 서다’ 저자 시인 이기와

그래서였을까. 고1 때, 동네 공원에서 밤늦게까지 기타를 치던 열 살 위 남자를 만났을 때 그는 너무 쉽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늘 부유하듯 떠돌던 삶에서 벗어나 그와 함께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아에 고등학생인데다 돈도 없는 저를 남자 집안에서 받아줄 리 없었죠. 다른 조건을 바꿀 수 없다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종로에 있는 레스토랑에 취직했죠. 거기서 난생처음으로 1백만원을 모았을 때 느꼈던 흥분과 감동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그러나 그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던 1백만원을 들고도 그가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려면, ‘현모양처’가 돼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때 그에게 인사동에 있는 일본인 상대 술집에서 한복을 입고 술시중을 드는 ‘기생’의 도우미 일을 하면 어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방청소를 하는 일이었는데, 수입 외에 팁도 제법 모였다고 한다.
“돈이 생길 때마다 하루에 몇 번이 됐든 은행으로 달려가 저축을 했어요. 방에 뒀다가 만원 한 장이라도 없어질까봐 두려웠거든요.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이 1천만원이 됐을 때 요정을 그만두고 방 두 칸짜리 집을 얻어 그 남자와 결혼했어요. 제가 열여덟 살 때였죠.”
남편은 여전히 직업이 없는 상태였지만 그는 “돈은 내가 벌 테니 오래오래 행복하게만 살자”고 했다고 한다. 이듬해 딸이 태어났고, 이씨는 동네 미장원에서 보조일을 하며 배운 미용기술로 동네 아주머니들의 머리 손질을 도맡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런데 남편이 노름을 시작했어요. 노름을 하느라 몇날 며칠 집에 안 들어오다가 어느 날엔 흠씬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들어오기도 했죠.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어요. 이혼을 하면 엄마처럼 살게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웠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만큼은 제대로 꾸리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노름빚이 점점 늘어나 전세보증금을 빼 갚은 뒤 월세로 옮긴 집에서조차 쫓겨날 상황이 되자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는 ‘딸아이와 거리로 나앉을 수는 없어’ 이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페를 하나 얻어 술장사를 시작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술 취한 남자의 추태와 주정, 업신여김과 욕설을 저녁 내내 웃는 얼굴로 받아내고 난 다음이면 영혼이 다 빠져나가고 빈껍데기만 남은 듯한 허전함이 몰려왔다고 한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부터, 그는 시를 읽기 시작했다.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 모음집을 하나 사서 읽었는데 제가 맑고 새로워지는 것 같았어요. 술로도 위로되지 않던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게 느껴졌죠. 그때 문득 나도 이런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이씨는 영업이 끝나면 술집 테이블에 촛불을 켜고 큰맘먹고 장만한 전동타자기를 타닥타닥 두드리며 한 장 한 장 시를 써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쓴 시가 2백 편이 넘었을 때 “내가 쓰고 있는 게 시가 맞기는 한 건지” 확인하기 위해 대학에 가기로 했다. 저녁 늦게까지 장사를 하다 다음 날 술이 덜 깨 울렁거리는 몸으로 학원을 오간 끝에 그는 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재학 중이던 지난 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지하역’이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내친김에 더 공부하려고 방송통신대 국문과를 거쳐, 중앙대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그동안의 술집 운영 노하우를 모아 화곡동에 민속주점을 열었고요. 그런데 제가 고생스런 과거를 딛고 시인이 된 마담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저를 ‘화곡동 황진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게 TV 프로그램에까지 소개돼 학자·문인·예술인·정치인·사업가들이 몰려들었고요. 살면서 그렇게 수준 높은 사람들과 어울려 본 건 처음이었고, 나도 덩달아 신분이 상승된 듯한 착각에 빠졌죠.”
하지만 그는 2000년 민속주점 문을 닫고 술장사를 그만뒀다. 일이 힘든데다 몸이 많이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카페를 운영할 때와는 격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수치심과 모멸감, 서러움도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마음의 상처 위로해주는 시 쓰면서 ‘명상 공동체’라는 새로운 꿈 꾸게 됐어요”
‘그녀들 비탈에 서다’ 저자 시인 이기와

“새벽이 되면 술에 잔뜩 취한 동생들이 전화를 걸어오곤 했어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노예처럼 취급당할 때 느끼는 아픔을 털어놓기 위해서죠. 그때부터 이 아이들의 슬픔을 담은 글을 쓰자, 그 마음을 세상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잘 아는 내가 나서서 노래해주자는 생각을 했어요. 이번 시집 ‘그녀들 비탈에 서다’는 바로 그 술집 종업원들에게 바치는 제 마음이죠.”
이씨는 시집 첫머리에 “이 시집을 고행 중인 모든 영자들에게 바친다”고 적었다. 여기서 ‘영자’는 실명을 밝히는 게 부끄러워 업소를 옮길 때마다 가명을 쓰는 술집 종업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선지빛 붉은 조명등 아래 서면/더욱 물 좋아 보이는 너의 여색/화장한 두께만큼 덧나고 짓무른 너의 치부가/흐린 밤마다 불구의 이방인들에게 수청 들어/온전한 자식을 낳기도 한다지 … 칠흙의 사육장 이지러진 너의 몸뚱이에도/간신히, 봄은 온다지’(간신히 봄은 온다-영자야 4 중에서)처럼, 매매춘 여성의 삶 속으로 직접 들어간 시를 썼다.
술집을 정리한 뒤 그동안 모은 돈으로 경기도 김포에 정착했던 그는 2년 동안 잔디밭과 정원을 가꾸며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어느 날 보니 마을 주민들은 가뭄철에 농사짓느라 땀 흘리고 있는데 저는 마치 혼자만 동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잔디에 물 주고 꽃을 다듬고 있더라고요. 혼자 유유자적 좋은 공기와 숲, 맑은 물을 누리며 사는 것이 과연 내가 원하던 삶인가 하는 고민이 들었죠.”
그날 이후 이씨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생태명상마을을 조성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새 값이 오른 김포 땅을 팔아 강원도 화천에 부지를 마련했다고. 화천군과 농림부에서 마을 기반공사를 지원해주기로 해 2010년이면 그곳에 ‘파로호 명상문화마을’이 조성된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 건강한 마음과 육체를 단련하고, 무농약 농산물과 자연 건강식품을 재배해 살림을 꾸리는 전원공동체가 될 겁니다. 명상문화센터와 예술치료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고요. 저와 뜻을 같이하는 22가구 정도를 모집해 더불어 살아갈 생각이에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요즘 명지대 사회교육원에서 상담심리와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명상마을에서 운영할 치유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기 위해 불교대학 2년 과정을 마치고 꾸준히 마음 수련도 연구하고 있다.
“한때는 제 삶이 시련과 상처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눈물과 혼란의 원인은 제 마음속에 있었죠. 앞으로 생태명상마을에 살면서 자연과 명상, 나눔을 통해 저처럼 상처를 갖고 있는 이들이 다시 희망을 갖고 살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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