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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가을 타는 ‘오빠’들을 위하여

입력 2007.11.12 18:46:00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멋지고 유능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고, 어린 여동생이 늠름하고 자상한 오빠에게 보내는 경배의 시선을 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작은 일에도 금방 삐치고 아이들과 TV 채널권을 두고 다투는 남편을 우러러볼 아내란 없으니 남자들은 외롭다, 쓸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면서 ‘오빠’라고 불러줄 그녀를 찾아 헤매나 보다. 아내들이여, 남편들의 가슴에 부는 가을바람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연민의 정을 담아 “당신이 가장 멋져!”라고 한마디 해주면 어떨까?
가을 타는 ‘오빠’들을 위하여

Ross Bleckner, Meditation(Entering Rooms), 2006, 213×213cm, 리넨에 오일


“아흐, 외롭다, 외로워.” 주변에서 이런 비명과 신음을 지르는 중년 남성들이 늘어난 걸 보니 가을이 깊어가나 보다. 평소 무뚝뚝하고 감성지수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아저씨들이 가을만 되면 고독하다, 쓸쓸하다, 첫사랑이 생각난다 운운하며 로맨티시스트로 돌변한다. 버버리 코트 깃을 세우거나 스카프를 휘날리는 등 다소 과장된 모습을 연출하는 이들도 있다. 의학계에서는 호르몬 분비 탓이라고 냉정한 연구 결과를 내놓아 확실히 남자들이 가을을 탄다는 속설을 입증했다.
얼마 전,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옆자리엔 동창인 듯한 중년 남성들이 모여 있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파스타와 피자 메뉴를 선택한 것을 보니 나름 세련된 취향을 자랑하는 이들 같았다. 그날 그들의 화제는 역시 변양균·신정아 커플이었다. 워낙 자리가 가까운데다 목소리가 커서 노력하지 않고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사촌형이랑 변 실장이랑 친구거든. 그런데 정말 유능하고 반듯한 관료였다는 거야. 그 엘리트가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추락하냐. 그리고 검찰에 출두할 때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늙어가는데 죄를 떠나 너무 안쓰럽더만. 반면 신정아란 여자는 갈수록 생생하게 피어나고 말야.”
“아무리 고위공무원이고 예일대 석사면 뭐하냐.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생활의 즐거움이나 여유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살아왔을 텐데, 그때 젊고 싹싹하고 예일대 박사란 지성을 갖춘, 전문직 여성이 나타나 ‘오빠~’라고 하면 목석이 아닌 이상 흔들리지.”
“그럼. 갖은 수모 다 견디고 뼈 빠지게 일해 출세하고 돈벌어봤자 자식은 유학 보내달라, 명품 사달라 요구사항만 많고 마누라는 자기 몸이나 치장하고 친구들과 외국여행 다니고….그리고 요즘 가장들을 좀 우습게 아냐고. 돈 못 벌고 잔소리하면 당장 이혼 요구하잖아. 남자 취급 못 받은 지는 예전이고.”
“변 실장이 더 불쌍한 건 말야. 그 남자는 정말 신정아란 여자를 사랑한 것 같은데 신정아는 ‘그런 사람이라면 수두룩하다’고 했다는 거야. 지금쯤 어쩌면 자신의 영광이 무너진 것보다 사랑이라 믿었는데 이용만 당한 것에 더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아냐. 어차피 모든 사랑은 다 변하는 거고, 게다가 부적절한 관계에 해피엔딩이 어디 있냐. 아마 몇 년 동안이지만 인생의 봄날과 짜릿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 것에 감사할지도 몰라. 변 실장에게 신정아란 처음 맞아본 필로폰 같은 존재 아니었을까. 뽕이지 뭐. 아, 나도 그런 뽕 한번 맞아보면 좋겠다.”

작아지는 남자, 그들은 ‘오빠’가 되고 싶다~
지난해엔 한 독신 여성을 축하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었다. 상당히 매력적이고 사교적인 그 여성을 축하하기 위해 숱한 남성들이 찾아왔다. 마침 아는 남성이 있어서 “바쁘실 텐데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자 “당연히 이 오빠가 와줘야지”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그 여성의 친오빠는 그날 다른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는데 양오빠인지, 짝퉁 오빠인지 애매한 이들이 스스로 오빠임을 자부하면서 꽃다발, 봉투 등을 들고 줄줄이 나타났다. 마치 자기 덕분에 그 여성이 오늘의 자리에 서게 된 것처럼 뿌듯해하면서. 일일이 만나서 ‘그 여성은 절대로 댁을 오빠로 여기지 않고 댁 같은 오빠는 수두룩하니 정신 차리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몽롱한 착각을 깨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가을 타는 ‘오빠’들을 위하여

Not One Not Two, 2007 152×152cm, 리넨에 오일~11월9일/CAIS GALLery/문의 02-511-0668


한 회사의 간부여성은 이런 경험담을 들려줬다.
“해외지사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최근에 본사에 복직한 선배를 만났어요.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제가 신입사원 시절에 선배를 얼마나 좋아했었다고요. 그때 정말 멋지셨는데…’라고 했죠. 매너도 좋고 업무능력도 뛰어나 따르는 후배가 많았거든요. 저도 여고시절 선생님을 사모하듯 그렇게 혼자 따랐지만 이성적 감정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말을 한 다음부터 그 선배가 제 시선을 피하더라고요. 제가 아직도 자신에 대해 연모의 정을 갖고 있는 줄 착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누가 예전에 절 사랑했다고 뒤늦게 고백해도 별로 충격을 받지 않을 것 같은데 남자들이 오히려 사랑에 약한 것 같아요.”
왜 중년 남성들은 이렇게 ‘오빠’란 말에 약할까. 왜 칠순 영감님조차 환갑 넘은 할머니가 ‘오빠앙~’하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걸까.
아마도 남자들의 속성 때문이리라.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실체와 상관없이 커다랗고 멋지고 유능한 존재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순진무구한 어린 여동생이 오빠의 실력과 늠름함을 경배하는 듯한 시선을 즐기며 우쭐거린다. 그래서 자신의 형편과 여건이 되지 않아도 여동생들에게(진짜 동생이건 다른 동생이건) 선물을 사주고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해결사나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기꺼이 떠맡는다.
꼭 자기가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아서 ‘오빠’ 노릇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유능한 여성이라고 해도 자신이 도와줄 일이 있으면 스스로 ‘오빠’라고 생각한다. 몸이 약한 여사장을 보필해주는 식당 지배인은 그 사장보다 나이도 어리고 배움도 부족하지만 “우리 사장님은 너무 연약하고 가냘파서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며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다. 우리가 보기엔 돌쇠나 마당쇠 노릇을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은 오빠 역할을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그에게 다정한 손길을~
반면 그 남자들의 아내는 어떤가. 남편에게 흠뻑 반해 눈을 하트 모양으로 뜨고 있는 여성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결혼하고 4, 5년만 지나면 남편의 실체를 파악한다. 큰소리만 쳤지 능력도 별로 없고, 수시로 방귀 뀌고, 코를 너무 곯아 집인지 기차역인지 구별이 되지 않고, 잘 씻지도 않는 남자. 조그만 일에도 금방 삐치고, 아이들과 TV 채널권을 놓고 다투고, 수시로 잔소리를 늘어놓는 남자. 클래식 음악은 자장가처럼 여기고 1년에 소설이나 시집은 한 권도 읽지 않는 남자. 갈수록 유치해지고 졸렬해지는 남편에게 아내들이 존경심과 하염없는 사랑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수시로 “이 웬수같은 인간아!” “꼴에 사내라고” 등의 말로 비수를 찌른다. 남편은 아내의 그런 말에 자존심이 허물어지고 더욱 작아지면서 자신을 커다랗고 멋진 존재로 보아주는(비록 착각일지라도) 여동생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닐까.
삭막한 중년 남성의 가슴에 부는 가을바람. 이때 적선(?) 삼아서라도 다정하게 남편의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해보자. “여보, 너무 늦은 고백이긴 한데 아직도 나한텐 당신이 제일 멋져. 사랑해~.” 그런데 그저 글을 쓸 뿐인데도 내 속은 벌써 느글거리기 시작한다. 역시 평소 습관이 중요하긴 하다.
유인경씨는…
가을 타는 ‘오빠’들을 위하여
경향신문사 여성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최근 군가산점 문제, 성희롱 사건 등 여성관련 민감한 사안이 많아 다양한 사람을 취재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 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어볼 수 있다.


여성동아 2007년 11월 5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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