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훈(40)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호감도 높은 연예인 가운데 한 명이다.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소리만 질러대는 줄 알았던 그가 실은 오랫동안 묵묵히 자선활동을 해온 ‘속 깊은 사내’라는 게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부턴가 ‘기부천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죠. 천사는 무슨…. 전 그동안 제가 기부한 게 얼마인지도 몰랐어요. 누가 계산해보더니 ‘9년에 30억원, 한 달에 1천5백만원꼴이다’ 하기에 그런가보다 했죠. 그런데 그게 알려지면서 난리가 나서…. 지금은 그냥 웃어요.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 곧 더 이상 얘기되지 않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 김장훈은 ‘기부’ 얘기를 멀찍이 밀어버렸다. 기부 사실이 알려지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치마 입고 발차기하고 하늘을 날고 기부도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래하는 사람” 그뿐이라는 것이다.
▼ First keyword 노래 - “깊은 절망 속에서 길어올린 단 하나의 행복”
그가 세상에서 쏟아지는 찬사의 물결 앞에 담담한 건, 어쩌면 지나온 마흔 해 삶이 이미 충분히 파란만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 흔들림에 요동치기엔 그가 건너온 파도의 폭이 너무 컸다.
그는 열 살 때 ‘이제 그만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극단적인 허무주의자였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안 계셨고, 어머니는 늘 사업으로 바빴다. 그가 떠올리는 어릴 때 기억 가운데 하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장독대에 올라 숟가락을 들고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다. 어린 김장훈은 늘 외로웠고, 아팠다.
“천식이 굉장히 심해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거의 병원에서 살았어요. 6개월 동안 입원했다가 간신히 퇴원해 하루 학교 나가면, 돌아오는 길에 다시 쓰러지는 식이었으니 친구도 없었죠. 그러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트럭에 부딪힌 뒤 제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는데… 그때 생각했죠. ‘이대로 모든 게 끝나버리면 좋겠다’고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전 멀쩡했고, 몸 몇 번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났어요.”
중학교 때는 어머니 사업이 망했다. 서울 홍은동의 ‘대궐 같은’ 집에서 살던 그의 가족은 세 번의 연이은 부도 끝에 경기도 원당시의 어느 야산 근처, 8만원짜리 사글세방으로 내몰렸다고 한다. 허무에 절망이 더해져 그는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수면제 2백 알을 한꺼번에 털어넣으며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이 살아남았고, 방황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니,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가출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그렇게 살다 노래를 만났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기타 치는 친구들과 함께 서클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노래만 하면 모든 게 잊히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들이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면 제 목소리만 안 들린다고 하더군요. 어릴 때 앓은 천식 때문에 큰 소리가 안 나왔던 거예요. 그때부터 목을 틔우기 위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막노동·서빙·시계 외판 등을 하며 떠돌던 시절에도 그는 매일 남산에 올라가 8~9시간씩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속에 가득 찬 허무, 절망, 아픔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노래를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니 어머니가 대학에 가면 허락해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들어갔죠.”
입학과 동시에 밴드를 만들었고, 지난 91년 첫 앨범을 내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그건 곧 긴 무명생활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98년 ‘나와 같다면’으로 얼굴을 알리기까지 그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콘서트를 하며 가수의 삶을 이어갔다. 때로는 단 세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공연한 날도 있었지만, 김장훈은 그곳에서 비로소 삶의 행복을 알았다고 한다.
“93년 대학로 낙산아트홀에서 공연할 때였어요. 그때는 저를 아는 사람이 워낙 없었기 때문에 공연 들어가기 전까지 매표소 앞에 앉아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죠. 그날도 그러고 있는데 3명이 와서 표를 사더라고요. 제 얼굴도 모르는, 그냥 어디선가 ‘그 공연 좋더라’ 말 한마디 듣고 온 사람들 같아 보였어요. 그런데 돈을 내고 표를 받아드는 표정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군요. 제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걸 안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게 얼마나 가슴 벅찬 느낌이었는지, 몸속 깊숙한 곳이 저릿하면서 알 수 없는 따뜻함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날 이후 김장훈은 “공연에 미쳤다”고 한다. 철들기 전부터 애타게 찾아 헤매던 삶의 의미를 그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찾은 것이다. 그전까지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래했다면, 그때부터 그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Second keyword 철심(鐵心) -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김장훈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로 “쉼 없이 공연해온 것,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꼽았다. 무명시절에도, IMF 외환위기로 가요계가 꽁꽁 얼어붙었을 때도, 공연 수익이 투자비에 턱없이 못 미쳐 공연을 할수록 적자가 늘어날 때조차도 그는 무대에 섰다. 춤추고 노래하고, 와이어를 달고 객석 위를 날기도 했다. 특히 콘서트 도중 객석 위를 날아다니는 퍼포먼스는 김장훈의 공연을 널리 알린 일등공신이다.
“무대 위를 날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98년부터예요. 정동A·C극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거기는 1층, 2층이 구별돼 있어서 2층 관객들이 너무 멀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들도 마음껏 즐기려고 콘서트장에 왔을 텐데 상대적으로 싼 표를 샀다는 이유로 소외돼 있는 걸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죠.”
그는 그날 2층 관객들에게 “지금은 비록 멀리 있지만 언젠가 내가 힘이 생기면 꼭 거기까지 날아가 당신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정동A·C극장에서 콘서트를 하게 됐을 때 그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면 공사를 했다.
“15회 공연이 모두 매진돼 힘이 생겼거든요. 극장주를 설득해 벽을 뚫고 와이어를 달았어요. 좀 더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게 천장 가득 은하수도 붙였죠.”
그리고 공연 도중 깜깜하게 암전된 천장에서 별이 쏟아지는 순간 그는 2층으로 날아올랐다. 김장훈은 자신의 비상이 시작됐을 때 객석에서 터져나오던 탄성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다른 직업, 다른 나이, 다른 인생의 사람들이 똑같이 환호하던 그 순간이 그에겐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컥해요. 그 후에도 공연을 하다 보면 가끔 그렇게 객석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표정을 짓는 순간이 있죠. 극장 안이 환희와 기쁨만 가득해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인간으로 태어나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 환희는 김장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주기도 했다. 지난 2002년 1백 회 예정으로 진행되던 콘서트에서 날기 위해 솟아오르다 추락해 어깨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당한 것이다. 그는 “천장에서 무대로 떨어지던 순간 너무 아프고 두려워 차라리 그대로 죽고 싶었다”며 그 순간을 떠올렸다.
“통증 때문에 의식을 잃어가는 중에도 뭔가 제게 엄청난 일이 생겼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콘서트 도중 일어난 일이라 관객들은 또 하나의 ‘쇼’인 줄 알고 ‘일어나!’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데, 전 혼자 고통 속에 몸부림을 쳤어요. 아득해지는 머릿속으로 계속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되뇌었죠.”
119 구급차에 실려간 그는 어깨뼈가 조각조각 부러졌다는 진단을 받고 어깨에 철심(鐵心)을 박아야 했다. 모든 공연을 중단하고 6개월 이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설명도 들었다.
“하지만 쉴 수 없었어요. 행복해지려고 공연장을 찾았다가 가수가 울부짖으며 실려 나가는 걸 본 사람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공연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사고 44일 만에 붕대를 감고 다시 콘서트를 했죠. 신기하게 무대 위에 서 있는 동안엔 전혀 아프지 않았어요.”
그리고 2005년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김장훈은 다시 날아올랐다.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을 부르며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란 가사가 나오는 순간 무대 위에서 객석 중앙까지 날아간 것이다. 그의 3년 만의 비상에 관객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솔직히 두려웠죠. 추락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데 3년이 걸렸어요. 하지만 저와 관객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이벤트가 끔찍한 사고의 기억으로 끝나는 건 싫었거든요. 꼭 다시 날아야 했고, 그날 공연을 통해 비로소 제가 지난 사고를 극복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 그는 다시 거침없이 날아오르고 무대를 휘젓는 예전의 김장훈으로 돌아왔다. 어깨뼈가 제자리를 찾은 뒤 철심 제거 수술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철심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볼 때마다 지독한 고통조차 이길 수 있게 한 공연에 대한 사랑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는 “공연을 통해 새로운 삶을 알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며 “공연장은 세상에 없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 Third keyword 공황장애 - “나는 방황에 정착한 방랑자”
그 ‘세상에 없는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김장훈은 세상과 벽을 쌓는다. 그는 “노래는 생각의 반영이고, 생각은 생활의 반영”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제대로 살지 않고,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 수 있는 저릿한 어떤 것. 그래서 그는 자신이 벼랑 끝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김장훈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도 실은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결혼하고 싶었어요. 엄마 아빠 손잡고 놀러 다니는 아기자기한 행복을 한 번도 못 느껴봤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남들 다 사는, 그런 보통의 삶을 살고 싶었죠. 한 쪽에는 아내 손잡고 다른 한 쪽에는 아이 손잡고 함께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는 걸 상상하는 게 가장 행복했어요.”
하지만 노래를 부르면서부터, 그리고 자신의 노래로 다른 이가 행복해지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잊힐 만큼 극한의 행복을 느낀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그는 그런 미래의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누군가를 만나 정착하면 결코 지금과 같이 노래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김장훈은 지난 2003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상태에서 불쑥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떠난 적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무대 연출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실은 음악에서 느낀 좌절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노래가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우고 살려 해도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더 이상 절망의 끝에서 질러대던 절박함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어요. 제 삶의 행복은 공연에서 오는데, 제가 제 노래로 관객들을 미치게 할 수 없다면 돈을 벌고 인기를 얻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절망의 끝에 서야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김장훈은 지독히 이율배반적인 이 명제가 노래하는 사람의 운명이라고 했다. 그렇게 절망하기 위해 불쑥 떠난 미국에서 그는 극한의 고통과 만났다. 더 이상 자신의 노래가 진실하지 않은 데서 오는 절망에 낯선 환경이 주는 외로움이 더해져 정신질환을 앓게 된 것이다.
“갑자기 세상 모든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콘서트장에서 떨어졌을 때도 고소공포증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린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죠. 하루 종일 가슴이 뛰고, 제 숨소리마저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감각이 예민해지더군요.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내가 이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포가 엄습하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거의 기다시피 찾아간 병원에서 그는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위험대상이 없는데도 이유 없이 죽거나 미칠 것 같은 공포가 나타나는 병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순간, 김장훈은 눈앞이 캄캄하면서도 동시에 그 느낌이 참 달콤한,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내가 미쳐버렸구나, 정말 인생 최악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가슴 한쪽이 짜릿한 거예요. 이제 바닥을 쳤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면 좋은 노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딴따라는 죽을 때까지 편안하면 안 돼요. 최악의 아픔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것, 방황 안에 정착하는 것. 그게 딴따라의 숙명이자 가장 큰 행복이죠.”
김장훈이 끊임없이 자신의 수입을 기부하는 것은 또다시 ‘배부르고 등 따시지’ 않기 위해, 편안함에 안주해 절박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관객을 위해 그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고등학교 축제부터 백화점 VIP 초청행사까지, 한 달에 70개가 넘는 행사를 소화하며 전국을 누빈 적도 있다. 그러나 절대 ‘자선공연’은 하지 않는다. 그건 돈을 내고 김장훈의 공연을 보러 오는 이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대신 자신이 번 돈을 더 좋은 공연을 만드는 데 투자하고, 세상에 기부한다고 한다.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사느냐고 묻는다면, 삶은 기본적으로 절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삶이라도, 그 안엔 다른 사람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있게 마련이죠. 전 제가 노래를 통해 제 상처를 극복했듯, 다른 이들도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제 노래를 통해 다시 일어설 희망을 찾기를 바라요.”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며 살다 최근 김장훈은 다시 공황장애를 앓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한동안 괜찮았는데, 넉 달 전 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그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은 공포가 몰려와 차를 세우고 뛰쳐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후 신경정신과 처방을 받아 매일 한 알씩 치료제를 먹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살게 하는 건, 그 하얀 알약이 아니라 역시 노래라고 한다.
“세상 모든 게 두려워도 무대만은 두렵지 않거든요. 무대 아래 앉아 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다가도 ‘김장훈씨 순서입니다’라는 얘기에 마이크를 들고 일어서는 순간, 저는 다른 사람이 돼요. 용기가 샘솟고 목소리가 터져나오죠. 그 힘으로 병을 이겨가고 있어요.”
김장훈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 ‘노래만 불렀지’에서 “슬픈 날에도 하늘 보며 난 노래만 불렀지/ 언제나 혼자되어 하늘 보며 난 노래만 불렀어/ 다시 혼자돼도 난 노래만 부르지/ 눈물로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난 노래만 부르지”라고 노래했다. 그는 정말 노래만 불렀다.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토해내며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노래만 부를 것’이라고 한다.
“할 수 있는 한 ‘더 높이 더 크게’, 슬프고 아픈 이 세상이 터져나갈 때까지 노래할 겁니다. 그게 제 삶의 전부예요. 돈도 명성도 다 부질없게 느껴지는 걸 보면, 어쩌면 전 지독한 로맨티시스트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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