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의 집 거실에 놓여 있는, 어릴 적 풋사랑의 사진으로 제작한 미술 작품.(좌)
초대권 없이도 호텔 뷔페를 공짜로 즐길 수 있다는 설명에 지난 8월17일 서울 남산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열린 ‘조영남의 현대미술쇼’ 전시회 오프닝을 찾았을 때 호텔은 정치인, 유명인, 방송 관계자, 심지어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달려온 서울역 노숙자까지 합세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처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조영남’이라는 이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걸 보면 그가 예사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람을 좋아하고 서로 맺어주는 걸 좋아해 ‘인간 복덕방’이라고도 불리는 조영남(62)이 많은 손님들 중 단연 반기는 사람은 유명인도, 정치인도 아닌 ‘젊고 예쁜 아가씨’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여자친구들하고 밥 먹고 수다 떠는 거, 그 다음은 미술, 세 번째가 노래야. 여자 중에서도 젊고 예쁘고 착한 여자가 최고지!”
공인이라면 상당한 파문이 예상되는 말도 그는 스스럼없이 한다. 이미 “동성애·불륜을 포함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랑을 대변하는 ‘제2 사랑당’을 창당해 대선에 도전하겠다”고 말해 신문 1면을 장식한 다음부터 ‘괴짜 로맨티시스트’로 불리는 조영남.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 되는 일도 조영남이 하면 ‘로맨스’가 된다.
Prologue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사랑이야기
그런 그가 조만간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책 ‘어느 날 사랑이’(가제)를 낸다고 한다. 2005년 말 그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로부터 사랑에 관한 책을 한번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고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동의했다고.
“김 대표가 ‘사랑 많이 해보지 않았느냐’고 묻더라고요. ‘좀 해봤다’고 했더니, ‘그럼 그걸로 책을 써보자’고 해서 쓰게 된 거예요.”
하지만 당시 그는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의 파문 여파로 만신창이가 돼 있는 상태였다. 여론의 뭇매를 맞아 ‘체험 삶의 현장’ 등 진행하던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중도하차해야 했던 처지였던 것. 그런 그가 자신의 여성 편력을 밝히는 글을 쓰겠다고 하자 친한 지인들의 모임인 ‘청담’에서 강하게 만류하고 나섰다.
“일본 발언으로 거의 죽을 뻔했는데 여자 얘기까지 하면 이번에는 몰매 맞고 진짜 뻗어버린다. 그 따위 책 쓰는 거 당장 중단하라, 도대체 몇 명의 여자와 놀아났다고? 지금은 자숙할 때다. 왜 입방정에 글방정까지 떠느냐고 난리가 났었지.”
9월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하는 조영남.
들어보니 백 번, 스무 번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기행’을, 그리고 책이 나온 뒤의 ‘후폭풍’을 설명할 자신이 없을 것 같았다고.
그럼에도 그는 출판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매일 만남에도 불구하고 1년이 넘도록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스캔들’ 한 번 일으키지 못하는 ‘사랑 숙맥’ 청담 멤버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입으로 말만 하면 뭐 하나.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떻게 사랑을 하다가 요 모양 요 꼴이 됐는지 털어놓음으로써 궁금증도 풀어주고, 아하! 우리보다 앞서 산 사람들은 이렇게 사랑을 했구나, 그럼 나는 이렇게 사랑을 해야겠구나 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솔선수범을 하기로 한 거지.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도 여러 차례 검열을 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론 생각보다 좀 심심한 책이 됐어. 책이 나온 뒤 아이들이 ‘아빠는 왜 되돌아봐야 아프기만 한 아빠의 사랑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들려줘야만 하나요. 그래서 아빠와 우리가 얻는 게 뭐죠?’ 라고 묻는다면 ‘애비의 막판 노망이다. 자유를 좇다보니 번잡해졌고 번잡해지다보니 여러 측면에서 오해를 사게 됐다. 애비의 운명은 마치 살아있는 동안 오해를 풀라는 운명인 듯하다. 못난 애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할 수밖에….”
서울대 음대를 중퇴하고 대중가수로 나섰을 때부터 조영남의 이름 앞에는 늘 ‘자유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수갑 찬 자유인’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모두 표현하기에는 이 사회가 너무나도 경직돼 있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는 사랑 문화가 좀 촌스러운 것 같아. 피카소에 대한 어떤 책에서도 그가 여자를 갈아치우고 그로 인해 평판이 나빠져 괴로워했다는 대목이 없어. 여자를 여덟 명이나 갈아치우고 그중 두 명이 자살을 했는데…. 피카소가 우리 동네에 살았다면 아마 죽거나 미쳐야 했을 거야. 불륜·이혼·재혼이 이젠 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쉬쉬하는 거, 이건 화투를 죽기 살기로 치면서 불량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왕 하는 거 좀 떳떳하게 하면 안 되나.”
Essay 사랑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그는 책을 다 읽고 올 것을 주문했다. 이에 가판을 받아들고는 메모를 해가며 4백50쪽에 달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1번 애인 이름=오명자/만난 동기=초록색 머플러, 심은하같이 예쁜 외모에 끌려서/헤어진 이유=오명자가 조영남의 선배랑 바람이 나서/특이사항=오명자가 첫날 밤에 검정색 속옷을 입었는데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조영남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검정색 속옷만 입는다고 함. 2번 애인 이름=최시현/만난 동기=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울 음대 연극반에서 사랑이 싹틈/헤어진 이유=사랑이 식어서 조영남이 먼저 이별을 고함/특이사항=최시현의 엄마가 조영남이 다니던 서울 음대로 찾아오는 바람에 조영남은 굉장히 창피했다고 함. 3번 애인 이름=윤여정/만난 동기=방송국 선배의 소개/헤어진 이유=조영남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특이사항=13년 동안이나 결혼생활을 하며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음….
이렇게 이어지는 그의 사랑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아라비안나이트’ 같았다. 기억력은 또 얼마나 대단한 지, 처음 여성을 만났을 때의 인상, 옷 색깔, 향기부터 이별을 고하기까지의 시시콜콜한 (사실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자초지종, 헤어질 때의 마지막 표정까지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번호를 매기는 중간 중간 어릴 적 풋사랑, 잠시 스쳐간 사랑 등 수없이 많은 곁가지들이 등장해, 도저히 메모로는 불가능하고 지도를 그려야 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수위에 오른 사랑만 본 가지로 다룬 게 그 정도야. 그래도 사랑은 은행 잔고 같아서 여전히 모자라고, 충분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웃음).”
‘은행잔고’ 같다는 건 반대로 생각하면 그 많은 여성들과의 사랑담, 가슴 떨리는 기억은 그에게 소중한 삶의 자산이 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고민한 끝에 대부분의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같아” 가명으로 쓰기에도 찜찜하고 실명으로 쓰기에는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첫 번째 아내 윤여정에 관한 부분이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하지도 않겠지만 그쪽 입장에서는 (이름이 거론되는 게)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내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잘못한 건 인정해도 후회나 미련은 없어. 그럼 사는 게 너무 구차하고 피곤해지거든.”
그는 윤여정과 이혼하면서 두 아들의 배다른 동생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두 번째 결혼에서 실패한 원인이 됐다고 한다.
“두 번째 색시와는 모든 게 다 좋았는데 자꾸 아이를 낳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생각해봐. 엄밀하게 말하면 바람피우고 그것도 모자라 내 자식도 다 버리고 나온 마당에 양심적으로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었겠나. 그래도 자꾸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을 피워 해결책으로 미국에 가라고 했지. 아직 젊고 예쁘니까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있으면 분명히 아이 낳자는 사람이 있을 거다. 그렇게 달래서 보냈어.”
책의 큰 가지로 등장하는 아홉 명의 여성 가운데는 그의 인생관을 뒤흔들어놓은 특별한 사랑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 LA에서 만난 그레이스와의 사랑이 바로 그렇다.
“두 번째 색시와 결혼하기 전 미국에 살 때였는데 그레이스라는 멋진 아가씨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며칠 동안 꿈같은 밤낮을 보냈지. 먹고 자고 섹스하고…. 그런데 나중에 그레이스가 밑도 끝도 없이 ‘고백할 게 있는데 놀라지 말고 잘 듣고 이해해 달라’면서 털어놓은 사실이 그 집에서 동성애 남편, 동성애 아내와 같이 살고 있다는 거야. 자기 친구들은 대강 다 그렇게 살고 있다나. 하하.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건 인격의 기초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지더라고. 그럼 난 뭔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조영남이 작업을 걸 때마다 매번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표현대로라면 “키 작고 코 납작한 추남 가수”인 그가 어떻게 매번 여자들을 유혹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아하, 그건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그쪽(여성들)에게 물어봐야지.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 말을 잘 들어주고 편안하게 해 준다는 거, 그리고 돈에 연연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는 거.”
‘어느 날 사랑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방대했던 사랑이야기를 정리해놓고 있지만 책은 비단 그가 여자를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속에는 그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랑의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촘촘하고 밀도 있게 드러난다.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느냐’에 대한 고찰만 해도 그렇다. 그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루이 14세가 제정했다는 ‘사랑의 법전’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 톨스토이와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관한 문학적 표현을 다 들춰본 끝에 드라마 작가 김수현의 산문집에서 그럴듯한 답을 얻었다고 한다.
“김 작가가 쓴 데 따르면 마법의 보자기가 하늘을 빙빙 돌다가 나와 어떤 여자의 머리 위를 덮치면 그게 사랑이래.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제 교통사고가 벌어질지 모르는 것과 흡사하지. 안전장치가 장착돼 있지 않기 때문에 순식간에 날아가버릴 수도 있고 한 여자와 두 남자의 머리에 쌍으로 내려앉을 수도 있지. 내가 알고 있는 남자 열 명 중 일곱은 보자기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와 다른 보자기 곁을 서성대기 일쑤고…. 물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하지만 삶의 쾌적함(쿨함)이란 여유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참사랑이 가능하지.”
Epilogue 조영남이 꿈꾸는 사랑
그는 책을 집필하면서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고 한다. 본편에 넣지 않은‘부록 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바로 그것. 특히 그 ‘부록’ 가운데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사랑의 형태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상대는 30대 중반의 촉망받는 비즈니스 우먼. 상당한 지성과 미모를 갖추고 있으며 매우 활동적이고 사려 깊은 성격이라고 한다. 조영남은 몇 년 전 만난 그녀와의 관계를 “사랑과 우정 사이의 고차원적인 관계”라고 정의했다.
“그녀도 따로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고, 나도 여자친구가 있어.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고, 넷이 같이 만나기도 하지. 하지만 나와 그녀는 섹스를 하는 관계는 아니야. 마음먹으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와의 관계에 있어 모래성을 지을까, 견고한 돌성을 지을까 고민한 끝에 돌성을 짓기로 결심했어. 섹스가 개입된 사랑은 시한부야. 곧 변질되기 마련이거든. 그 시한부를 연장하는 게 결혼인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풋사랑까지 포함하면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쉼 없이 쭈욱~ 사랑을 해온 조영남. 그는 과연 어떤 사랑을 원할까.
“그 사람이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수 있는 사랑이 답이야. 두 번이나 이혼하고 여러 번 여자를 바꾼 내가 그렇게 말하면 다들 우습다고 하지만 내가 사랑한 여자가 아직 아무도 죽지 않은걸. 난들 어떻게 하겠어(웃음).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여자 쪽에서도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줘야 해. ‘쪼잔’해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뚱뚱한 지갑이나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으면 좋겠어. 옷은 흰색이나 검정색을 입어야 하고 머리 모양은 쪽진 스타일이 좋겠고.”
죽음에서 뚱뚱한 지갑에 이르기까지 무한대의 심오함과 ‘쪼잔’함을 오가는 조영남. 그의 사랑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집에 살면서도 집 안에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허름한 자장면 그릇에 밥을 먹고 다방 컵에 물을 마시는 그의 삶의 모습과 닮은 듯도 하다.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삶과 사랑의 본질에 가장 접근해 있는 이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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