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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빈둥지 증후군 - 딸의 유럽 여행

2007. 09. 10

딸이 한 달간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과할 정도로 덤덤해진 부부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딸이기에 빈자리는 컸다. 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얘깃거리가 떨어졌다. 이윽고 딸이 돌아와 가정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지만 걱정거리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자식이 품을 떠난 뒤 남편과 단 둘이 보낼 노년을 대비해 부부클리닉에 다니거나 같이 춤이라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딸아이가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대학시절의 아름답고 황홀한 추억이 될 것 같아 큰맘먹고 허락했다. 하지만 딸이 스무 살이 되도록 그토록 오래 떨어져보기는 처음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구촌 곳곳에 테러가 심하니 혹시 딸아이가 머무는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테러나 폭파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배낭족을 노린 도둑이나 강도가 많다는데 물건이나 여권을 분실해 낭패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여학생들끼리만 가는데 다른 위험은 없을까… 등에 대한 걱정을 한 게 아니다. 딸아이는 시장 상인들이 사용하는 전대처럼 배에 두르는 돈 주머니를 마련하는 등 꼼꼼하게 여행준비를 했고 혼자가 아니라 3명이 함께 떠나는데다 여행일정이 대부분 대도시라 특별히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별문제 없을 듯했다.
딸이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남편이었다.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각자의 삶에 충실해 ‘따로 또 같이’를 가훈으로 살아온 우리 가족은 항상 딸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뤄졌다. 딸의 대학입시, 딸의 대학 선정과 전공과목 선택, 딸의 친구들, 딸이 본 영화, 딸이 전해주는 연예계 소식들을 주제로 우리 가족은 늘 이야기를 나눴다. 소소하게는 외식할 때 메뉴를 고르거나 치킨이냐 피자냐 야식을 주문할 때도 딸의 취향을 존중했으며 심지어 이사할 집을 선택할 때도 지혜로운 딸의 의견을 존중했다. 우리 부부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역시 딸아이의 주도로 치러졌다.
이렇게 우리 집의 기둥이자 정신적 지주인 딸이 무려 한달이나 집을 비운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딸아이는 생전 처음 떠나는 기나긴 여행에 들떠 이 엄마의 애절한 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드디어 여행 떠나기 전날, 모처럼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는데 딸의 당부 말씀이 이어졌다.
“엄마는 자꾸 아프다는 말만 하지 말고 본격적으로 건강검진 좀 받아봐요. 아빠는 제발 술 좀 그만 드시고 일찍 들어와요. 나이 생각을 하셔야지.”
우리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 부부는 딸아이를 해외유학이나 혹은 외국에 시집이라도 보내는 것처럼 공항까지 따라가 환송했다. 우려했던 일은 딸아이가 떠나자마자 곧장 나타났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안에서부터 우리 부부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유라가 무사히 비행기를 탔을까?” “프랑스에 갈 때는 가방 분실이 잦던데 가방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텐데” 등 딸과 관련한 몇 마디를 나눴을 뿐.

20년 결혼생활 후 데면데면한 ‘친척’이 된 남편
집 밖에 나가면 술도 잘 마시고 친구들에게도 유쾌하게 대하지만 집 안에서 특히 아내에게는 마냥 무뚝뚝하고 과묵한 남편과 20년 가까이 살다 보니 거의 오촌당숙이나 사촌오빠 대하는 것과 비슷하다. 공동 합작품인 딸아이에 관련해서는 교육관도 비슷하고 관심사도 비슷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밖의 대화에선 서로 시큰둥해지고, 돈 문제나 남편의 음주흡연에 대해 말하다가는 싸움으로 번지기 쉬워 아예 입을 다물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부부싸움도 사랑이 넘치고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거지, 친척의 단계에 이르면 잘 싸워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서로 소 닭 보듯 그렇게 무덤덤하게 지내며 평화를 유지해왔다.
딸은 자신이 없는 동안 남편 보고 일찍 귀가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만약 남편이 일찍 들어오면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눠야할까.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도 보지 않고 ‘개그콘서트’를 보고도 잘 웃지 않는다. 부부가 함께하는 취미도 없고 손잡고 산책을 한 것도 임오군란 시절의 이야기처럼 아득한 추억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한 달 동안 20일 이상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 또 어쩌다 남편이 일찍 귀가한 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내가 일이 있어 늦게 돌아왔다. 남편은 ‘바람이 들어와 시원하다’는 핑계로 거실에서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며 꾸벅꾸벅 졸다 잠들거나 아예 딸 방에서 잠을 잤다. 딸아이가 없으니 우리 부부의 대화는 “유라 전화 왔어?” “바르셀로나에 있대. 기차를 잘못 타서 마드리드까지 갔다가 새로 표를 사서 예상 밖의 돈을 썼다고 투덜거리더라”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가 대부분이었다.

가정의 활력소인 딸의 부재가 남긴 교훈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은근히 걱정이 됐다. 앞으로 딸아이가 유학이나 결혼 등으로 우리 곁을 떠나면 난 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갈수록 재미없어지고 냄새까지 나는 영감으로 변해가는 남편과 뭘 하며 노년을 보내나.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할까. 잉꼬부부들은 함께 새벽 약수터 등산, 장보기, 여행 가기, 테니스나 골프 등 각종 취미를 즐기고 애교 있는 아내들은 알콩달콩 귀염도 잘 떨지만 난 솔직히 남편과의 대화보다 친구들과의 수다가 훨씬 재미있고 혼자 ‘커피프린스 1호점’ 같은 드라마를 보며 “어머머, 공유가 언제부터 저렇게 멋있었지?”라고 감동을 느끼는 게 좋다. 그렇다 보니 남편은 갈수록 오촌당숙처럼 느껴져 둘이만 있으면 가슴이 콩닥거리는 게 아니라 어색하기 짝이 없다. 왜 부부가 자신들의 집 안에 있는데 부적절한 관계처럼 여겨지는 걸까.
드디어 딸아이가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우리 부부는 딸아이로부터 여행담을 듣고 찍어온 사진을 보며 화목하고 대화가 풍부한 가족의 모습을 되찾았다. 남편의 귀가시간도 빨라졌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한편 걱정이 된다. 이 영감과 백년해로하기 위해 지금부터 부부클리닉이라도 다녀 대화법을 배우거나 댄스교습이라도 함께 받을까. 아니면 물귀신처럼 딸아이에게 달라붙어 유학이건 결혼이건 함께 따라가겠다고 할까. 이런 말을 하면 딸아이가 가출할까봐 혼자 속만 끓이고 있다.
유인경씨는…
빈둥지 증후군 - 딸의 유럽 여행
경향신문사 여성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최근 군가산점 문제, 성희롱 사건 등 여성 관련 민감한 사안이 많아 다양한 사람을 취재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 sooda.com)에 가면 그의 칼럼과 기사를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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